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29
“빨리 들어와! 잠깐만 얘기 하고 온다며!”
안에서 샤를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버나드가 머리를 긁적였다.
“먼저 경계 서고 있어. 난 잠시 샤를리나 님을 상대해야 할 것 같다. 두 시간 뒤에 교대해줄게.”
“응……”
다시 안으로 들어가자 어느새 잠옷으로 갈아입은 샤를이 팔짱을 낀 채 침대에 걸터 앉아있었다.
안으로 들어오는 버나드를 못마땅하게 노려보는 것이 마치 ‘너 이놈 잘 걸렸다’며 그를 붙잡고 구박이라도 할 모양이었다.
평소에 코빼기도 안비춘것이 원인이다.
“당신은 책임감이란게 없……!”
그동안 쌓인 감정을 폭발시키려는 찰나, 버나드가 말을 가로채며 그녀를 다그쳤다.
“블레어 공과 가까이 지내지 마십시오. 오늘 빈틈을 많이 보이셨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주의해주십시오.”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당신 주제에 날 혼내는거야?”
“블레어 공이 수상합니다. 모든 것은 샤를리나 님을 위해서입니다.”
“바보 같은 소리마! 그는 착하고 순진한 귀족일 뿐이야!”
“어디가 착하고 순진해 보이셨습니까?”
“그는 당신과 달라! 날 위해서 개가 되어주겠다고 했어! 눈앞에서 멍멍 왈왈 짖기까지 했다고!”
“……?”
버나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개가 되어주다니요?”
샤를이 뽐내듯 대꾸했다.
“무슨 뜻인지 몰라서 그래? 개처럼 내 말을 잘 듣겠단 소리잖아. 날 무시하는 당신따위랑 달라. 그는 날 잘 이해해주는 사람이야.”
“이유없는 호의는 없습니다.”
“이것저것 잘난척은 다 하지만 사람 보는 눈은 없나보네.”
“개처럼 군다고 해서 사람 좋은게 아닙니다. 오히려 더 수상합니다. 어떤 귀족이 치욕스러운 행동을 자진해서 하겠습니까?”
“치욕스럽다니? 나니까 가능한거야. 내가 바로 아킨테의 샤를이니까. 세상 누구든 내 앞에서 기는척이라도 하며 예쁨을 받고 싶어하지. 그렇지 않아? 당신도 내게 예쁨을 받고 싶으면 어디 한번 왈왈 하고 짖어봐.”
짓궂은 미소를 띠는 그녀를 향해 버나드가 가당치않다는듯 인상을 굳혔다.
“아킨테 가문의 명성은 미셸님이 쌓은 것이지 샤를리나 님이 이룩한게 아닙니다.”
“당신! 날 모욕하는거야? 내가 한게 아무것도 없다고? 내가 죽도록 가기 싫은 제국으로 가는 이유가 뭔데! 당신하고 아킨테 영지의 백성들 때문에 가는 것이잖아! 내가 희생하는 중이라고!”
샤를은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더니 곧바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제 딴에는 무척 억울하다고 생각했는지 순식간에 감정이 복받쳐 오른듯했다.
“흐윽! 흑! 내가 왜 하는게 없어!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데……!”
눈물을 보자 버나드는 그만 마음이 약해져서는 오래전 샤를이 어릴때, 그녀에게 들려주었던 동화속 한 구절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난 혼자서는 못하지만, 네가 곁에 있어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못 먹는 음식도 먹고, 먼 거리도 뛸 수 있고……”
샤를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버나드를 쳐다보았다.
“힘든 일도……”
그녀도 동시에 말했다.
“힘든 일도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어.”
“힘든 일도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어.”
실내에 침묵이 감돌았다.
눈물을 뚝 그친 그녀가 아리송한 눈길로 물었다.
“…땅의 요정 우드에 나오는 대사잖아.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저도 좋아하는 동화책이니까요.”
“왜 하필 우드야 기분 나쁘게.”
“왜요?”
“땅의 요정 우드는 건들지마. 그 이름은 특별하다고.”
참고로 샤를은 어릴적, 버나드를 땅의 요정 우드라고 불렀다.
“절 우드로 생각하세요. 개는 못해도 우드는 할 수 있습니다.”
“절대 못해. 내 우상이나 다름없는 우드를 건드리면 화낼거야.”
“우드가 되어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동화 좋아하잖아요.”
“당신이 날 얼마나 안다고 그런 소릴해?”
그녀가 눈물 때문에 충혈된 눈으로 인상을 썼다.
그럼에도 버나드는 미소를 잃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디크와 곰, 공주와 콩나물을 듣고 싶지 않으십니까? 아주 재밌게 얘기해드릴 수 있는데. 어서 누워보세요. 동화는 누워서 들어야 제 맛입니다.”
“자, 잠깐! 누가 한다고 했어!”
“고집 피우지 말고 일단 누워봐요. 자.”
샤를은 버나드의 재촉에 못이겨 이불을 덮고 반듯하게 누웠다.
버나드가 침대에 걸터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며 따뜻한 미소를 짓자 샤를은 새침한 얼굴로 시선을 돌리며 벽을 쳐다보았다.
“이번 한번만이야. 재미없기만 해봐.”
“너무 재밌어서 잠이 잘올겁니다.”
“재밌는데 잠이 잘오는게 어딨어?”
“재밌는 얘기 덕분에 불안이 가시고 마음이 편안해지니까 잠이 잘오죠.”
버나드가 빙긋 웃어보였다.
“기대하세요.”
“자만하지마, 난 절대 안잘거니까.”
***
“교대할 시간이다.”
버나드가 하품을 하며 밖으로 나왔다.
그때까지 경계를 서고 있던 클레어가 그를 돌아보며 눈을 껌뻑거린다.
“안에서 뭐했어?”
“동화 들려줬어. 세 편 정도 들려줬더니 아주 잘 주무시네.”
“동화? 샤를님은 아이가 아닌데……?”
“겉은 저래도 여전히 아이인걸.”
“……”
클레어는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
버나드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집을 빼내 손에 쥐고 클레어의 등을 토닥였다.
“수고했어. 잠은 내실 입구에서 자. 모포 한장 갖다놨어.”
“응……”
버나드와 교대를 한뒤 안으로 들어간 클레어는 매우 평온한 모습으로 잠을 자고 있는 샤를을 발견했다.
평상시엔 몸을 뒤척이며 못자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늘은 어째서인지 숙면에 든듯했다.
“다행이야.”
그녀는 내실을 나와 입구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정확히 두시간뒤 잠에서 깨어났다.
불침번은 수도 없이 서봤기에 깨우러 오기도 전에 저절로 눈이 떠지는 버릇이 있었다.
‘버나드…… 피곤할테지……’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뒤 외실을 지나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문득 입구밖에서 버나드가 어떤 여자랑 대화를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몸집이 작아졌다고 성욕도 또 미친듯이 날뛰어서 죽겠어.”
“후훗, 버나드. 그럴땐 누나한테 해결해달라고 해야지. 참으면 병난단다?”
클레어는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입구를 가린 천쪽으로 다가갔다.
밤바람에 살랑거리는 천이 넘실거릴때마다 중앙의 갈라진 틈 사이로 밖이 내다보였다.
버나드가 한손에 칼집을 쥐고 서 있었고, 그 옆에 평민 차림의 어떤 여자가 두 무릎을 끌어안고 바닥에 앉아있었다.
눈썰미가 좋아 여자가 누군지 알아채는데 오래걸리지 않았다.
버나드의 연인인 데보라가 분명했다.
경계를 서는 버나드를 보러 잠시 놀러와있는듯 싶었다.
‘혹시 두 사람…… 그런거 안하려나……’
가뜩이나 요즘 버나드를 훔쳐보는 재미에 점점 빠져들고 있는 클레어였다.
그녀는 침을 꼴깍 삼키며 더욱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시시콜콜한 잡담만 오갈뿐 그녀가 기대하는 모습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더욱이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걸 엿듣는 내내 야영지를 지키는 사냥개들이 주변에서 시끄럽게 짖어대는 통에 대화도 뜨문뜨문 들렸다.
“있잖아, 버나드.”
“응.”
“예전에 우리 랜턴 씨랑 처음 만났을때 기억나? 그때 란 씨도 있었고 다 같이 야영했었던 날. 라벤다를 길들이기 전에 말이야.”
“기억나.”
“그때 랜턴 씨가 뭔가를 말하다 대충 얼버무린 이야기가 있었거든. 누나는 신경쓰지 않으려고 해도 버나드 밖에 모르는 바보잖아 헤헤…… 버나드가 어느날 갑자기 떠날까봐 걱정돼서 꼭 물어보고 싶어. 솔직히 대답해줄 수 있어?”
“랜턴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음…… 누나가 궁금해서 묻는거니까 랜턴 씨한테 화내면 안돼. 알았지?”
“뭔데? 무슨 이야기를 들었어?”
“약속해, 랜턴 씨에게 화 안낸다고.”
“알았으니까 어서 말해봐.”
“1차 걷는 사자 전쟁 당시 레아 씨 말고 다른 여자가 버나드랑 어울려 다녔다고…… 왕보다도 신분이 높아보이는 여자가…… 누구야……?”
“아, 그 여자 얘기인가……”
버나드가 피식 웃으며 밤하늘에 떠있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벌써 교대할때가 됐네.”
달이 이전보다 서쪽으로 기운 것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얘기 안해줄거야?”
“황제의 딸. 그리고 지금은 황제가 되었지.”
“세상에……! 정말이야? 그렇게 대단한 분을 알아……?”
“제국은 그 당시 레온왕조의 여동생 이블린과 척을 지고 그 오빠인 프레드릭 왕을 지지했거든. 사내대장부 같은 성격을 가진 황제의 딸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파견나와 있었지. 아무튼 다 옛날 얘기야. 그녀는 나 따위 벌써 잊었을거야. 그러니까 안심해.”
“응……”
데보라가 안도하며 미소를 지었다.
“황제니까 주변에 남자들 많겠지?”
“당연하지. 혼담이 오고가는 상대도 다 왕이나 왕자들뿐이겠지. 아무튼간에 빨리 클레어 깨우러 가야해. 데보라도 어서 가서 자. 피곤하잖아.”
떠나기 싫은듯 데보라가 머뭇거렸다.
“클레어 씨가 오면 바로 잘거니? 잠깐 다른데 가면 안돼?”
“미안. 샤를리나 님을 지켜야 해. 여길 떠날 수 없어.”
“누나도 같이 잘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늘밤은 이걸로 만족하자.”
버나드는 아쉬워하는 데보라에게 다가가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그의 키가 작아 데보라가 그를 안고 고개를 숙여야했다.
그렇게 그녀의 품에 쏙 안긴 채, 버나드는 격렬한 입맞춤도 모자라 데보라의 풍만한 가슴을 잠깐이나마 부드럽게 돌려가며 애무했다.
‘드, 드디어……’
환한 달빛 아래 두 사람의 애정행각을 훔쳐보는 클레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푸른 눈동자가 유달리 빛이났다.
저 두 사람이 뭐라고 사랑을 속삭이는지 개짖는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는 않았으나 육안으로는 확실히 볼 수 있었다.
뚫어지게 엿보던 그녀는 갈증이나 혀로 입술을 적셨다.
‘이상하게 재밌어. 검술을 터득하는 것보다 더……’
클레어는 자신의 가슴이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봐, 또 커졌어.”
“어머머, 진짜네.”
버나드의 아랫도리가 어느새 부풀어 올라 산처럼 텐트를 치고 있었다.
그것을 데보라가 거리낌없이 손으로 잡고 문지르며 호호 웃어댔다.
둘은 잠깐 서로의 몸을 끌어안고 하반신을 강하게 비비다 멈췄다.
“아침에 봐.”
“응, 버나드도 잘자.”
“조심히 가.”
떠나는 데보라를 향해 버나드가 손을 흔드는 동안 클레어의 시선은 그의 아랫도리에 꽂혀 있었다.
볼록 솟은 바지에게서 결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우월함의 상징…… 강자의 힘……’
클레어는 모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코앞에서 사람이 죽어도 놀라지 않을 정도로 차분한 성격을 가진 그녀의 심장이 요란하게 뛰는 일은 정말로 드문일이었다.
두근!
두근!
고동 소리가 들릴 정도로 미쳐 날뛰는 가슴에 손을 얹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언젠가 다시 실물을 영접할 기회가 있을거야 라며 애써 마음을 다잡는 것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심호흡을 통해 조금이나마 마음이 가라앉기는 했지만 버나드를 향한 이유 모를 설레임은 떨쳐버릴 수 없었다.
‘버나드…… 볼수록 매력있어…… 이 기분, 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