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17
깊고 진했던 오해가 드디어 풀렸다.
갈테르는 버나드 앞에서 두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사죄를 다했다.
버나드는 그를 책망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용서해주었다.
갈테르의 여동생 레길라는 2년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전했다.
죽는 순간까지 갈테르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셨다고.
그 말을 전해들은 갈테르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며 크게 슬퍼했다.
버나드는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한 불효자. 갈테르가 한평생 떠안고갈 죄책감이다. 그것으로 이번 일을 용서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몸으로 처음부터 영걸이 된다는건 무리였습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갈테르는 수없이 뉘우쳤다.
“단장님께서 주신 기회. 앞으로 저는 어머니의 유지를 받들어 가문을 위해 살겠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이 그에게 큰 전환점이 된 것 같았다.
영걸이 되겠다는 미련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가문을 지키는데 일생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좋은 여자를 만나 멋진 가정을 이루어 대대손손 잘 살길 바라네.”
“예, 감사합니다 단장님. 바쁘시겠지만 종종 시간을 내서 저희 영지에 방문해주십시오. 당장 가서 단장님의 방을 만들고 매일 깨끗히 청소해놓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저……”
갈테르는 떠나기전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건넸다.
파란 보석이 박힌 은반지였다.
“라리가나의 심장이라는 아티팩트입니다. 질병이나 부정한 기운을 억제하는 신성한 힘이 담겨 있습니다.”
버나드는 그제야 갈테르가 몸을 막굴리고도 심장이 끄덕없던 이유를 깨달았다.
‘라리가나의 심장’ 이 그의 심장병이 발작하는 것을 최대한 억제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2년전 갈테르가 홀로 여행중, 우연히 발견한 수중 신전을 탐사하는 도중에 얻었다고 한다.
“단장님께서 허리에 차고 계신 그 마검. 지금 이 순간에도 단장님의 양기를 빨아먹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이 반지를 끼고 계시면 그 마검의 부정한 기운으로부터 벗어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테니 매일 끼고 다니십시오. 제 바람 같아서는 단장님께서 저 마검을 버리시면 좋겠지만 쉽게 포기 못하는 어떤 말못할 사연이 있으시겠지요.”
“이걸 내게 주면 자네는 어쩌려고?”
“전 제 운명을 차분히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다 언젠가 사신이 찾아오면 떠나야겠지요. 아픈 몸으로 오래살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어머니의 생전 바람대로 아들을 낳아 대를 이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됐네. 안받겠어.”
“꼭 받아주십시오. 어머니의 말씀을 안듣고 단장님한테 무례를 범한 제게 무척 화가 납니다. 단장님께서 받아주셔야 그나마 마음이 편할것 같습니다. 부디 속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버나드는 거듭 사양했지만 갈테르의 강권에 이기지 못하고 선물을 받아들였다.
이후 갈테르는 여동생 레길라와 함께 버나드에게 작별인사를 올린뒤 그대로 걸어서 마을을 떠났다.
버나드는 한참동안 그들이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홀로 생각에 잠겨있었다.
어딘가 씁쓸해보이는 그의 표정을 보고 랜턴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중이십니까?”
버나드가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사람들은 왜 함께 지낼때는 모르는 것일까.”
“예?”
“갈테르 말일세. 어머니께서 살아계셨을때 잘해드렸음 좋았을텐데 뒤늦게서야 어머니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어 안타깝단 이야기야. 지난 3년간 나를 향한 복수심에 눈이 멀어 어머니를 만나지도 않고 산게 안타까워.”
“아……”
랜턴이 고개를 끄덕이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부모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에야 그때 왜 잘해드리지 못했나 하면서 많이 후회하는 중입니다. 쯧.”
사실 버나드는 뒤늦게서야 어머니의 소중함을 알고 그녀의 유언을 따르는 갈테르를 보면서 마치 거울속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레아가 살아있었을때 더 잘해줄걸, 말 한마디라도 더 따뜻하게 해줄걸, 더 이해해줄걸, 더 사랑해줄걸 하는 후회가 밀려와 가슴을 적시는중이었다.
그런 까닭에 고향으로 떠나는 갈테르와 레길라의 뒷모습을 보자니 자신의 처지와 비슷해보여서 괜히 뭉클했다.
“빌어먹을, 인생 후반기에 너무 감성적인 인간이 된 것 같군.”
버나드는 손등으로 젖으려는 눈가를 콕콕 찍으며 돌아섰다.
“아기때 말고는 눈물을 흘려본적이 없는데.”
“에이, 질투가 날 정도로 저보다 새파랗게 젊어보이시는 분이 무슨 인생 후반기이십니까. 아직 멀으셨습니다. 최소 50년은 남았다구요.”
랜턴이 껄껄 웃는 사이 갑자기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다.
“꺄악!”
딘과 샨이 숨어있던 엘레나를 발견해 그녀의 머리채를 붙잡고 버나드 앞으로 끌고 나왔다.
“사, 살려주세요!”
“마스터울프를 훔쳐보고 있었으요.”
“나쁜뇬이랑게요.”
둘째 샨은 정신을 잃은 루를 업고 있었다.
버나드는 겁먹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엘레나를 무표정으로 쳐다본뒤 곧바로 샨에게 다가가 루의 상태를 살폈다.
앞서 갈테르에게 심하게 당한 나머지 상태가 무척 심각했다.
창백했던 피부가 점점 검게 변하며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놔두면 안되겠군.”
“루는 마스터울프를 많이 좋아해서 악착같이 달려들다 당했시라.”
“루는 마스터울프를 지키려고 열심히 노력하다 이 꼴로 당해붓다니까요.”
자칫하다가는 루가 죽을지도 몰랐다.
치료를 서둘러야했다.
운좋게도 루로키나 삼남매의 정체를 알고 있던 버나드는 긴급한 상태인 루를 치료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때까지 몸 건강하십시오!”
버나드는 랜턴과 헤어진뒤, 루로키나 삼남매와 엘레나 그리고 데들리 베놈 뉴베리의 시체를 라벤다의 등에 싣고 곧장 마을을 나와 근처 숲속으로 향했다.
인적이 없는 장소를 찾아 루를 바닥에 내려놓고, 버나드는 마음을 다잡듯 후우 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뒤이어 딘과 샨의 도움을 받아 녹색 갑옷을 벗은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왼팔을 옆으로 쭉 뻗었다.
그리고 명령했다.
“딘, 내 왼팔을 잘라라.”
“예?”
“왼팔을 잘라.”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딘과 샨이 곧 그 말을 알아듣고 화들짝 놀란다.
“그, 그게 무슨 소리당가요!”
“아고야! 안되지라! 우린 못한다요! 어디 감히 마스터울프의 몸에 손을 댄다요!”
“안그러면 루를 살릴 수 없어.”
“아니라! 그냥 이뇬을 먹이시면 안되겄습니까?”
샨이 발을 동동 구르며 엘레나의 등을 툭치자 겁을 잔뜩 집어먹은 엘레나가 앞으로 떠밀려나왔다.
버나드는 그녀를 힐끔 쳐다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 여자는 따로 쓸데가 있다. 어서 내 팔을 잘라.”
“하, 하지만!”
“빨리!”
버나드가 크게 고함을 치자 딘과 샨이 흠칫하며 덜덜 떨었다.
“아, 알겄스요!”
“오짠다, 오짠다!”
버나드의 뒤로 다가선 딘이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오른손을 들었다.
“죄, 죄송헙니다. 요, 용서해부요!”
“어서 해.”
“제 마음이 아니라요!”
딘은 눈을 질끈 감으며 손날을 내려쳤다.
서걱!
버나드의 왼팔이 싹둑 잘렸다.
“큿!”
버나드는 치밀어오르는 아픔에 얼굴을 살짝 찡그렸고, 딘과 샨은 지레 겁을 집어먹고 뒤로 자빠지며 엉덩방아를 쪘다.
“내, 내가 해부렸어!”
“형은 미쳤시라!”
엘레나는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눈을 크게 떴다.
‘이 사람 대체 무슨 생각으로……!’
팔 없이 어찌 살려고 저러는 건지.
그녀가 놀라는 동안 버나드는 이를 악물고 제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닥에 떨어진 왼팔을 주워들고 루에게 다가갔다.
루의 입을 벌리고 왼팔의 절단면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그녀의 입안에 흘려넣자, 머지않아 루가 번쩍 눈을 떴다.
루의 눈동자는 인간의 것이 아닌 피에 굶주린 괴물의 것이었다.
“피!”
노랗게 변한 그녀의 눈동자가 피를 갈구했다.
버나드에게서 팔을 빼앗더니 허겁지겁 송곳니를 꽂고 피를 빨아먹기 시작했다.
“쭈웁!”
이윽고 피가 바닥나자 그때부턴 마구잡이로 살점을 뜯어먹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딘과 샨도 곧 흡혈 욕구와 함께 인간 고기를 맛보고 싶은 충동을 못이긴 나머지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다.
삼남매는 서로 살점을 뜯어먹겠다고 싸워댔다.
“꺼지라!”
“내꺼여!”
“둘 다 저리 안가면 물어죽인다!”
입가가 금세 피로 얼룩진 삼남매의 몰골은 그야말로 육식귀가 따로 없었다.
눈동자에서 차갑고 싸늘한 노란 빛을 발하며 길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흉악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그 와중에 딘이 자신의 먹을걸 빼앗은 루의 목을 물어뜯으려고 하자 버나드가 즉시 개입해서 발로 걷어차 떼어놓았다.
루도 샨의 목을 물어 뜯으려는 것을, 버나드가 신속히 나서서 루의 입에다 벗어놓았던 장갑을 물려버렸다.
엘레나는 눈앞에서 펼쳐진 잔혹한 광경을 보고 경악했다.
‘이, 이 사람들 정체가 뭐야? 빨리 도망치지 않으면 나도 잡아먹힐 것 같아!’
다행히도 엘레나가 잡아먹히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버나드의 왼팔을 말끔히 해치우자 루는 언제 기절했었냐는듯이 기력을 완전히 회복했고, 그와 더불어 이성을 잃었던 삼남매는 버나드가 고함을 치며 위협을 가하자 세 녀석이 합심해 으르렁 거리며 달려들듯 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기세에 눌린 나머지 깨갱하며 이내 제정신으로 되돌아왔다.
“헤헤, 뭔일 있었으요?”
“우리 동생 살았구먼. 기쁘요!”
“마스터울프댜! 업어줘!”
버나드를 여행의 동반자로 삼고 싶었던 엘레나는 그가 한쪽 팔을 잃어버린게 너무 아까운 나머지 용기를 내서 다가가 슬쩍 물었다.
“저, 저기. 인간의 고기가 필요하면 마을에 있던 도적들의 시체를 주면 되지 않았나요?”
그러자 버나드는 그녀의 질문을 무시했다.
혼자 속으로만 생각했다.
‘이 녀석들은 피와 살점을 내준 인간에게 끌리는 경향이 있지. 완벽히 길들이려면 다른 자들의 피맛을 못 맛보게 해야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