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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6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27 (126/200)



〈 126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27

“속내를 모르면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시간을 허비해야하니까요.”

샤를과 블레어.
저마다  성격하는 자들이 만났다.
서로 틱틱 부딪히며 불꽃이 튀어야 정상이건만, 어찌된 일인지 긴장따위 하나없고 화기애애하다.
무엇보다 블레어가 아주 샤를에게 잘했다.
허세를 부리며 자랑하거나 자존심을 세우는 일 없이 매우 신사적이고 다정하게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누님도 참, 하하.”

예의 바르고 말 잘듣는 남동생  자체다.
가끔 샤를 앞에서 양볼을 붉히며 수줍어 하기까지 하는데, 정말로 가관이다.

‘레아에게 들었던대로라면 성품이 올바르지 못한 블레어는 샤를리나 님을 저렇게 웃게할 재주가 없을텐데 도대체  광경은 무엇이란 말인가…… 블레어…… 가식인가 아니면 못 본 사이 개과천선한건가. 그의 이목구비는 들은 그대로 틀림이 없거늘.’

짧지만 인상 깊었던 티타임이 끝나고 난뒤 얼마 지나지 않아 클레어가 버나드와 멜리사를 찾아왔다.

“저녁에 루테니아 가문과 잘 협조해서 연회를 준비하시랍니다.”
“연회?”

멜리사가 당황스럽다는듯이 눈을 크게 떴다.

“샤를님께서 연회를 하시겠다고 직접 말씀하셨나요?”
“네.”
“그럴분이 아니신데 왠일이지?”
“왠일이긴요. 그만큼 즐거우셨던거겠죠.”

버나드는 가볍게 대꾸한  클레어를 마주봤다.

“블레어 공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들은게 있어?”
“있어.”

클레어는 차분한 표정으로 나지막이 대답했다.

“혼자 들뜨셔서 블레어 공과 주고 받았던 말들을 전부 이야기 해주셨지.”
“뭘 들었지? 두 분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어?”
“그리 중요치 않은 평범한 대화들.”
“평범한 대화? 그런데 저렇게나 좋아하신다고?
“내가 전부터 버나드에게 바랐던 말. 하지만 버나드는 하지 않았던 말.”

버나드가 고개를 약간 갸웃했다.

“그게 뭔데?”
“외로운 샤를님을 위로해달라는 것. 하지만 버나드는 거절했어. 딱딱한 군신관계의 틀만 강조하며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지 않았지.”

옆에서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멜리사는 ‘이건  뭔소리야’ 하는 표정으로 버나드와 클레어의 대화를 잠자코 구경했다.

“지금 이 상황이랑 관계없잖아.”
“상관있어. 블레어 공은 티타임 내내 홀로 먼 길을 여행해야 하는 샤를 님의 고민을 들어주고 진심으로 위로해줬던 것 같아. 그로인해 샤를님의 닫혔던 마음이 열린게 아닐까.”
“겨우 그것 때문에……?”

이해가 안간다는 얼굴로 말끝을 흐리는 버나드.
클레어가 하소연하듯 말했다.

“왜 샤를님과 대화를 하려 하지 않는거야……”
“신하로서 주군의 뜻에 맡길뿐. 내가할 일은 그저 샤를님을 지키면 될뿐이다.”
“샤를 님은 아직 모든걸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야. 신하의 조언과 도움이 필요해. 위로도. 버나드는 샤를 님을 전지전능한 신처럼 생각하나봐……”
“그건 아니야.”
“아니면 왜.”
“넌 몰라도 돼.”

버나드는 깊은 유대감을 맺고 싶지 않을뿐이다.
서로 정이 쌓이면 서로 필요해지게 된다.
즉, 서로 떨어질 수 없게 된다는 말.
언제든 홀가분하게 떠날  있도록 준비를 해둘뿐이다.

“저러다  귀찮아지는거 아닌가요?”

멜리사가 끼어들었다.

“블레어 공과 계속 엮이면 그건 그것대로 또 피곤한 일이잖아요? 만약 두 분이 의기투합해서 앞으로의 여정을 함께하겠다 선언하면 어떡해요? 버나드 경에 이어 루테니아 가문의 기사까지 내 지휘권을 침범하는건 좀 별로네요.”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됩니다.”
“어찌 그리 자신하죠?”
“그야 기분이 들쭉날쭉하는 샤를리나 님이니까요.”


***

밤이 되어 깎아지른듯한 암벽을 배경으로 널따란 공터에서 연회가 열렸다.
오랜만에 그동안 데리고만 다니던 양과 돼지를 잡았다.
열군데에 설치된 장작불 위에서 고기가 노릇노릇하게 구워졌다.
술도 풍족했다.
양가문 사람들은 한데 어울려 술을 마시며 걱정없이 웃고 떠들어댔다.

언제 괴물이 나타날지도 모를 산속이었으나 양가문의 사람 수가 그러한 두려움을 말끔히 씻겨주었다.
양가문 합쳐서 사백여명.
사람들은 숫자를 믿고 더욱 흥청망청 마셔댔다.

횃불이 가장 밝게 비추고 있는 장소에는 양가문의 주요인사들이 참석해 원탁에 빙 둘러앉아있었다.
상석에서 블레어와 나란히 앉아있는 샤를의 옆자리에 멜리사가 앉아있었고 그녀의 옆에 버나드가 앉아있었다.

푸짐한 음식이 가득한 술자리의 주된 화제는 붉은뱀의 처리 방법이었다.
취기가 오른 양가문의 가신들이 번갈아 가며 자신의 견해를 자랑하듯이 떠들어댔다.

“스무자루의 창을 준비해서 창날에 독을 발라 꼬리를 찌릅시다. 녀석이 아무리 크다해도 독에는 꼼짝도 못할걸요?”
“터널 안에서 죽어버리면 시체는 누가치우고?”
“우리가 치워야지 별 수 있나?”
“장정 여럿이 달려든다해도 시체가 무거워서 빼내지도 못할걸.”
“살점을 삽으로 파가면서 나아가면 되지.”
“살점을 삽으로 파서 언제 치우게? 터널 길이만 장장 사오백미터쯤 된다고. 저런, 저런 쯧쯧.”
“그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거인의 목을 자를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단두대를 만들어서 녀석의 꼬리를 싹둑 잘라버리는겁니다! 그럼 녀석이 앗, 따거! 하면서 밖으로 내뺄줄 또 압니까?”
“하하하!”
“저 사람 웃기려고 저러는거지? 귀족이 상스럽게 앗 따거가 뭐야! 루테니아 사람이 유머감각이 있어! 아하하!”

사람들이 술을 마셔가며 열심히 토론을 하는동안, 진중하게 경청해야할 블레어는 붉은뱀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듯 샤를을 향한 구애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적어도 버나드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오늘밤 같이 달을 보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누나란 존재가 없었는데 갑자기 생기니 반갑기도 하고…… 일찍 잠들기가 무척 아쉽습니다.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음, 저, 저기. 음. 그, 그게……”

샤를은 입술을 달싹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블레어의 호의가 고마우면서도 부담스러운게 틀림없었다.
평소 같으면 단칼에 싫다고 거절했을텐데, 대체 어떤 위로를 받은 것인지 그녀가 주저하는걸 보니, 낮의 티타임에서 받은 블레어의 위로가 그녀에게 큰 힘이 되어준 것만은 분명했다.
그만큼 그녀는 누군가의 관심에 굶주려 있었던 것이다.
보다 못한 버나드가 나섰다.

“블레어 공, 죄송합니다. 샤를리나 님께서는 내일 일정을 위해 일찍 잠드셔야합니다.”

샤를과 블레어, 그리고 멜리사의 시선이 일제히 버나드에게 향했다.
블레어가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오크를 두려워하지 않는 기사 버나드 경이라고 했던가요?”
“마스터 버나드 경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좋습니다, 마스터 버나드 경. 내 또래로 보이는데 벌써 기사 작위도 모자라 영주의 참모를 뜻하는 마스터라는 직함까지 달다니 대단하십니다. 아킨테의 미셸 님의 총애를 받고 계시나보군요.”
“1차 걷는 사자 전쟁이 한창이던 250년이었죠.”

버나드가 불쑥 화제를 전환했다.

“저희 부친께서 전투에 참전하느라 루테니아 영지에 계셨었습니다.”

실제로는 버나드 본인이 그곳에 있었다.

“당시, 현 루테니아 가문의 당주님이신 발드렛 님과 친분을 쌓았다고 들었습니다. 발드렛 님은 별고 없이 잘 지내시는지요. 건강하십니까?”
“아……”

블레어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피한다.

“뭐, 뭐. 무탈하십니다. 크흠!”

짧게 대답하고는 술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버나드는 술을 마시는 그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쪽 부모의 안부를 물어봤으면 밝게 화답하며 이쪽 부모의 안부도 물어볼법 하건만 구체적인 대화를 피하려 일부러 얼버무리는 느낌이랄까.

곧이어 두 번째 질문을 던지려던 차였다.
샤를이 끼어들었다.

“뜬금없이 재미없는 옛날 얘기는  꺼내는 건가요 버나드 경?”

그녀가 타박하며 쳐다봤다.

“잠자코 술이나 마시세요. 여긴 나와 블레어 공을 위한 자리입니다. 당신에게 발언 기회를 준  없어요.”

일부러 그런다.
블레어를 두둔하려기 보다 그냥 버나드를 괴롭히고 싶은 마음에 이때다 하고 끼어든게 분명했다.
그녀의 짓궂은 마음을 버나드가 모를리 없었다.
순순히 받아주기엔 눈앞의 블레어가 성가셨다.

버나드는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주는 블레어의 정체를 집요하게 캐고 싶었다.
그럴려면 여기서 입막음을 당해선 안됐다.

“잊으신겁니까? 샤를 님은 절 통제할 권한이 없습니다. 오직 미셸님의 명령만 따르니까요. 따라서  마음대로 입을 열겠습니다.”
“윽, 이 건방진 사람 같으니……!”

샤를이 곧바로 발끈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독기 가득한 눈으로 버나드를 한참이나 쏘아보는 와중에, 그때까지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클레어가 다가와 귓속말을 건네자 그제야 간신히 화를 가라앉히며 제자리에 앉았다.
짜증섞인 한숨을 내쉬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그녀의 정수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같았다.

“샤를님이 경한테 설득 당해서 블레어 공과 만났다는게 안믿겨지는데요?”

옆자리에 앉은 멜리사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묻자 버나드가 미소지었다.

“원래 절 좋아했다가 싫어했다가를 반복하시는 분입니다.”
“이해가 안되는군요. 그런 관계가 어딨어요?”
“멜리사 경도 그러잖아요.”
“제가요?”

멜리사가 천만의 말씀이라는듯 콧방귀를 꼈다.

“그런적 없어요.”

조금 전 샤를의 돌발행동으로 인해 술자리 분위기가 경직되어 있던 상태였다.
블레어가 침묵을 깨고 불쑥 버나드에게 물었다.

“버나드 경, 혹시 붉은뱀을 어찌 처리하면 좋을지 좋은 생각이 있으십니까?”

곧이곧대로 듣기에는 뭐랄까, 뭔가 의도가 역력한 질문이다.
엉뚱한 대답을 하면 실컷 비웃기라도 할 생각일까?
그도 그럴것이 블레어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벌써부터 비웃음을 머금고 있는듯했다.
마치 샤를을 유혹하던 자신의 작업을 방해한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었느냐? 하듯이.
무슨 말을 하든 말도 안된다고 깎아내리며 적당히 골탕을 먹일 속셈인 것 같았다.

‘은근 사악해보이는 저 표정을 보면 내가 들었던 블레어가 맞는  같기도 하군.’

모두의 시선이 버나드에게 향했다.
샤를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지만 그 눈빛에 살짝 기대감이 엿보였다.

“쉬운 일입니다.”

버나드의 입술은 일말의 머뭇거림없이 움직였다.

“뱀을 치우는건 고민할 것도 없이 아주 간단한 일이죠.”

그 말에 식탁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더욱 귀를 기울이며 눈을 휘둥그레떴다.

“쉽다고?”
“그럴리가.”
“무슨 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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