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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8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19 (118/200)



〈 118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19

멜라니아가 바짝 다가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대신 진하고 양 많은 두 번이야. 알겠느냐?”

***

버나드가 백검대를 떠난지 정확히 나흘이 지났다.
사흘 후에 돌아오겠다고 하던 그는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멜리사는 단단히 화가나 있었다.

“늦어!”

그동안 백검대의 일정은 차질 없이 평소때와 같았다.
제국을 향해 종일 걷고, 해가 지면 야영지를 세우고, 다음날 해가 뜨면 다시 걷고.

샤를은 여전히 숙소에 틀어박힌  군주로서 해야할 일들을 등한시하며 전권을 멜리사에게 일임하고 있었고, 그로인해 멜리사는 자신이 맡은 일 외에도 지나치게 많은 일들을 떠맡아 바쁘게 처리해야했다. 행군 도중 마주치는 지방 귀족과의 친목 및 사교활동, 또 마을과의 접촉, 종교인 접대, 인사관리, 재무관리 등등, 자신이 맡은 일은 백검대를 관리하는 것과 샤를의 호위이건만, 그외의 것들로 괴롭힘을 당하니 그녀는 스트레스가 쌓이다 못해 짜증이 한계치에 다다르고 있었다.

“아킨테에서 잘 지내고 있던 날 부른건   사람인데, 정작 나한테만 모든 일을 맡겨놓고 한분은 하루종일 장난감 같은 조각상만 갖고 놀고 계시고 다른 한 사람은 밖으로 나다니기만 한다고. 대체 뭐야? 이럴거면 협조라도 잘해주던가.”

멜리사는 부관 러즈반을 붙잡고 샤를과 버나드가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는다고 하소연하곤 했다.
러즈반은 그녀의 말에 공감은 해주되 난처할 따름이었다.
버나드를 욕하는거야 그렇다쳐도 군주의 영애인 샤를까지 입에 담는건 그의 입장에선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 점은 멜리사도  알고 있었고, 그러다보니 두 사람의 화제는 늘 버나드에 관한 것이었다.

“인간이  됐어.”
“아무래도 그때 대장님의 말씀 때문에 그런것은 아닌지……”
“우리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했던거?”
“예, 뭐. 그렇죠.”

정자세로 서 있던 러즈반이 눈을 피하며 대답하자 그  책상에 앉아있던 멜리사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다고 정말로 손뗄줄은 꿈에도 몰랐어. 속좁은 인간 같으니.”
“남일이라는듯이 완전히 손을 뗐죠.”
“그러게.”
“사정을 잘 말해서 다시 권유해보는건 어떠신지요?”
“뭘?”
“같이 부대 운영을 하자고요.”
“내가?”
“네. 버나드 경을 유심히 지켜봤는데, 제법 영리한 사람 같았습니다. 게다가 무예도 뛰어나고요. 아직 그에 관해 잘은 모르지만, 어쨌든 그간의 경험으로 비추어볼때 대장님과 나란히 설 자격은 어느 정도 되는  같습니다.”
“미쳤어?”

멜리사는 기막혀하며 망설임도 없이 대꾸했다.

“그 사람 없어도 나 혼자서 충분히 이끌어나갈 수 있어.  뭘로 보는거야 러즈반? 나처럼 높은 사람이 고작 하급 기사와 손을 잡아야겠어?”
“일을 덜어줄 사람이 필요한거 아니십니까? 그리고 버나드 경은 하급기사지만 미셸님께서 인정한 사람이잖아요. 그러시지 말고 두 분이 술 한잔 하시면서 슬쩍 권유해보십시오.”

거듭되는 러즈반의 재촉에 멜리사가 언성을 높였다.

“싫어!  내가 권유해? 그 사람이 오지 않고?”

사실 마음 같아서는 러즈반의 말대로 하고 싶은 그녀였지만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버나드 경이 제 발로 찾아와서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 이상 타협은 없어! 안받아줄거야.”
“그럼 그가 계속 밖으로 나다녀도 괜찮으신겁니까?”
“나가라지? 누가 신경쓴다고. ”

멜리사가 쏘아붙이며 팔짱을 꼈다.

“나도 아쉬울것 없어. 미셸님께 그대로 보고 할뿐.”
“어떻게 보고 하시게요?”
“부대 관리는 커녕 샤를님의 호위마저 내팽게쳐둔채 밖으로만 싸돌아다닌다고.”

러즈반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복잡하군요……”

작게 중얼거리던 그의 머릿속에 문득 버나드에 관한 의문이 떠올랐다.

“근데 버나드 경은 어디를 그렇게 가시는 겁니까? 샤를리나 님의 호위보다 중요한게 어딨다고 며칠씩 자리를 비우는 이유가 뭘까요?”

멜리사가 간단히 대꾸했다.

“모르지.”
“모르십니까?”
“알고 싶지도 않아.”

퉁명스럽게 대답한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도 정말 궁금해. 그 사람이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불쑥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대장님! 윙블 가문에서 사자가 찾아왔습니다!”
“윙블?”

멜리사는 고개를 갸웃하며 러즈반을 돌아봤다.

“윙블이 어디에 있는 가문이지?”
“글쎄요, 저도 처음 듣습니다. 일단 한번 만나보시지요.”
“무슨 일이지…… 인사차 온건가.”

현재 자신들이 머무르는 야영지 근방의 어떤 귀족 가문이 친분을 맺기 위해 찾아온 것이라 생각한 멜리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투덜거렸다.

“접대 같은 일들은 샤를 님이 전담해주시면 좋으련만. 왜 무인인 내가 다 챙겨야하는지.”

러즈반과 함께 막사를 나와 야영지 입구로 향한 그녀는 곧 놀라고 말았다.
각종 보급품과 식량을 실은 짐마차들이 야영지 밖에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중이었다.
얼핏 세어봐도 이십대는 넘었다.
거기에 짐마차를 호위하는 기사며 하인들까지 합하면 야영지를 방문한 사람의 숫자도 족히 팔십명은 넘을 정도로 상당했다. 마치 시장처럼 시끌벅적한 분위기. 매일 인적없는 들판을 가로지르며 고된 행군으로 지쳐있던 와중에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활기였다.

“각기 다른 깃발을 보아하니 윙블 가문에서만 온게 아닌듯하군. 저 사람들은 다 누군가? 무슨 일로 왔다고 하던가?”

멜리사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입구를 지키던 기사를 쳐다봤다.
그러자 기사가 들뜬 목소리로 기뻐했다.

“우리를 지원해주러 왔답니다!”
“지원……?”
“예! 우리 샤를리나님께서 왕위에 오르시는 것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기 위해 몇날며칠을 밤새 달려왔다지 뭡니까! 하하하! 식량이며 보급품이며 약품이며 선물도 있으니 꼭 좀 받아달랍니다!”
“받아달라니? 아킨테 지역을 기반으로 한 영주들도 아닐텐데 무슨 연유로 우릴 도와줘……?”

때마침 멜리사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윙블 가문의 사자가 그녀를 보자 반가움을 표시했다.

“오오, 백검대장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만, 이게 어찌된 일인지요? 우린 윙블 가문에게 도움을 청한 일이 없습니다.”

멜리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윙블 가문의 사자는 개의치 말라며 껄껄 웃어보였다.

“예전에 버나드 경께서 저희 마님의 생명을 구해준 것에 대한 보답입니다. 그러니까 공짜지요 공짜.”
“보답이요……?”

멜리사가 갸우뚱하더니 말했다.

“오래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모릅니다. 이곳에 온지 얼마되지 않았거든요. 아마 미셸님께서 계실때의 일인가보군요.”
“아하, 백검대장님은 그때 안계셨나보군요.”

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난날의 사정을 아주 밝고 경쾌하게 동작까지 곁들여 설명해주었다.

“심장이 멈춘 마님을 버나드 경께서 신속히 응급처치를 해준 덕분에 저희 마님께서 무사하실 수 있었습니다. 큰 빚을 지고 말았지요.”

당시 윙블 가문의 도만 영주와 마렐 부인은 버나드에게 거듭 감사를 표하며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으나 그것으로 은혜를 갚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결국 고민 끝에 제 2차 걷는 사자 전쟁이 한창인 이때 왕의 자녀들중 하나인 아킨테의 샤를리나의 지지를 천명했다.
샤를의 가신인 버나드를 돕고자 아킨테 가문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로 다짐한 것이었다.
그래서 각종 지원품을 보내왔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멜리사는 버나드를 떠올리며 내심 놀라워했다.

“오랜 여정으로 식량과 여비가 부족하실텐데 모쪼록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영주님과 마님께서 보내셨습니다. 부디 사양하지 말고 받아주십시오. 샤를리나 님께서 꼭 왕좌에 오르셨으면 하는 우리 윙블 가문의 마음입니다.”

사자는 자신의 뒤에 줄지어 서있는 짐마차들을 가리켰다.
마차 여섯대의 짐칸마다 식량이며 각종 보급품이 한가득 실려 있었다.

“갑작스러워서 조금 당황스럽지만.”

그 광경이 부대 책임자인 멜리사의 눈에 반갑기 그지 없었다.
물질적 걱정없이 풍요로운 여행을 할  있을테니까.
행여나 여행 도중 향수병에 시달릴지도 모를 부하들을 그나마 군말없이 잘 따르게 할 수 있는 힘이 저기 실려있었다. 각종 보급품과 식량이 바로 그것이었다.

“사정은 잘 알았습니다. 어서 들어와서 짐을 내리세요. 여봐라, 윙블 가문을 영내로 통과시켜라.”
“예, 대장님.”
“감사합니다! 흐흐 버나드 경은 안에 계시려나♪ 영주님과 마님께서 안부편지를  받아오라고 하셨는데~♪”

자신을 지나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안으로 들어가는 사자의 뒷모습을 멜리사가 지그시 쳐다보았다.

‘내가 몰랐던 버나드 경의 미담인가……’

놀랍게도 미담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윙블 가문의 뒤를 이어 식량과 보급품을 싣고 나타난 자들은 자신들을 튀사라 가문이라고 밝혔다.

“저희 테로 도련님께서 적대 가문의 적자와 지명 싸움을 하다가 앞니를  털리고 말았는데, 그때 버나드 경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큰일날뻔했습니다.”

그들도 앞서 윙블 가문처럼 아킨테 가문을 지원하게된 경위를 멜리사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멜리사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버나드 경이 전국의 지명을 술술 외운다고요? 막힘없이?”
“예예, 그렇다니까요? 버나드 경은 진짜 천재입니다!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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