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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5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26 (125/200)



〈 125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26

루테니아 가문측도 마냥 넋놓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쪽에서 먼저 사람을 보내왔다.

“우리 블레어 공께서 같은 혈육이신 샤를리나님을 뵙고 싶어하십니다. 짧은 만남이라도 좋으니 부디 만남에 응해주셨으면 한다고 전해주십시오.”

멜리사는 버나드를 돌아봤다.

“당연히 만나주는게 도리겠죠?”
“제게 묻는군요.”
“묻는게 뭐 잘못되었나요?”
“아뇨, 처음이라서.”
“그럼 다음부터 물어보지 말까요?”
“제게 화를 내시는군요.”
“제가요? 제가 언제 화를 냈다는거죠?”
“멜리사 경의 표정에 드러나고 있어서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지금 저와 싸우자는건가요? 루테니아 가문의 사신이 지켜보는 앞에서 저랑 언성 한번 높여볼까요?”
“진정하십시오. 별뜻 없었습니다.”
“화가 안난 사람보고 화가 났다고 하니까 황당해서 그러죠.”
“……”

버나드는 더 이상 발언을 하지 않으며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말투가 날이 서있는게 분명하건만, 왜 날이 선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보이는대로 아무 생각없이 말했을뿐인데 그냥 넘어가면 될것을 말끝마다 예민하게 반응하는 느낌이었다.

“이 상황에선 만나는게 맞습니다. 거절로 불필요한 오해를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알고 있어요.”

멜리사는 퉁명스럽게 대답한뒤 루테니아 가문의 사신을 쳐다봤다.

“알겠습니다. 샤를리나님께 보고 하도록 하죠. 우리  상의해서 양가문의 화기애애한 자리를 만들어봅시다.”


***

언덕 아래, 맞은편에 자리잡은 산의 산비탈을 뚫고 지은 터널이 내려다 보였다.
터널 밖으로 삐져나온 붉고 거대한 뱀의 꼬리가 눈에 띄었다.

터널 입구 앞의 공터 한켠에선 루테니아 가문 소속으로 보이는 여자들이 죽은 산짐승을 평평한 돌위에 올려놓고 열심히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붉은뱀을 신이라 생각한 것인지 기도를 올리면 얌전히 떠날줄 아나보다.

그로부터 멀지 않은 숲속에 자리잡은 루테니아 가문의 진영.
그 안에서 생활하는 자들이 얼핏 이백명은 되어보였다.
그리고 진을 치고 머무른지가 하루이틀은 아닌듯 모든 짐을 풀어놓고 제대로 진을 치고 있다. 야외취사장이며 짐승우리까지 완벽히 지어져 있었다.

그런 가운데 샤를과 블레어는 아킨테 가문과 루테니아 가문, 양측 진영이 잘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만났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블레어는 예의 바른 이미지를 가진 준수한 외모의 소년이었다.
현 265년, 샤를이 249년 출생이라면 블레어는 250년 출생으로 샤를보다 한살 아래였다.

“왕국에서 소문이 자자한 아킨테 가문의 샤를리나님을 만나뵙게되어 실로 영광입니다.”

블레어는 가슴에 손을 얹고 허리를 깎듯이 굽히며 숙녀를 향해 정중히 예를 표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아름답게 차려입은 샤를은 흥미없다는 투로 쌀쌀맞게 말을 내뱉었다.

“잘 아시네요. 나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근데 왜 만나자고 한거죠?”

여행 시작부터 지금까지 뚱해 있는 그녀는 될대로되라지 하는 심정으로 건성건성 대화를 이어나갔다.

“서로 처음보는데 딱히 할말이 있나요?”
“예……? 마, 맞는 말씀이긴 합니다만……”

블레어는 잠깐 당황했다가 이내 사람 좋게 웃어보였다.

“예, 말씀드릴게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커다란 뱀이 터널에 들어차있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킨테 가문 역시 저희와 사정이 마찬가지일테니 양가문이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의논해보지 않겠습니까?”
“그러시든지요. 피곤한 일이 생겼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저 뱀 때문에 저희도 일정이 많이 늦어졌습니다.”
“여기 언제 오셨는데요?”
“이곳에 도착한지 일주일됐습니다.”
“지루하셨겠네요.”
“지루했지만 덕분에 아리따운 숙녀분을 뵙게 되는 영광을 얻었으니 그리 나쁘진 않아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게 잠시 시간을 내주시지 않겠습니까? 샤를리나 님과 차 한잔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싶습니다. 부디 이 못난 동생이 더 큰 영광을 누릴 수 있게 온정을 베풀어 주십시오. 레이디.”

블레어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매우 정중히 요청하자 샤를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희미하게 그려졌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깍듯한 대접이었다.

“음…… 바쁘지만 할 수 없죠. 그렇게까지 바란다면야. 특별히 시간을 내어 나와 대화할 수 있는 영광을 드리겠습니다.”

루테니아 가문쪽에서 즉시 사람들이 나서서 전망이 트인 초록 언덕 위에 탁자와 의자를 준비했다.
잠시 후 샤를은 블레어와 마주보고 앉아서 차를 마셨다.
여행담 같은 평범한 대화들이 오갔다.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버나드는 자기도 모르게 심각한 표정을 지은채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내가 알던 블레어가 아니야. 무척 거만하고 사람들을 함부로 대한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들은 것과 다를까…… 그의 얼굴을 본적이 없는게 안타깝군.”

버나드는 왕의 자식들의 외모와 신상정보를 줄줄이 꿰고 있었으나 유일하게 블레어의 얼굴만 몰랐다.
다른 왕의 자식들과 달리 직접 가서 살펴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우연일뿐이었는데, 블레어에게 관심갖고 그를 관찰할 당시 버나드는 다른 일정으로 상당히 바빴다.
그리하여 직접 가지 못하고 대신 레아를 보냈다.
수일이 지나 루테니아 가문을 살펴보고온 레아가 와서 보고했다.

“블레어 공을 간단히 표현하자면 ‘버릇없는 꼬마’가 어울리겠네요.”
“철이 없나보군.”
“보통 철이 없는게 아니더군요. 안하무인에다가 험한 말로 시종들에게 상처를 주는데, 몰래 관찰하던 제가 다 듣기 힘들 정도였어요. 심지어 아무런 잘못도 없는 하녀를 발가벗겨 사람들이 많은 시장통을 하루종일 걷게 시키더군요. 부끄러워하는 하녀의 모습과 그걸 구경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재밌다면서요.”
“변태스런 성격도 있고.”
“조금만 잘못해도 손찌검을 하더군요. 어린 아이가 그렇게 버릇없는건 처음 봤어요.”
“폭력적이고.”
“왠지 왕인 제 아버지를  빼닮은 느낌이랄까.”
“레아.”
“알아요, 무슨 말할지. 왕을 모욕하지 말라고요?”
“우리는 전하를 섬기는 자들이다. 다시는 불충한 소리를 입에 담지마.”
“전…… 인간이 아닌걸요. 제가 따르는 인간은 오직 단장님뿐이지 인간의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적은 없어요. 전, 인간의 지배를 받지않는 엘프라고요.”

늘 왕만을 첫번째로 생각하는 버나드를 향해 조금 서운해하는 레아의 얼굴.
왕보다 자신을 더 특별히 아껴줬으면 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잠시 옛생각에 잠겼던 버나드는 순간 과거 어리석었던 자신을 향한 분노가 치밀어오르며 주먹으로 나무 기둥을 쳤다.
팍!

“제길!”
“왜 그래요?”

옆에 있던 멜리사가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갑자기  나무를 쳐요?”
“프레드릭왕은 분명 제국에다 수작질을 부렸을겁니다! 우린 그걸 철저히 대비해야해요!  놈의 성향을 잘 압니다!”
“예……? 말이 빨라서 제대로 못들었어요. 뭐라고 한거예요? 프레드릭 전하가 어쨌다고요? 다시 말해줘요.”

멜리사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듯 멀뚱히 쳐다보자 버나드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백검대한테 아직 말할 단계가 아니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픈 손등을 어루만지며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혔다.
시치미를 떼며 말을 돌렸다.

“한심했던 옛시절이 생각이 나서요.”
“아하, 부끄러운 과거가 떠올랐나요? 누구나 그런 경험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죠. 저도 잠 안올때마다 부끄러운 생각들이 자주 떠오르는데 그때마다 이불차고 그래요.”
“경이 생각하는 것과 질이 다릅니다. 똑같이 생각하지 마세요.”

버나드가 차갑게 쏘아붙이자 멜리사가 살짝 인상을 구겼다.

“일부러 친근하게 대화 좀 나누려 했더니 사람이 인간미가 없네요.”
“눈앞에 닥친 문제나 의논하죠.”
“시끄러우니 입 닥치라고요?”
“경이 말한 표현은 좀 거칠지만  뜻과 일치한다는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잡담 그만하고 숙제나 풉시다. 터널을 막은 뱀과 블레어 공을 어찌 처리할지.”
“참나.”

멜리사가 황당해하면서 일부러 들으란듯이 중얼거렸다.

“진짜 밉다.”

그녀는  곳에 있는 샤를을 바라보는 버나드의 옆모습을 못마땅한 눈빛으로 훑어내리다 입을 열었다.

“샤를님은 어떻게 설득한거죠? 이런 자리를 극히 싫어하시잖아요.”

조금전 루테니아 가문측으로부터 만나자는 요청이 왔을때, 멜리사가 샤를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자 샤를은 처음에 화를내며 거절했다.
그뒤 멜리사에 이어 버나드가 찾아가서 설득했고, 샤를은 결국 만남에 응하며 지금 이 자리가 만들어졌다.

“계속 설득하니 받아주시더군요.”
“그게 다예요? 뭐 다른 얘기한건 아니고요?”
“예.”
“거짓말.”
“샤를리나 님도 장차 아킨테를 이끌 영주로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지 본분을 잊지 않고 계시는 겁니다. 자신이 나서야할땐 나서줘야한단 생각이 있는거죠. 싫어도 하는 수 없이.”
“뻔한 얘기 말고요. 대체 무슨 꼼수를 부린거예요? 얼마전 콜먼 왕자 일도 있고 이복형제자매들과 만나는걸 완강히 거절할줄 알았는데.”
“이번엔 콜먼 왕자때와 다른가보군요.”
“뭐가요?”
“저길 보십시오. 웃고 계시네요.”
“네?”

멜리사의 시선이 샤를과 블레어가 앉아있는 야외탁자로 향했다.
놀랍게도, 블레어와 대화를 주고받는 샤를의 입가에 밝은 미소가 그려져있었다.
그녀의 어머니인 미셸이 떠난 후 처음으로 보여주는 즐거운 모습이었다.

“블레어 공과 무슨 대화를 나누시는거지……?”
“높으신 분들끼리 대화가 잘 통하는가보죠.”
“콜먼 왕자때와는 달라서 신기하네요. 그땐 샤를님이 저러지 않으셨는데…… 문제를 악화시켰죠.”
“그래서  골치 아프군요.”
“……?”

멜리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버나드를 쳐다봤다.
버나드는 블레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어떤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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