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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28 (127/200)



〈 127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28

“만일 여러분의 의견대로  묻은 창으로 뱀의 꼬리를 찌르거나 거대한 칼로 꼬리를 자른다면, 우리는 어쩌면 큰 위험에 봉착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위험이라니 무슨 말이오?”
“뱀의 덩치를 보십시오. 저 정도 크기를 가진 녀석이라면 산 하나를 무너뜨리는 것은 일도 아닐겁니다. 하물며 인공으로 세워진 건축물인 터널은 어떻겠습니까? 꼬리가 잘려 잔뜩 화가난 뱀이 터널안에서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터널이 무너져 내리면 어쩌실겁니까? 우리는 망연자실하게 될 것입니다.”
“그람 안되지. 무너지면 큰일나.”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저마다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블레어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끼어들었다.

“뱀이 화가 나서 몸부림을 칠지 어떻게 안답니까? 겁을 먹고 줄행랑을 칠 가능성도 있잖아요.”
“그러면 블레어 공께서는 뱀이 겁을 집어 먹고 줄행랑을 친다고 단언할  있겠습니까?”
“음.”

버나드가 반문하자 블레어가 잠시 고민했다.

“글쎄요, 일단 꼬리를 잘라봐야 알  같습니다.”
“일단 잘라봐야? 블레어 공은 대책없이 일을 추진하시는 분입니까? 그러다 터널이 막히면 어쩌려고요?”
“한다고는 안했습니다만……”

블레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입술만 달싹이던 그가 말을 돌렸다.

“그래서 버나드 경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말씀해 보십시오.”
“뱀은……”

버나드는 샤를과 눈을 마주친뒤 이어서 멜리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뱀은 무더위속에서도 활동량이 왕성하지만 본성이 서늘한 곳을 좋아하는 생물입니다. 그런 이유로 터널에 들어가 있는 것일테죠. 터널 안은 시원할테니까요.”
“뱀의 피는 차갑다고 세상에 알려져 있는데 서늘한 곳을 좋아한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오래전 어떤 왕은 더위를 피하기 위해 수백마리의 뱀들을 모아 밑에 납작하게 깔고 판자로 덮은뒤 그 위에서 시원하게 여름을 나셨소. 피는 물론이고 피부조차 차가운 뱀이 서늘한 곳에 들어가 뭐하게? 얼어죽을라고? 처음 듣는 소리요. 뱀의 피부를 손으로 만져보긴 해봤소?”

루테니아 가문쪽에서 누군가 핀잔을 주길래 버나드가 가벼이 대꾸했다.

“뱀도 더운걸 싫어합니다. 녀석들이 좋아하는 일정 온도가 있죠. 즉,  말은 너무 추워도 안되지만 너무 더워서도 안된다는 겁니다. 뱀들이 여름잠을 잔다는건 들어보셨는지요? 뱀들은 너무 덥다 싶으면 아예 땅속으로 기어들어가 잠을 자는 경우도 있습니다.”
“겨울이 아니라 여름에?”
“네, 여름에.”
“여름에 잠을 자다니? 호오, 놀라운 정보로군요. 요즘 아킨테 가문은 생태학자들을 후원중인지요? 농사에 쓰시려고 그러나……”

누군가의 말에 샤를이 뭔 개소리냐는듯이 그를 쳐다봤다.
그뒤 버나드를 보며 그의 해박한 지식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저 녀석 별걸 다 아네. 정말 수상한 놈이야.’

좌우간 원탁에 앉은 사람들이 그런 일은 몰랐다는듯 반은 코웃음을 치고 반은 흥미롭게 쳐다봤다.

“어디서 변두리 지식을 주워들은게야?”
“오, 그랬던가!”
“뱀이 여름에도 잔다고? 신기하고만.”
“낭설일걸세 낭설. 저 정도로 큰 뱀이면  산을 지키는 수호신일게 분명해. 잡을 생각 말고 기도나 드리는게 최선이야.”
“버나드 경은 학자입니까?”

 와중에 블레어는 딴지를 걸고 싶었으나 아는게 없어 가만히 듣고 있어야만했다.
심지어 그는 글을 읽을줄도 몰랐다.

“버나드 경은 뱀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어쩌다 운좋게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버나드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제 말은 뱀의 잠자리를 불편하게 만들자는 것입니다. 사람이 잠을 잘때 잠자리가 불편하면 어떤 행동을 할까요? 다들 경험해봤으니 잘 아실겁니다. 계속 뒤척이다가  안되겠다 싶으면 다른곳에서 잠을 청하게 되죠. 그것과 똑같습니다. 뱀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만 적당히 괴롭혀주는겁니다.”
“당신다운 생각이네.”

샤를은 평소 버나드를 얍삽한 인간으로 보고 있었다.
정말로 얍삽한 짓을 해서가 아니라 그냥 미워서 사람이 얍삽하게 보일뿐이었다.

“무슨 치사한 방법을 쓰려고?”
“꼬리 주위에 장작을 모아놓고 불을 지피는 겁니다. 장작불의 뜨거운 열기가 뱀을 덥게 할 것이고, 뱀은 결국 더 좋은 자리를 찾기 위해 조용히 터널 밖을 빠져나갈 것입니다. 간단하지 않습니까?”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누군가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좋아보이는군.”

장작만 구해다 불만 지피면 되니, 뱀을 신처럼 생각해 절대 공격해선 안된다고 반대하던 귀족들도 괜찮은 방법이라 여겼고, 괜히 뱀을 공격했다가 날뛰면 어쩌지 하고 우려했던 귀족들도 그럴듯한 방법이라고 수긍했다.

“실패해도 별 피해는 없을듯하니 지금으로선 가장 좋다 생각되는구만.”
“나무만 잘라오면 되겠어.”

버나드가 샤를과 블레어를 돌아보았다.

“두 분은 제 생각이 어떠십니까?”
“어차피 할거 아냐. 언제 내게 물어봤다고.”

샤를은 시큰둥하게 쏘아붙였고, 블레어는 살짝 뼈있는 말로 대꾸했다.

“숲에 불이라도 났다간 다 죽을  있습니다. 불이 옮겨붙진 않을까요?”
“불을 피울땐 당연히 그 둘레에 구덩이를 파놓습니다. 옮겨 붙을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그렇군요. 크음.”

블레어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버나드의 생각에 동의했다.
이로써 버나드가 제시한 의견이 대다수의 공감을 얻어 압도적인 지지로 받아들여졌고 내일 아침 즉시 실행에 옮기기로 결정되었다.

“자, 이제 즐겨보세!”

다들 복잡한 고민을 접어두고 본격적으로 술을 마셔대기 시작했는데, 멜리사가 버나드의 옆구리를 툭툭 치며 모기만한 소리로 속삭였다.

“좋은 생각이 있었으면 나한테 미리 귀띔을 해줬어야죠!”
“왜요?”
“왜요라뇨, 몰라서 물어요? 미셸님께서 뭐라고 당부하셨죠? 무슨 일이든 저와 경이 힘을 합쳐 일하라고 한걸 잊은 거예요?”
“그쪽이 거부했잖아요.”
“이것보세요. 미셸님의 명령인데 제가 거부한다고 안할건가요?”
“그럼 내가 앞으로 백검대 일에 간섭해도 되는 겁니까?”
“그건……”

멜리사는 지휘권을 쉽게 나눠주긴 싫었다.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고 싶었다.
예를들면 버나드가 머리를 숙이고 들어온다든지.

“그쪽이 내 말을 잘 듣겠다고 맹세하면 생각해볼게요.”
“왜 그래야하죠?”
“난 엄연히 백검대의 대장이니까요. 내 부대예요.”
“정확히는 샤를님의 부대죠. 대장자리는 언제든 바뀔  있고.”
“이봐요, 날 무시하는건가요?”
“무시 안하니까 백검대 일에 간섭 말라는 멜리사 경의 명령에 따르고 있잖습니까.”
“그럼 이 명령도 따르세요! 앞으로 백검대 일에 간섭하되 하나부터 열까지 나와 모든걸 상의해야합니다! 절대 비밀이 있어선 안되요! 그리고 방금처럼 치사하게 혼자만 알고 있다가 뜬금없이 잘난척하지도 마시고요!”
“정말 그래도 되는겁니까?”
“예! 그래도 됩니다!”

멜리사는 답답함이 북받쳐 오르다 못해 발끈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본심을 털어놓고 말았다.

“무슨 일이든 혼자 융통성 없이 일하지 말고 나한테 먼저 알려야한다는 점을 결코 간과해선 안됩니다! 우린 오늘부터 같이 일하는거예요. 앞으로 쭉 함께 다니면서.”

그동안 쌓인게 많았는지 상당히 열을 내며 말하는 그녀를 보며 버나드가 싱글싱글 웃는다.

“그러죠.”
“웃지 말고 진지하게 대답하세요. 난 심각하다고요.”
“모든 일을 당신과 상의한다 맹세하겠습니다.”
“만약 나와 상의없이 혼자서 처리하는 일이 발생하면 어쩔거예요?”
“음……”
“제 부하로 들어온다고 약속하시죠.”
“그건 좀 아닌듯 합니다만.”
“부하가 되는 것 말고는 적당한게 없으니 그러죠. 아니면 노예라도 될래요?”
“부하니 노예니 애들 장난 같은 내기군요.”
“지금 본인 모습이나 쳐다보고 그런 말을 뱉으시죠? 딱 봐도 15살짜리 꼬마 아닌가. 전 지금 누가 봐도 눈앞에 앉아있는 애랑 말다툼하고 있는중이라고요.  큰 어른이.”

애라는 소리에 버나드가 불쾌하다는듯 헛기침을 했다.

“15살이면 꼬마가 아니라 소년입니다.”
“암튼 딴소리 말고 약속 안지키면 제 부하가 되는 거예요. 알겠어요?”
“왜 그런 굴욕적인 일을 당해야하죠? 그냥 내가 가진 값진 물건을 하나주는게 낫겠습니다.”
“부하가 되는게 그렇게 싫어요? 아!”

그녀가 손뼉을 마주쳤다.

“부하 되는게 싫으면 페니스를 자르면 어떨까요?”
“당황스럽군요. 멜리사 경, 취했습니다.”
“안취했어요! 맥주 열잔 정돈 거뜬하다고요!”
“지금  두 잔째입니다.”
“뭐라고요? 안들려요! 딸꾹! 들어봐요! 페니스는 남자한테 중요하잖아요! 그렇죠? 그거면 적당한 보상이 되겠네요! 좋아요 페니스를 자르는걸로 하죠!”

이윽고 연회가 끝나자 샤를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떠나려던 그녀를 블레어가 아쉬운 얼굴로 붙잡았다.

“샤를 님,  숙소에 가서 한잔 더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살아온 이야기도 듣고 싶고, 일찍 끝나서 뭔가  허무합니다. 오래 붙잡지 않겠습니다.”
“저, 그게……”

샤를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감돌았다.
첫만남에서 좋은 인상을 준 블레어의 적극적인 구애가 좋은 것도 아니고 싫은 것도 아닌지라 어떤 대답을 해야 그가 서운해 하지 않을지 그녀를 고민케 만들었다.
게다가 야밤에 남자의 숙소에 가본 경험이 없어 무척 망설여졌다.

‘그래도 될련지.’

늦은밤 자신의 숙소에서 술을 마시자는 블레어의 행동은 분명 남매 사이를 벗어나 과한 측면이 있었다.
순진했던 샤를은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으나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버나드는 그녀가 만약 블레어의 숙소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어림없지.’

버나드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블레어를 만류했다.

“블레어 공, 샤를 님이 많이 피곤해 보이셔서 오늘은 힘들 것 같습니다. 오늘의 아쉬움은 내일로 미루시지요. 그럼 이만. 샤를리나 님, 가시죠.”
“당신이 왠일로 날 챙기는거야?  먹었어?”
“호위기사니까요.”
“거짓말 하지마.”
“일단 갑시다.”
“왜 팔을 붙잡는거야 놔.”
“빨리 따라오세요.”
“갑자기 호위 해주는 척이야. 어이없어.”

팅팅 대지만 그래도 나름  따라온다.
그렇게 버나드는 갑작스러운 친절에 소름끼쳐 하는 샤를을 억지로 끌고가다시피 데려갔다.
그 뒷모습을 씁쓸히 바라보고 있던 블레어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저 작자, 아까부터 은근히 걸리적거린단 말이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지네 주인한테 잘해주고 있건만.”

잠시 후 숙소로 돌아온 블레어는 난데없이 화가 치밀어 오르며 술병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쨍그랑!

“생각할수록 짜증나네! 빌어먹을 자식!”

샤를리나라는 고귀한 가문의 영애.
블레어는 그녀를 처음 만나는 순간 첫눈에 반해버렸다.
실로 아름다운 계집이 아닌가!
다짜고짜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벌컥 들었다.

샤를의 미모와 그녀의 배경, 자신의 반려자로 더없이 훌륭했다.
거지가 샤를처럼 훌륭한 배경을 가진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있을까?

“그런 여자가 매일 아침  침대에 누워있다면 정말로 행복할텐데!”

뜻밖의 행운을 만나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풀려가고 있었건만, 버나드란 작자가 참 눈에 가시다.

“내 가신이었으면 죽이란 명령 한마디면 그만이었을텐데, 제기랄!”

한참동안 씩씩 거리던 그는 낮에 있었던 일을 상기하며 점차 화를 가라앉혔다.

“샤를 님, 혹시 여행이 고되신가요? 외람된 말씀이오나 제 눈에 당신의 힘겨움이 보입니다. 슬퍼하고 계시군요. 그리고 누군가 필요해보여요. 당신의 슬픔을 들어줄 누군가가…… 이 상황이 지속되면 당신은 곧 숨이 끊어질지도 몰라요. 하루하루 제국으로 향할때마다 그와 비례해서 당신의 생명도 줄어들고 있군요. 제 눈에 그게 보입니다. 안되겠어요. 자칭 로맨티시스트로서 새처럼 가녀린 당신을 가만히 놔둘 수 없습니다. 허락해주신다면 제가 무엇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 너무 안타깝기에. 어떤 말씀이든 좋으니 제게 해주십시오. 샤를 님의 심장을 갉아 먹고 있는 못된 고민들을 전부 날리시는 겁니다.”

그의 다정한 마음씨에 샤를은 놀라 당황스러웠지만, 절벽 아래에 떨어지려던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붙잡아 준것만 같은 착각이 들어 그에게 고민을 털어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블레어는 배움이 모자라 귀족을 만나면 할  있는 이야기가 전무했다.
따라서 그가 유일하게 파고들 수 있는 대화 주제라고는 오로지 연애나 고민을 들어주는  전부.
샤를의 미모에 반해 그녀와 대화는 나누고 싶고, 하지만 아는게 없어 입도 잘 벙긋 못하고 그저 샤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뿐인데 그게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블레어 공, 당신은 왠지 귀족답지 않은 느낌이 들어 편해요. 격식을 중요시하지도 않고, 귀족의 위엄을 내세우지도 않고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편안한 느낌입니다. 더구나 저와 친해질 수만 있다면 본인이 개가 되어도 좋다니요. 어떤 귀족이 감히 그런 말을 할  있을까요. 너무 마음에 쏙 들어요.”
“진짜입니다. 샤를 님의 미소를 매일  수만 있다면 개가 되어도 좋아요. 멍멍, 멍멍! 하다못해 절 노예처럼 부려도 신이 날겁니다. 바닥에 먹을걸 던져보세요. 바로 가서 주워먹겠습니다.  하인들이 안보는 곳에서 해주셔야 합니다. 우리 둘만의 비밀이니까요. 멍멍!”
“풉! 그러니까 진짜 개 같아요!”
“더 짖어볼까요? 잘  수 있습니다. 이건 어때요? 왈왈! 왈!”

한편, 샤를을 숙소까지 바래다준 버나드는 오는 내내 팅팅 대던 그녀를 침실에 안내하고 난뒤 밖으로 걸어나왔다.
클레어가 입구에 서있었다.
그녀는 한손에 칼집을 쥐고 있는 버나드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싸우러 가……?”
“아니.”
“칼은 왜.”
“느낌상 뭔가 불길해. 오늘밤부터 샤를리나 님의 곁을 철저히 지킬 생각이다. 너도 숙소로 돌아가지 말고 여기 남아. 샤를리나 님을 지키는건 당분간 너와 나 둘이서 직접 맡는다.”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는 클레어의 시선이 버나드의 바지쪽을 힐끔 거렸다.
그러고는 무언가 기대를 품은 눈빛으로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한 사람은 자고 한 사람은 지키고, 교대로 할거지?”
“그래, 그게 좋겠지. 내일 낮에도 일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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