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22
패권국이 되기 위해서는 주변 속국들보다 절대우위의 군사력 보유가 선결조건이다.
하지만 단순히 군사력만 강해서는 안된다.
주변 속국의 정세 변화에 즉시 대응할줄 아는 신속함이 뒷받침 되어야했다.
그럴려면 빠른 이동 수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세상은 넓고, 사람은 오래 뛰거나 걷지 못한다.
또 일반 왕국의 규모를 훨씬 뛰어넘는 광활한 영토를 말로 달리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일찍이 아케르니아 제국은 광대한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속국들의 특별한 이동수단을 거세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하늘을 날 수 있는 이동 수단인 그리폰과 히포그리프의 사육을 금지시킨 일이었다.
숙국의 영토에 자연스레 서식지가 생기는 것까지 막으며 관리를 철저히 했다.
그로인해 속국들은 빠른 이동수단을 잃게된 반면에 제국은 사자의 등에 날개를 단 격이 되었다.
그 말인 즉슨 영토가 제 아무리 넓다한들, 주변 정세 변화에 빠르고 신속한 대응이 가능해졌다는 이야기였다.
현재 레온 왕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제 2차 걷는 사자 전쟁’은 아케르니아 제국 입장에선 상당히 불편한 사건이었다.
속국 왕의 자식들이 뜬금없이 유물을 반환 받으러 온다는데 그 어느 정복자가 좋아하랴.
더구나 제국과 전혀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벌어진 괘씸한 일.
첩보를 통해 소식을 접한 아케르니아 제국은 즉시 사신을 파견했다.
“저기 도시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옆에서 나란히 날고 있던 요한나가 먼 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저곳이 아이다썬인가요?”
그리폰 위에 타고 있던 그녀의 아버지 크레치만은 초록 들판을 고요히 흐르는 강 너머에 세워진 도시를 바라보았다.
아직은 작게 보여 왕도가 맞는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도시 한가운데 높이 세워진 성이 멀리서도 유독 눈에 띄었다.
화려하고 웅장해보이는 건축물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듯했다.
“요한나, 성에 들어가거든 눈에 띄는 행동은 삼가거라.”
그는 딸에게 주의를 주었다.
“프레드릭왕은 다혈질에 호전적인 성격으로 알려져 있단다. 그리고 여색을 밝히기로 유명하지. 그의 사생아만 해도 무려 스무명이 넘는단다. 절대 그를 똑바로 마주보지 말거라. 눈을 마주치면 네게 말을 걸어올지도 모르니 조심해.”
“제게 관심을 보이면 좋은거 아닌가요? 왕과 잘돼서 이 땅의 왕비가 된다고 생각해봐요. 그럼 아버지도 좋잖아요?”
십대 철부지 딸에게는 타국 여행이 그저 낭만으로만 보이는 모양이다.
크레치만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린 저들에게 불편한 말을 하러 왔다. 대접이 좋지 못할게야. 항상 긴장하고 환상은 접어두거라. 널 가르치려고 데려온거지 놀러온게 아니야.”
“알아요. 어려운 외교협상의 과정을 잘 지켜보라고 데려오신거.”
“오늘의 경험이 장차 외교관이 되고 싶은 네게 도움이 될게다. 이 아비가 풀어나가는 과정을 잘 지켜보거라. 순조롭게 풀리면 좋겠지만, 실패해도 실패한대로 네게 경험과 교훈이 되리라 생각한다.”
요한나는 밝게 웃으며 자신있게 말했다.
“아버지는 분명 잘 해내실거예요. 우리 제국 최고의 유능한 외교관이시니까요. 만약 프레드릭왕이 아버지를 곤란하게 하면 제가 즉시 달려가서 그의 엉덩이를 걷어차줄게요. ‘소국 주제에 어디서 감히 대국한테 까불어! 대국의 말을 들으란 말이야!’ 하면서.”
아이다썬 상공에 진입하자 병사 한명이 가장 높은 망루로 올라와 깃발을 크게 휘두르며 서쪽 착륙장으로 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윽고 크레치만 일행이 내성의 서쪽 착륙장에 착지하자 갑옷 차림의 기사 여섯명이 종자들과 함께 우르르 몰려왔다.
선두에 선 자는 키가 크고 체격이 건장한 노인이었다.
백발에 일흔은 넘어보이건만 젊은이들처럼 눈빛에 생기가 넘쳐났다.
크레치만은 바로 그를 알아보았다.
“오랜만입니다, 사이먼님. 거의 이십년만인데도 변함없이 젊으시군요.”
“함께 전장을 누비던 때가 그립군. 건강해서 다행일세. 음? 자네 옆에 서 있는 작고 아리따운 숙녀분은 누구신가?”
“제 딸 요한나입니다.”
“오오, 그런가.”
사이먼은 짐짓 예를 갖추며 요한나의 손등에 가벼운 입맞춤을 건넸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저 역시 영광입니다.”
“먼 길을 오신 숙녀분을 오래 세워둘수야 없죠. 얼른 쉴 곳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자네도 날 따라오게나. 서두르지.”
열명의 일행과 함께 사이먼의 뒤를 따라가면서 요한나가 아버지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방금 그 사람은 누구예요?”
“레온 왕국의 총사령관 사이먼 경이란다. 1차 걷는 사자 전쟁에서 두 차례인가 그와 같이 다녔었지.”
“총사령관이면 대단한 사람이잖아요? 한가한 사람이 아닐텐데 우릴 마중나와 줬어요.”
크레치만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우리 위치란다. 우리 제국의 힘이 이들에게 강력히 미치고 있다는 증거지.”
그러나 크레치만 일행은 아이다썬에 도착한지 나흘이 지나도록 프레드릭왕과 만나지 못했다.
보통 제국의 사신이 방문하면 빠르면 당일 저녁이나 늦으면 다음날 오후에 면담 또는 만찬을 갖게 되는데 어째서인지 프레드릭왕측으로 부터 별다른 기별이 없었다.
하루에 두 번, 오전과 오후에 찾아가면 그때마다 영내 시찰을 나갔다든지, 전부터 예정되어있던 사냥을 나갔다든지, 갑자기 아프다든지, 별의 별 핑계를 대며 만나주지 않았다.
“일부러 이러나……”
크레치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가만히 방에 머물며 기다리는게 전부였다.
초조하고 답답했으나 순조로운 해결을 위해 일단 기다려보자는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참다못한 몇몇 일행이 분노를 표출했다.
“감히 우리를 푸대접하다니! 황제 폐하께 저들의 잘못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하리다!”
“이 게으른 사자 새끼 같으니! 우리가 병력을 지원해준 덕분에 왕좌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주제에 거만해졌군! 이럴줄 알았으면 이블린(프레드릭왕의 여동생)을 도와줄걸 그랬어!”
화가난 그들을 말리는건 크레치만이었다.
“자자, 다들 진정들 하시오. 왕도 구경이나 느긋이 하다 보면 곧 연락이 오겠지요.”
하지만 아이다썬에 도착한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심지어 왕궁의 대접 또한 매우 오만했다.
도착한지 일주일이 지났음에도 크레치만 일행을 위한 연회를 단 한 차례도 베풀어 주지 않았다. 황제의 명을 받들고 온 사신들임에도 홀대하는 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끼니는 제때 주었다.
다만 음식의 가지수가 적고 내용물이 형편없었을뿐.
그쯤되자 크레치만도 살짝 오기가 생겼다.
나중에 프레드릭왕을 만나게 되면 부드럽게 대하지 말고 위대한 제국의 사신으로서 좀 강하게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제국의 위엄을 보여줄 필요가 있겠어……”
왕도에 머문지 8일째, 비가 쏟아지는 밤이었다.
크레치만은 홀로 밖을 산책하다 숙소로 돌아왔다.
여러개의 촛불이 켜진 어두운 거실에서 요한나가 책을 읽고 있었다.
문앞에서 비에 젖은 옷을 터는 아버지를 보더니 물었다.
“어디갔다 오셨어요?”
“혹시나 해서 사람을 찾아 봤단다.”
“누구요?”
“버나드 라는 기사. 오래전 함께 전장을 누비던 전우였지.”
“사이먼 총사령관이랑 다녔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와는 두 차례 정도 같이 싸웠고, 버나드 경과 지낸게 대부분이었단다. ‘그 분’께서 버나드 경과 함께 다니는 것을 좋아하셨기에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버나드 경과 지낸 시간이 길어지게 됐지.”
“아하…… 그래서 못 찾았어요?”
“그는 늘 사람들 눈에 띄는걸 싫어했지. 내가 못 찾은건지 그가 이젠 없는 건지 모르겠구나. 날 보면 궁금해서라도 모습을 드러낼 사람인데 말이야.”
“나이가 들어서 은퇴한거 아닐까요?”
“그건 아니야. 1차 걷는 사자 전쟁 당시 지금 네 나이쯤 됬었을걸?”
“와, 그럼 제 나이대에 벌써 기사였던 거예요?”
“그렇지. 그의 실력이 워낙 출중했어야 말이지.”
왕도에 머문지 열흘째.
마침내 프레드릭왕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후에 만나자는 이야기였다.
“어서 폐하의 말씀을 전하고 떠나자고! 음식맛도 안맞는 이곳에 더는 머물고 싶지 않아!”
“내 말이!”
“내일 아침엔 우리 제국땅 위를 날고 있겠군! 유후우~”
크레치만과 그 일행들은 즉시 입궁을 서둘렀다.
요한나와 함께 왕이 보낸 마차를 타고 왕궁에 도착해 이윽고 알현실로 들어서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크레치만은 그 자리에서 얼굴이 굳으며 잠시 발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빛나는 갑옷으로 완전무장을 한 기사들이 양옆으로 줄지어 늘어선 모습이 그의 화를 돋우는 것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두려운 감정을 치솟게했다.
‘무엄한 놈들 같으니.’
왕이 맨발로 뛰쳐나와 머리를 조아려도 모자랄 위대한 제국의 사신을 영접하는 자리에 십수 명의 무장한 기사들을 내보이는건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크레치만은 프레드릭왕의 무례한 짓을 보고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딸을 데리고 온게 실수였는가……’
그런 와중에 알현실 안쪽에서 사이먼이 활짝 웃으며 손짓하고 있었다.
“거기서들 뭣들 하는가. 어서 안으로 들어오게.”
그의 밝은 표정을 보고 크레치만은 망설임을 지우고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그를 따라 요한나를 비롯 일행 아홉명도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곧 빈 왕좌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잠시 기다렸다.
가운데 붉은 카펫이 깔린 통로만 남겨둔 채 양쪽에 줄지어 늘어선 기사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눈빛들이 아주 음흉했고 소리없이 낄낄 거리며 자신들을 비웃는 것도 같았다.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