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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3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24 (123/200)



〈 123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24

그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왜 볼때마다 작아지는거죠? 마녀의 저주는 지난번에 풀렸다고 하지 않았나요?”
“부족한가 봅니다.”
“뭐가요?”
“저주를 완전히 풀만한 힘이.”
“어떻게 풀어야 하는건데요?”

버나드는 그녀의 질문을 무시하고 때마침 율리아가 가져온 찻잔을 들고 마셨다.

“근처에서 캔 약재를 우려냈는데 맛이 어떠세요……?”
“쓰군.”
“쓴만큼 몸에 좋아요. 제 고향 사람들이 늘 즐겨마시는 차예요.”
“왜 대답이 없어요?”

율리아와 대화를 나누던 버나드가 멜리사를 돌아보았다.

“그걸 왜 말해야하죠?”

그의 반문에 멜리사는 말문이  막혔다. 내심 어이없다고 생각하면서 입밖으로는 어버버거렸다.

“아, 알면 안되나요? 가, 같은편인데 알아야죠. 별로 어려운 대답도 아니고.”
“마음에도 없는 말이잖습니까. 내가 관여하면 싫어하면서.”
“내가요?”
“같은편이라면서  의견은 묵살하잖습니까.”
“그럴리가요?”
“안그랬다는겁니까?”

그때 멜리사의 눈이 커지며 입가에 절로 환한 미소가 그려졌다.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렇잖아도 버나드를 부대 일에 끌어들이고 싶던차에 자신이 제안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아쉽다는듯이 말해줘서 기뻤다.

‘지금이야! 시큰둥한척 슬쩍 권유해야지!’

멜리사는 옆머리를 귀뒤로 쓸어넘기며 무심한척 말했다.

“그럼 의견이 받아질때까지 계속 주장해야죠. 안되면 말고식이면 누가 받아주겠나요? 뭔데요, 얘기해봐요.”
“됐습니다. 개인적으로 해야할 일이 많아서 말이죠. 부대 운영은 전부 멜리사 경에게 맡기겠습니다. 지금 그대로가 좋아요. 잘하고 계십니다.”
“예?”

기대와 다른 대답이 흘러나오자 멜리사는 실망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을 하는거예요?”
“버나드~”

데보라가 불쑥 끼어들더니 뒤에서 버나드의 몸을 감싸안고 그의 정수리에 행복한듯 뺨을 비벼댔다.
현재 버나드는 데보라보다 작아 그녀의 품안에 쏙 들어왔다.

“누나랑 산책 하러가자.”
“산책? 갑자기?”
“요즘 우리 같이 지내는 시간이 너무 없잖니. 누나는 슬프단다?”

버나드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가자. 바쁘지만 나중에 하지 뭐. 데보라의 부탁이니까.”
“와아, 기뻐! 누나는 으슥한곳이 좋더라.”
“음, 주변에 으슥한 장소가 있으려나.”

두 사람은 정답게 팔짱을 끼고 자리를 떠났다.

“뭐야…… 사람이 얘기하는데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멜리사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멀어져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중이었다.

“근데 저 여자 말은  잘 듣지? 나한테는 쌀쌀맞게 굴면서. 여자한테 다정하게 굴 사람은 아닌  같은데.”
“저 늑대 새끼가 유일하게 따르는 사람은 데보라뿐이지.”

멜라니아가 한손에 담뱃대를 쥐고 텐트 밖으로 나왔다.

“데보라의 말만 잘 듣는다.”
“저 여자가 그의 연인이라서요?”

멜라니아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늑대는 애정에 집착하지 않아. 그저 과거에 애착을 가질뿐. 데보라가 없었으면 지금 저 녀석도 없다.”

***

“그”와 처음만났을때, 그는 왕자고 “나”는 거지였다.

빈민가에서 태어난 내가 빛처럼 눈부신 그와 만나게 된 것은 하늘이 내려주신 기회였다.
나는 더러운 골목안에서 그날도 굶주리고 있었다.
누더기를 걸치고 누워있는 나를 향해 누군가 다가왔다.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흡족하게 웃었다.

“흐음, 정말로 닮았군. 신기해.”

사내는 히죽 웃더니 아무말도 없이 발길을 돌렸다.
그때까지만해도 그냥 거지한테 관심많은 행인인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다음날, 갑옷 차림의 기사들이 길가에서 구걸중이던 나를 찾아왔다.

“우리와 같이 갈 곳이 있다. 따라와라.”

겁에 질린 나는 순순히 그들의 지시에 따라야했다.
두 눈을 가린  그들의 말을 타고 어디론가 끌려갔고, 이윽고 도착한 장소에서 눈을 가렸던 천을 풀자 나는 이때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뻔했다.

화려한 귀족옷을 입고 있는 소년이 뒷짐진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안은 값비싼 고풍스러운 가구들로 꾸며져 있었고, 늠름한 기사들이 그의 좌우에 서있었다.
거기까진 그리 놀랄일도 아니었다.

“마, 맙소사! 어떻게 이런 일이……!”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경악했던건, 그의 이목구비는 누가봐도 나였다.
쌍둥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완벽하게 똑같이 생긴 나였다.

“다, 당신은 누구세요……?”
“나? 나로 말할  같으면.”

소년은 양팔을 좌우로 크게 펼치며 자랑스럽게 외쳤다.

“너 같은 상거지 따위가 평생 뵙기도 어려운  나라의 왕자님이시다! 그리고 미래에는 왕이될 위대하신 분이지!”

세상의 눈치를 보며 내성적인 나와 다르게 첫인상부터 오만해 보이는 그는 정말로 왕자였다.
궁에서 사는 왕자는 아니지만 프레드릭왕의 피를 물려받은 아들로서, 친모의 영지에서 지내고 있는 왕자였다.

“잘 들어  거지 자식아, 우린 네가 필요해.”

그가 나를 부른 이유는 하나였다.

“난 부친인 전하의 명에 따라 제국의 수도로 가야한다. 이복형제자매들과 싸워서 이기면 왕좌에 오를  있지.”

내게 설명해주는 그의 두 눈빛에 야욕이 펄펄 들끓어올랐다.

“난 반드시 왕좌를 차지하고 말거야. 그러기 위해선 네놈이 잘해줘야한다. 내 이복형제자매들이 날 죽일 생각에 암살자를 보낼 수 있으니 앞으로 공개된 자리에는  대신 네가 나가도록 해. 철저히  흉내를 내야한다. 알겠어?”

나를 자신의 대역으로 내세울 속셈이었다.
이른바 칼받이.

“예, 옛!”
“네가 얼마나 완벽히 내 행세를 해주느냐에 따라서 이번 왕위 계승 전쟁의 승패가 좌우된다. 똑바로해. 실수하면 패버릴테니까.”
“마, 맡겨주십시오!”

나는 두려웠지만 그의 제안을 덥썩 받아들였다.
사실 선택권이 없었으나 그럼에도 좋았다.
왕자의 대역을 하기로  그날부터 좋은 옷을 입고, 좋은 방에서 자고, 맛있고 고급스런 음식들을 잔뜩 맛볼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대역의 삶이라……
무서웠지만 설마 죽기야 하겠어.
가난한 생활을 견디는 것보다 훨씬 쉽다고 느껴졌다.
그만큼 예전 빈곤했던 삶으로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얼마 후 시종으로 변장한 왕자와 함께 제국으로 길을 떠났다.
함께 동행하는 으리으리한 마차만 해도 열대.
나를 경호하는 듬직한 기사들까지.
남녀 하인들도 무려 수십명.
내 뒤를 줄지어 따라오는 아랫사람들의 행진 모습을 보고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대역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내 인생이 폈어. 흉내를 잘내면 이 일이 끝난뒤에도  잘 돌봐주실거야.”

하지만 대역의 삶도 생각처럼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잘곳은 편했으나 심신이 점차 힘들어졌다.
왕자가 문제였다.
왕자는 매일 내 실수를 트집잡으며 수시로 폭력을 행사했다.

“거기서 영애한테 뭔 개소리를 하는거야! 나는 그런말 안해! 그건 내가 아니라고! 그년보다 돈이 더 많다고 자랑했어야지!”

내가 연회장에서 여자 귀족들과 나누는 대화를 일일이 엿듣고 나서 나중에 크게 화를 낸다든지, 아울러 사람들 앞에서 내가 하는 몸짓, 손짓, 발언 같은 것들을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었다.

“날 호구로 만들었어! 네놈이 사람들 앞에서 지껄인 소리 때문에 내가 호구가 됐다고! 그리고 없어 보이게 평민들이나 먹는 음식은 왜 처먹어!”

왕자의 질책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나를 꾸짖는걸 즐기는 것 같았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와서,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괴롭히고 웃기까지했다.

“휴,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군.”

그러던 어느날, 멍든 부위를 어루만지던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내가 왜 저놈의 대역을 해야하지?
내가 왜 저놈한테 맞고 살아야하지?
나랑 똑같이 생긴놈인데?
저놈이 나고, 내가 저놈인데?

‘둘  하나가 사라져도 세상은 모르는거 아닌가?’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고, 행동도 쉬웠다.
그날 저녁, 나를 트집잡기 위해 으레 행차하신 왕자를 구석에 몰아넣고 낮에 몰래 숨겨둔  돌로 그의 머리통을 부숴버렸다.
큰 돌로 수차례 머리를 내려찍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날카로운 도구로 눈을 찌르자 금세 죽어버렸다.

“꺼억……”
“주, 죽었나……?”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막사안이 소란스럽자 기사 한 명이 밖에서 물었다.

“크, 큰일났다!”

나는 서둘러 왕자와 옷을 바꿔 입고 진짜 왕자인척 행세를 했다.
잠시 후 기사들이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왕자님! 어? 저건 어찌된 일입니까?”
“벌써 죽이신겁니까?”

기사들은 구석에 드러누워있는 왕자의 시체를 보고 분노하기는 커녕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것이 왕자가 평소 입고다니던 시종 옷은 내가 입고 있었고, 왕자는 내가 입던 화려한 옷을 입은 채 죽어있었다.
게다가 늘  맞고 당하던 것은 나였으니 저기 죽어있는게 나일거라고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 같다.
나는 저린 손목을 돌리며 최대한 담담한척 태연하게 대꾸했다.

“일을 너무 못해서 죽여버렸다. 앞으로 대역따윈 필요없어. 내가 직접 움직이마.”
“옙.”

기사들은 아무런 의심없이 멍청하게 속아넘어갔다.
나는 속으로 그들을 비웃었고, 왕자를 죽이고 비로소 진짜 왕자가 되자 더 큰 것을 욕심내게 되었다.
비천한 내게도 권력욕과 야망이 숨쉬고 있었을 줄이야.
그때부터 내 눈에 독기가 서렸다.

“기왕 이렇게 된 마당에 걷는 사자 전쟁ㅡ, 내가 꼭 이겨서 왕이 되어주마.”

프레드릭왕의 씨앗들인 왕자의 이복형제자매들을  쓸어버린 후 나의 씨앗으로 새로운 왕조를 세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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