〈 129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30
“아…… 머리 아퍼……”
“좋은 아침입니다 대장 님.”
막사 외실에 놓인 책상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관 러즈반이 인사를 건네왔다.
“어젯밤 연회에서 과음하시길래 말릴까 고민했는데 역시나 말릴걸 그랬군요.”
“말리지 그랬어……”
멜리사가 숙취로 인상을 찌푸리며 책상에 앉았다.
“두통에 속까지 거북해. 윽.”
“옆자리에 앉은 버나드 경을 붙잡고 굉장히 신이나 보이시길래 말릴 수가 있어야죠. 뭐라고 하실까봐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내가?”
“네.”
“버나드 경을 붙잡고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뭐 실수한것 없지?”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러즈반이 뜻모를 미소를 짓는다.
그 모습을 보고 대뜸 불길한 기분이 든 멜리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솔직히 말해. 어제 진짜 실수 안했어? 그 기분 나쁜 웃음은 뭐야.”
“아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버나드 경에게 좀 과하게 부탁한 것 말고는 별 것 없었어요.”
“과하게라니……? 그리고 부탁은 또 뭐야?”
“함께 부대를 이끌자며 매달렸다고 하는게 정확하겠네요.”
멜리사가 눈을 휘둥그레떴다.
“내가 매달렸다고? 거짓말이지?”
“기억 안나십니까?”
“전혀 안나. 사실대로 말해봐. 진짜야?”
러즈반이 어젯밤 그녀가 했던 말을 토씨 하나 안틀리고 그대로 읊어댔다.
“앞으로 백검대 일에 간섭하되 하나부터 열까지 나와 모든걸 상의해야한다고 단단히 일러뒀지! 절대 비밀이 있어선 안된다고 하면서! 이제야 그가 내 손에 들어왔어! 해냈다고 러즈반!”
그가 헛기침을 하고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기억 안나세요?”
“맙소사……!”
멜리사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내가 정말로 그런 말을 했다고?”
“약속을 안지키면 버나드 경의 페니스를 자르기로 했다는 어마무시한 협박까지 했다고 어제 귀가할때 저한테 당당히 말씀하시던걸요?”
“미쳤어!”
그녀의 얼굴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아냐! 그런 말은 안했을거야!”
“창피하십니까?”
“당연히 창피하지! 분명 사실이 아닐거야.”
“버나드 경한테 확실히 약속까지 받았다고 좋아하시던데요? 어쨌든 잘 된 일 아닙니까? 두 분이 협력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거든요.”
“그래도 이건 아니야!”
멜리사가 책상을 탕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없어보이잖아! 결과적으로 나만 망가졌다고!”
“결과만 좋으면 됐죠. 원하는 결과를 얻으셨잖아요.”
“내가 원하던 그림은 이게 아니었어! 그가 머리를 조아려야했다고!”
“그럼 우리 대장 님의 어젯밤 발언은 취소라고 버나드 경한테 가서 말할까요? 번복하시겠습니까?”
“이미 뱉은 말을 어떻게 취소해! 그것도 모양빠지는 일이다!”
멜리사는 자신이 먼저 수그리고 들어갔다는 것에 크게 낙담했지만, 전부터 버나드한테 하고 싶었던 말을 술김에 빌어서라도 했기에 한편으로는 후련했다.
하지만 부관 러즈반 앞에서 그간 보이던 행동이 있었기에 대놓고 좋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취해서 잠깐 미쳤던거야.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어쩔 수 없지. 지휘관으로서 한번 내뱉은 말을 번복하는 것도 위엄이 서지 않고. 버나드 경과 같이 일하는 것이 불쾌하지만 받아들이는 수 밖에.”
“받아들이셔서 다행입니다.”
얼마뒤 아침보고를 끝마친 러즈반이 나간뒤 멜리사는 혼자 생각에 잠겼다.
“근데 내가 진짜 그랬나……?”
잔뜩 취했던 탓에 어젯밤 일이 하나도 생각이 안났다.
***
녹음이 짙은 산속.
그 산속을 딘과 샨, 루와 엘레나가 등산중이었다.
산을 오르는 그들은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멀리서도 한눈에 띄는 그것을.
“냄새가 난다부러. 가까워졌시.”
“이쪽이 맞는기?”
“작은 오빠는 큰 오빠를 못믿는거지라. 큰 오빠 코 좋디.”
“나만 믿고 따라와부로. 맞당게.”
딘이 가슴을 쾅쾅치며 자신있게 말했다.
“전에도 우연히 발견해봤시라.”
“어서?”
“어디긴 우리 사는 동네여.”
“우리 동네에도 있었오야?”
“그랗쥐. 마을 뒷산 커다란 동굴서 잠깐 살다 사라졌다요.”
“오야, 큰일날뻔했시라.”
앞에서 잡담을 나누며 산을 올라가는 세 사람의 뒤를 얌전히 따라가던 엘레나는 얼굴에 떠오른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괴물 같은 삼남매와 다니는게 두려웠고, 무엇보다 지금 이 상황이 매우 힘들었다.
가파른 산을 타는 일은 정말이지 가녀린 그녀의 체력으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망가고 싶어!’
몸이 힘든 것도 힘든 것이지만, 가장 슬펐던 것은 평생 누군가의 노예로 산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죽음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장 이 지옥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기회를 봐서……’
숨을 헐떡 거리며 삼남매의 뒤를 열심히 따라가던 그녀는 지친척 점점 그들과 거리를 벌려나갔다.
삼남매는 그저 그녀가 등산을 못해 뒤쳐진다고 생각할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더욱이 세 사람 다 천진난만하고 산만한 구석이 있어서 꼼꼼이 감시를 할 성격들이 아니었다.
지나가는 뱀만 발견해도 그들은 금세 호기심을 느끼며 엘레나를 까마득히 잊어버리곤 했다.
“나부터 한 입 묵고 준디.”
“아니지라. 저 번에 먼저 먹었으니 이번에 잡은 놈은 나부터 한입이랑게.”
“오빠들요, 예쁜 여동생 먼저 챙겨줄 생각은 없는교?”
“없다부로!”
“귀여운척 말고 끄지라! 면상에 토해뿔기 전에!”
그렇게 서로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졌을때쯤, 엘레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대로 몸을 내빼고 산아래로 뛰기 시작했다.
‘키보다 더 큰 수풀에 숨어있으면 못찾을거야!’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등에 새겨진 노예각인이 빛을 내며 화끈거리더니 이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워졌다.
“꺄악!”
마치 등에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운 고통이 그녀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발버둥쳤다.
“사, 살려줘! 아악!”
귓가에 버나드의 음성이 무섭게 메아리쳤다.
-너의 주인은 누구더냐!
“버, 버나드 님입니다!”
-네가 해야할 일은 무엇이더냐!
“버, 버나드 님이 시키신 일을 해야합니다!”
-어서 돌아가라!
그것은 실제 버나드의 목소리가 아니라 각인에 새겨진 버나드의 뜻이었다.
버나드가 아닌 각인이 버나드가 되어 그녀를 꾸짖는 것이었다.
“흐흑, 역시……”
엘레나는 힘없이 일어나 삼남매가 있는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자 불처럼 뜨거웠던 등의 통증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주인님이라도 옆에 있으면 몰라도 식성마저 남다른 저 아이들과 사는건 무섭단 말이야…… 흑, 흑!’
엘레나는 고기를 먹더라도 구워먹는데 반해 삼남매들은 날고기를 좋아하고 바닥을 기어다니는 벌레도 아무렇지않게 잡아먹었다. 그런 모습에서 그녀는 루로키나 거지 삼남매에게 심한 이질감과 두려움을 느꼈다.
‘주인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길래 매일 코빼기도 안보이는 것일까…… 그리고 난 대체 어디로 가는중인거야……’
그녀는 산 윗쪽으로 다시금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옷이 땀으로 흠뻑 젖어가며 한참을 오르자 마침내 거지 삼남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오와와, 오와와. 내가 무랬오. 냄새가 확실하다 해찌?”
“마스터울프가 좋아하겠시라.”
“칭찬받겠디. 나 업어주겠디.”
삼남매는 산중턱에 자리잡은 습지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뭘보는지 궁금했던 엘레나도 그들 곁으로 바싹 다가가 같은 방향을 쳐다봤다.
그녀의 입이 저도 모르게 쩍 벌어졌다.
“저, 저게 뭐예요?”
습지 중앙에 커다란 외눈박이 거인이 한가하게 누워있었다.
첫째 딘이 큭큭 웃는다.
“노예는 저게 뭔지 모르나부.”
둘째 샨이 그녀를 쳐다본다.
“저걸 모르요?”
막내 루가 킥킥거렸다.
“노예라 무식하디. 키클롭스라요, 키클롭스.”
삼남매가 동시에 말했다.
“마스터울프가 잡아먹을 키클롭스요.”
“마스터울프가 잡아먹을 키클롭스요.”
“마스터울프가 잡아먹을 키클롭스디.”
***
밤새 클레어와 번갈아가며 근무를 서던 버나드는 아침해가 뜨자 일행들이 있는 텐트로 가서 간단히 아침식사를 마친 후 홀로 야영지를 나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문으로만 접해오던 성격과 달리 딴 사람 마냥 행동하는 블레어의 정체가 수상했다.
물론 샤를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첫만남에서 좋은 사람인척 군것도 있을테지만, 단순히 그런식으로만 생각하기에는 한때 비밀조직의 수장이었던 그의 예리한 감이 계속 파헤쳐보라며 등 떠밀고 있었다.
‘주변을 훑어봐야겠어.’
알아봐서 나쁠 것도 없다는 생각으로 그는 백검대 야영지에서 불과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루테니아 가문의 야영지에 몰래 잠입했다.
잠입하고 난뒤 곧바로 알 수 있었던 정보는, 가신들이 양쪽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쪽은 오래전부터 블레어를 섬기던 가신들이었으나 지금은 관계가 미지근해진 자들이었고, 다른 한쪽은 블레어가 어느날 갑자기 가까이두기 시작하면서부터 최근 가장 최측근으로 꼽히는 자들이었다.
즉, 한쪽은 박혀있던 돌이었으나 어느 순간 버려졌고, 다른 한쪽은 굴러들어온 돌이라고나 할까. 굴러들어온쪽은 주로 루테니아 가문을 오래전부터 섬기던 귀족들이 아닌 외부에서 유입된 자들이 많았다.
그 두 세력이 서로를 헐뜯으며 대립중이었다.
가장 밑에 있는 종자들끼리도 앙숙이었다.
영내에서 우연히 양세력의 기사를 섬기는 종자들끼리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을 발견하고 운좋게 얻어낸 정보였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시장바닥에서 굴러먹던 용병을 주인으로 섬기는 주제에 어디서 감히 눈을 부라려!”
“네 주인이 자리 뺏겼다고 질투하는거냐?! 능력이 모자르니까 쫓겨난건 아니고?”
“뭐? 이놈이 맞을라고!”
버나드는 잠시 싸움 구경을 하다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하녀들이 일하는 장소였다.
기사와 종자들의 아침식사가 끝난 직후라 야외취사장에서 일하는 하녀들이 뒷정리를 하느라 분주해보였다.
“웬디를 찾고 있어요. 어딨는지 아시나요?”
“웬디?”
“네, 웬디요.”
웬디란 여자는 오래전 레아가 비밀리에 블레어를 살펴보러 왔을때 돈으로 매수한 하녀였다.
이후에도 꾸준히 블레어에 대한 정보를 보내주곤 했으나 밤의 늑대들이 해체된 뒤로 연락이 끊겼다.
이번 여정에 따라왔는지부터 묻는게 먼저였으나 버나드는 일부러 그녀가 여기있는 사람처럼 단정짓고 물었다.
“여기서 일하죠?”
“여기 있긴 하지만.”
운이 좋았다.
“넌 누구니? 처음 보는 얼굴이구나.”
뚱뚱한 중년 하녀가 자기보다 키 작은 버나드를 귀여워하는 눈빛으로 내려다 봤다.
“누굴 모시는 아이야? 웬디는 왜?”
“돈을 줄게 있어서요. 전에 빌려서.”
“돈?”
잠깐 생각하던 중년하녀가 갑자기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 애가 동정을 떼줬니?”
“……”
버나드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내렸다.
당연히 연기였고, 그녀가 알아서 핑계를 만들어주는데 굳이 반박할 이유가 없었다.
“예, 뭐…… 답례를 하고 싶어서……”
“하여튼 그 계집애도 제정신이 아니라니까. 애를 왜 건들어. 아무튼 네가 마음에 들어서 한번 줬나보네. 돈 같은거 필요없을테니 그냥 가거라.”
“예? 안돼요. 꼭 답례를 하고 싶어요.”
“너한테 돈 받을 생각은 없을걸? 오히려 그 계집애가 호강했지.”
“그냥 어딨는지만 알려 주세요. 만나서 얘기하고 싶어요.”
“걔한테 아주 푹 빠졌나보구나. 하긴 첫 여자면 그럴만도 하지. 아직 여자를 많이 못만나봐서 뭘 모를거야.”
중년하녀가 머리를 쓰다듬고는 먼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에 빨래터에 가봐라. 거기 있을거야.”
“감사합니다.”
“그 애는 돈을 너무 밝혀서 주변에 남자가 한 둘이 아니니까 빨리 포기하는게 좋을거다. 여자를 만나고 싶거든 차라리 창녀가 더 나을거야. 우리 가문에서 생활하는 종자랑 기사들 중에 그 애 배위에 안올라가본 것들이 없어.”
“명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