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18
갑자기 몸에서 격렬한 반응이 일어났다.
“으윽!”
버나드가 갑자기 소리를 내지르더니 괴로운 표정으로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수십가닥의 거미줄이 솟구쳐나와 몸을 칭칭 휘감아댔다.
사지가 잘리면 으레 찾아오는 행사다.
버나드는 매번 구토감을 느끼며 고통스러웠으나 두렵지는 않았다.
익숙했기때문이다.
“꺅!”
순식간에 고치로 변한 그를 보고 엘레나가 비명을 지르며 다급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거미 괴물 같은게 나타났는줄 알고 긴장했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여?”
“어찌된기라?”
“마스터울프가 알로 변했댜.”
버나드가 고치속에 갇히는 상황을 처음 마주한 루로키나 거지 삼남매도 어리둥절해하며 서둘러 고치를 살폈다.
그렇게 네 사람이 당황해하는 사이, 잠시 후 버나드가 고치를 찢고 나왔다.
부욱!
옷이 녹아내리는 바람에 알몸이 되어 고치 밖으로 나온 그는 전보다 작아지고 어려져있었다.
몇달전 왕국의 감옥을 탈옥해 데보라와 처음 만났을때 딱 그 크기였다.
즉 키클롭스의 심장을 먹기전의 체격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남들한테 소년이라 불리던 체격으로.
“후우…… 또 작아졌군. 제길.”
“마, 맙소사! 팔이 생겨났어! 어떻게 한거예요?”
엘레나가 깜짝 놀라며 자신보다 약간 작아진 그를 신기하게 바라봤고, 루로키나 거지 삼남매는 자신들과 얼추 키가 비슷해졌다며 좋아라했다.
“마스터울프가 조금 덜 무서워졌디!”
“마법이라요?”
“오빠들, 마스터울프랑 나랑 이렇게 나란히 서면 잘 어울려부요?”
버나드는 자신의 왼팔에 팔짱을 끼고 있는 루를 그대로 달고 걸어가서 바닥에 벗어놓았던 망토를 몸에 둘렀다.
‘볼수록 신기한 사람이야……’
버나드를 넋나간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엘레나의 눈빛에 돌연 생기가 돌았다.
잘린 신체도 복구할 수 있는 엄청난 사람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잘됐다고 생각했다.
서둘러 그 앞으로 다가가서 그의 이름을 밝게 불렀다.
“버, 버나드 씨!”
“……?”
“저의 동료가 되어주세요!”
“뭐?”
“이건 비밀인데 버나드 씨한테만 몰래 말씀드리는거예요. 놀라지 마세요. 전 사실 우리 왕국의 공주랍니다!”
“그래서?”
“그, 그래서? 그래서라니요……?”
버나드의 반응이 떨떠름하자 당황한 그녀가 재차 소리쳤다.
“절 제국까지 데려다주면 당신한테 큰 보답을 해드리겠어요! 돈 벌고 싶지 않으세요?”
버나드는 빤히 그녀를 바라보다 대답했다.
“프레드릭왕과 창녀 사이에 태어난 딸, 엘레나. 237년 출생, 5살때부터 27세까지 노링엄 도시 빈민가에서 거주. 28세인 현재, 제 2차 걷는 사자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제국 수도로 향하는중. 하지만 다른 형제자매들과 달리 가진게 없어 급히 경호원을 구하고 있지.”
엘레나가 크게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버나드는 그녀에게 숨김없이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앞으로 그녀는 자신의 도구로 쓰일 예정이니까.
함부로 대해도 상관없다고 여겼다.
“난 널 감시했었다.”
“어, 언제요?”
“네가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말도 안돼, 본 적이 없는데요?”
“넌 내게 뭔가를 물어볼 입장이 아니야. 또한 같은 위치도 아니지.”
버나드가 딘과 샨에게 눈짓하자, 두 사람이 신속히 엘레나에게 달려들었다.
각자 엘레나의 양팔을 하나씩 붙잡고 강제로 무릎을 꿇렸다.
“꺄악!”
“시끄러부러.”
“얌전히 있으랑게. 헤헤.”
버나드는 무릎 꿇은 그녀를 짓누르듯 위압감이 실린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잘 들어. 나는 널 죽여야 하는 처지다.”
“왜, 왜요!?”
잔뜩 겁 먹은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엘레나에게 싸늘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내 주인은 네 이복자매인 샤를리나님이거든.”
“예……? 진짜요?”
“너도 알다시피 제 2차 걷는 사자 전쟁의 승자는 단 한명뿐. 샤를리나님의 경쟁자인 왕의 자녀들을 제거하는게 나의 일이지. 샤를리나님을 위해 너란 존재는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는게 마땅할 것이다.”
“시, 싫어요! 죽기 싫어요!”
엘레나는 고개를 마구 흔들며 발버둥 쳤지만 딘과 샨이 양쪽에서 그녀의 양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바람에 꼼짝할 수가 없었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전 아무 잘못 없어요! 샤를리나님께 잘못한게 아무것도 없다구요! 전 그분을 몰라요!”
버나드는 그녀의 애원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루를 시켜 바닥에 놔둔 마검을 주워오게했다.
곧 마검을 집어든 그는 칼집에서 칼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차가운 눈빛으로 엘레나를 내려다봤다.
“왕국을 이끄는 친아버지에게 따뜻한 사랑은 물론 가문의 성조차 받지 못한 가련한 딸 엘레나여. 세상의 모든 신들이 지켜보시는 가운데 나, 버나드. 내 손으로 직접 그대의 생명을 거둬 천사들의 품으로 보내겠다. 그곳에서는 부디 가난하고 외로웠던 이생보다 행복하게 잘 살 수 있길.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가?”
“죽기 싫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샤를리나 님을 나쁘게 생각한 적 한번도 없어요. 만나본적도 없다구요. 제발……!”
엘레나는 간곡히 애원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럼에도 버나드의 눈빛은 냉혹하고 단호했다.
“네 유일한 잘못은, 세상에 태어난게 죄다.”
버나드는 칼자루를 두 손으로 쥐고 천천히 머리위로 들어올렸다.
울창한 숲 아래로 새어드는 햇살에 마검이 눈부시게 빛났고, 일자로 세워진 칼날의 그림자가 엘레나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안돼……!”
공포에 질려 새파랗게 변한 얼굴.
엘레나의 눈알이 더욱 튀어나왔다.
그녀가 울부짖으며 다급히 외쳤다.
“이, 이 자리에서 절 겁탈해도 좋아요! 당신과 결혼할게요!”
버나드가 속으로 미소지었다.
‘아직이다. 그것으로는 부족해. 더 절박하게 외쳐봐.’
그는 엘레나를 완전히 발가벗겨서 절벽에서 떨어지기 직전까지 내몰 작정이었다.
그녀에게 극한의 공포를 선사해 지금 이 자리에서 오줌을 싸든 똥을 싸든 수치심을 안겨주고 이성을 파괴해 자신의 노예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말을 잘들을테니까.
지금 버나드에게 필요한건 보살펴주고 떠받들어야할 왕의 자녀가 아니었다.
자신의 명령대로 움직여줄 꼭두각시 인형이 필요할뿐.
말을 잘 듣게 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정신을 망가뜨려 바보천치로 만드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겁탈? 결혼? 어릴적부터 몸파는 여자들만 보고 자라서 그런지 그런 말이 잘도 나오나보군. 걷는 사자 전쟁에서 꼭 이기고 싶은가?”
"다, 당연하잖아요! 전 여왕이 되고 싶어요! 절 가지세요! 그럼 당신도 왕이 될 수 있어요!"
버나드가 피식 웃었다.
“순박한 시골 용병들이나 좋아할법한 제안이야. 애석하지만 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는 머리 위로 들어올린 칼을 더욱 높이 치켜들었다.
그 모습을 올려다본 엘레나의 눈빛이 더더욱 두려움으로 커졌다.
“하지만 결혼보다 더 나은 제안을 내놓는다면 살려줄수도 있지.”
“어, 어떤거요?”
“글쎄, 그건 네가 생각해봐.”
엘레나의 눈동자가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깊게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외쳤다.
“뭐, 뭐든지 다 할게요! 살려만 주시면 원하는걸 다 해드릴 수 있어요! 너무 무서워서 뭘 제안해야할지 떠오르지 않지만 아무튼 전부 할게요! 안되나요!? 제발 자비를 바랍니다 기사님!”
“진심인가? 정말 뭐든 다 할 수 있어?”
“제 모든걸 걸고 맹세할게요!”
“내 노예가 되라고 해도?”
“네, 네! 노, 노예도 할 수 있어요!”
“제 2차 걷는 사자 전쟁을 포기하라면?”
“……!”
뜻밖의 말에 엘레나는 당황한듯 잠시 주저했지만 결정은 오래걸리지 않았다.
그녀가 흐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포기할게요…… 살려만 주신다면 포기할 수 있어요.”
버나드가 입술을 씰룩였다.
“좋아.”
그가 사뿐히 칼을 내렸다.
“널 노예로 삼아주지.”
그러면서 덧붙였다.
“단, 말뿐인 노예는 원치 않아. 내 노예가 됐다는걸 확신할 수 있게 네 몸에 각인을 새겨야겠다.”
버나드는 말을 마치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
노예각인.
몸에 노예각인이 새겨지면 주인의 명령이 곧 법이요 진리요 운명이 된다.
한마디로 평생 주인을 위해 봉사하는 얌전한 노예가 되는 것이다.
주인이 해제해 주거나 죽지 않는 한 영원히 속박을 당한 채 살아야한다.
노예는 결코 주인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
만약 속으로 주인을 욕한다면 즉시 몸에 새겨진 노예각인이 발동해 노예를 꾸짖는다.
또 주인을 해치려 들거나 그에게서 도망치려는 행동을 취한다면 그 즉시 노예각인이 발동해 노예를 철저히 괴롭혔다.
사람을 다루기 참으로 편한 이 마법은, 마녀와 흑마법사가 주로 사용할줄 알았고 멜라니아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다 왔군.”
이틀후 백검대의 야영지에 도착한 버나드는 야영지 안으로 들어가기전 엘레나부터 처리할 생각이었다.
“딘, 몰래 들어가서 멜라니아를 불러와.”
“야야, 얼렁 다녀옵지라.”
얼마 뒤, 노출이 있는 망사 로브를 입은 멜라니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넌 왜 작아져서 돌아온것이냐?”
소년이된 버나드를 보고 멜라니아가 낄낄 비웃어댔다.
“떡치다가 데보라년의 가슴에 깔려죽겠구만.”
“상스러운 소리 하지마.”
“좌우지간 잘됐다. 조만간 키클롭스 사냥에 나서겠군. 나로선 반가운 일이야. 젊음을 쭉 이어나갈 수 있을테니.”
그녀는 웃는 얼굴로 잔뜩 긴장한 표정의 엘레나를 흥미롭게 쳐다봤다.
“흐음, 샤를과 같은 냄새가 나는 년이군.”
멜라니아는 손톱이 길게 자란 손으로 엘레나의 턱을 붙잡고 요리조리 돌려보았다.
“늑대야, 이 계집한테 노예각인을 새기고 싶다고?”
“그렇다. 대가는 돈으로 주지. 얼마를 원하지?”
“돈은 필요없느니라.”
“일을 의뢰할 생각이냐?”
“아니. 그런것들보다 더 급하게 원하는게 있지. 때마침 정력제의 재료가 바닥났거든. 백검대 기사 녀석들한테 너무 잘팔려서 말이야.”
멜라니아가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혀로 입술을 핥아보였다.
요염하게 벌어진 붉은 입술을 보자 버나드의 머릿속에 금세 그녀와의 정사가 떠올랐다.
버나드가 멋쩍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웃기지마.”
“노예각인을 하는게 쉬운줄 아느냐? 노예각인 한번에 세 번은 싸야 거래가 공평하단다.”
버나드가 미간을 구겼다.
“한 번.”
“세 번.”
“한 번이다.”
멜라니아는 단호했다.
“세 번. 재료값은 어쩌고? 재료값까지 포함해서 세 번이니 감사히 생각하려무나.”
“좋다. 그럼 두 번. 이 이상 절대 안된다. 두 번으로 합의해.”
“후훗, 어쩔 수 없지. 너그러운 내가 자비를 베푸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