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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3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14 (113/200)



〈 113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14

갈테르가 투구를 버리고 칼을 빼들었다.

“기억하시죠? 당신의 질투와 심술때문에 내 인생이 송두리째 파괴되었습니다. 당신을 넘어서는걸 두려워한 나머지 날 쫓아낸 비겁자.”

그의 사나운 눈빛이 더욱 강렬한 적의로 불타올랐다.

“내 꿈을 망친 당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오늘만을 기다렸습니다.”
“……”

버나드는 지그시 그를 올려다보다가 잠시뒤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씁쓸한 얼굴이었다.
그러면서  의미도 없는 대화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는듯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안고 있던 루를 딘과 샨에게 맡겼다.

“너희는 물러나있어.”
“우리도 돕겠시라!”
“저 놈, 강한디. 마스터울프 혼자 괜찮겄습니까. 아직 힘 못찾았담서요.”
“그런 얘긴 하지마. 아무튼 루를 데리고 여기서 나가있어.”

곧 딘과 샨이 기절한 루를 업고 허겁지겁 밖으로 뛰쳐나갔다.
버나드는 마검을 손에 쥐고 2층 난간의 갈테르를 올려다보았다.

“갈테르!”

웃으며 말했다.

“그동안 얼마나 늘었는지 실력 좀 볼까?”

그러자 갈테르가 난간에서 날렵하게 뛰어내리더니 버나드와 마주보고 섰다.
그의 차가운 눈빛에는 원망과 증오가 단단히 서려 있었다.

“작정하고 왔습니다. 눈앞의 당신이 누구인지, 아주 잘 아니까요.  우습게 보다간   다칠테니 죽을 각오로 싸우셔야할 겁니다.”
“그 풋내나고 어리숙했던 신참 갈테르가 어느새 훌륭한 사냥꾼이 되었다는 건 확실히 알겠군.”
“그 비웃음.”
“비웃는게 아니야. 네가 대견해보이는 거지.”
“듣기 싫습니다. 좌우지간 그 비웃음. 지금부터 철저히 지워드리죠. 다시는 웃지 못하게.”

갈테르가 칼을 겨누며 자세를 잡았다.
버나드도 그에 응하듯 그를 향해 마검을 겨누었다.

“내 칼은 날카롭지 못하나 맞으면 뼈가 부러질테니 조심해.”

자신을 노려보던 갈테르의 눈이 아래로 향하더니 마검의 칼날에 붙은 마른 흙덩이들을 보고 피식거렸다.

“설마 시덥잖게 살인을 하지 않겠다는 신념이라도 생긴겁니까?”
“오해야. 사정상 붙이고 다니는 중이지.”
“칼을 바꿀 시간을 드리죠.”
“괜찮아. 이대로가 좋아.”

그 말에 갈테르의 눈빛에 한층  독기가 서렸다.
버나드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한 것인지 기세가 더욱 사나워졌다.

“지금 당장 레아님 곁으로 보내주마 마스터울프!”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저돌적으로 파고 들었다.

***


왕도 아이다썬.
나이트섀도우 본부.
집무실 의자에 편히 기대앉아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고 있던 줄리안에게 말끔한 제복 차림의 로잘리나가 찾아왔다.

“랑그릴테 지방의 지도를 가져왔습니다.”
“거기 두고 가.”
“네.”

하지만 로잘리나는 뭔가 더 할말이 있는듯 책상 앞에서 머뭇거렸다.
등받이에 목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줄리안을 힐끔 쳐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뭔데?”
“네?”
“뭔 말이 하고 싶은데?”
“아, 저……”
“버나드나 빨리 잡지 왜 잠이나 처자냐고?”
“아뇨! 그, 그게 아니라……!”

정곡을 찌르는 소리에 놀란 로잘리나가 크게 당황하며 허둥지둥대자 줄리안이 웃으며 눈을 떴다.

“그럼 뭐 때문에 그러는데 아가씨?”
“저 그러니까……!”

눈알을 산만하게 굴리던 그녀가 꿀꺽 침을 삼킨 후 서둘러 둘러댔다.

“버, 버나드에 대해서 여쭤볼게 있습니다!”
“어떤거?”

줄리안의 시선이 무심코 그녀의 다리로 향했다.
제복 치마 밑에 파란 레깅스를 입은 늘씬한 다리 라인이 돋보였다.
줄리안이 흡족한 얼굴로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는 동안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로잘리나가 입을 열었다.

“버나드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성격이라든지 취미라든지  그런……”
“갑자기 그런건 왜 물어? 마스터울프에게 관심있어? 소개시켜줘?”
“무슨 말씀이세요!”

로잘리나가 황당해하며 인상을 썼다.

“그의 성향을 알면 추적이 더욱 수월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예를 들어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면 주로 따뜻한 지방에 숨어있을 확률이 높다든지, 좋아하는 음식이 있으면 그 음식으로 소문난 지방에 숨어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아, 습성?”
“우선 성격부터요. 뭐든 좋으니 참고가 될만한 것을 말해주십시오.”

그녀가 의욕을 불태우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 손으로 반드시 마스터울프를 붙잡고 말겁니다. 우리 아버지의 숙적을 말이죠……! 빨리 뭐든 알려주세요.”

그녀는 안소니 후작의 딸이다.

“성격이라……”

줄리안이 하품을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뭐가 있을까.”

잠깐 기억을 되짚던 그가 미소지었다.

“그는 정말 답답할 정도로 강직하고 우직한 인간이었어.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지.”

줄리안은 느긋하게 창밖을 쳐다보며 물었다.

“마스터울프의 친위대가 누구누구였는지는 알지?”
“줄리안 단장님과, 왕비와 왕세자를 시해한 레아, 그리고 행방불명인 로토라는 자요.”
“거기에 알려지지 않은 한 명이  있었지.”
“그게 누구죠?”
“갈테르란 녀석. 버나드는 당시 신참이던 갈테르를 무척이나 아꼈어. 그리고 나, 레아, 로토까지 모두 갈테르를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라고 생각했지. 어린 나이에 워낙 실력이 좋아서 잘하면 영걸이 되겠다 싶었어.”

로잘리나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영걸 소리를 들을 정도면 단장님보다 뛰어났습니까?”

줄리안이 목을 긁적이며 혀를 찼다.

“솔직히 고백하면  비등비등했지. 진짜야. 진짜 쪼오금 차이났어. 내가 쪼오금 앞섰다는 얘기지.”
“갈테르가 더 앞섰다는 말로 듣겠습니다.”
“어이?”
“아무튼 그런 사람이 왜 알려지지 않은거죠?”
“아팠으니까.”
“예? 어디가요?”

줄리안은 계속 창밖에 시선을 둔  대답했다.

“마스터울프는 갈테르를 차기 밤의 늑대들 단장으로 점찍으며 그를 매일 가까이두고 훈련시켰지. 그러던 어느날이었어. 갈테르의 엄마와 여동생이 찾아온거야. 왕궁 주변을 서성거리던 그녀들을 내가 발견한뒤 마스터울프와 만나게 해줬지.”

그게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갈테르를 멈춰달라고 간절하게 애원하며 그가 지병을 앓고 있다고 알렸다.

‘오라버니는 심장이 약해요!  이상 검술을 수련하면 죽을지도 모른답니다! 그런데도 계속 고집을 피우며 저희 말도 안듣는 중이에요! 자기는 꼭 우리 왕국의 영걸이 되고 싶다며……!’
‘나리! 제발 우리 아들을 말려주세요! 고향에서 영지를 지키며 평범한 삶을 살아갈  있도록 부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시길 간곡히 청합니다! 그 아이는 우리 집안의 하나뿐인 아들이라고요!  대를 이어나가야해요!’

갈테르는 자신이 심장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버나드를 비롯 친하게 지내는 동료들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지내온 것이었다.
그는 모두에게 비밀로 한 채 영걸이 되고 싶은 꿈을 이루기 위해 멈출줄을 몰랐고, 그로인해 가족들은 그가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할까 걱정하며 매일 불안한 삶을 살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그  레아를 시켜 정확한 정황을 파악했다.

‘갈테르의 방에서 다량의 진통제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신전의 사제를 만나 병의 악화를 늦추는 치료를 비밀리에 받고 있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이 사실이었군. 알겠다.’

갈테르가 아픈지 몰랐던 버나드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갈테르가 계속 고집을 피우게 놔둘지, 아니면 그를 멈추게 할지.
참고로 아들이 소중한 시대다.
귀족 집안의 대가 끊기게 할 수는 없는 노릇.
대가 끊기면 다른 가문에게 영지를 먹히고 가문이 사라진다.

버나드는 결국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자신이 무척 아끼던 갈테르를 놓아주기로 마음 먹었다.
그 즉시 줄리안을 불러 지시했다.

‘갈테르를 내보내. 지금  시간부로 그는 밤의 늑대들이 아니다.’
‘갑자기요?’
‘그를 지키려면 이러는게 최선이다.’
‘만나서 사실대로 말씀하시죠.  아파서 그런다고. 갑자기 아무말도 없이 내보내면 불만을 품을텐데요?  같아도 화나겠어요. 두고보자 마스터울프 하면서.’

버나드가 픽 웃었다.

‘아니야. 굳이 그런 수고는 필요없다. 내가 어머니와 여동생을 만났다는 사실을 알리는건 옳지 않다. 만약 갈테르가 이 일을 알았다가는, 어머니 때문에 밤의 늑대들에서 추방당했다고 집안 사람들을 원망할지도 몰라. 그랬다간 더더욱 어머니 말씀을 듣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럴바에 차라리 내가 다 떠안고 가겠다. 갈테르에게 절대 어머니와 여동생이 찾아왔다고 알리지 말도록. 그냥 내보내. 그가 오해해도 상관없다.’

줄리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단장님은 정말…… 스스로 욕을 먹고 사시려 하는군요.  오래사시겠습니다.’

사실대로 말하고 그쪽 집안 사람들끼리 싸우든 말든 죽든 살든 알아서 하게 놔두면 될 것을.
당시 줄리안으로선 버나드의 그런 결정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불필요하게 남 집안사정까지 배려해주는 바람에 그 밑에 있던 나는 환장할뻔했다니까. 고아로 자라서 부모와 가족이란 단어가 그에게 각별한건지 뭔지. 하여튼 로잘리나 경, 얘기를 들어보니 어때? 자네도 나랑 같은 생각이지? 마스터울프가 정말 답답하지 않아?”

이야기 내내 줄곧 창밖을 바라보던 줄리안이 책상 앞에 서 있던 로잘리나를 돌아보았다.
로잘리나의 상태를 보고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잘리나 경……?”

어이없게도 그녀의 눈빛이 감격에 겨워 반짝반짝 빛나는 중이었다.

“머, 멋있어……!”
“에엥? 어디가?!”
“버나드한테 부하의 가족을 신경써주는 섬세한 면이 있었네요. 전혀 몰랐어. 극악무도한 성격을 가진 반역자인줄로만 알았는데.”
“헐……”

줄리안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로잘리나 경? 그대는 누구편? 아버지를 배신할 생각?”
“아차.”

그녀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며 민망한듯 작게 헛기침을 했다.
곧장 차렷자세를 하며 다시 근엄하고 품위있는 기사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흥, 역시 버나드군요. 부하에게 상처주는 일을 서슴지 않는 매정한 인간입니다.”

붉어진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줄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늦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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