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13
뉴베리가 머리를 얻어맞고 쓰러지는 소리가 싸움의 시작을 알렸다.
뚯밖의 상황에 놀란 도적들이 일제히 무기를 꺼내들었다.
“조심해! 버나드가 살아있다!”
“우리가 천장을 보느라 한눈을 파는 사이 대장을 공격했어!”
“제기랄! 대장이 당했잖아!”
“모두 공격해!”
그렇게 싸움이 시작되자 루로키나 삼남매까지 곧바로 가세하며 혼전으로 치닫는 순간 사실상 승자는 뻔했다.
버나드쪽은 소수지만 어중이 떠중이가 아닌 정예였다.
같은시각, 뒷뜰에 나와있던 엘레나는 자책감에 마음이 슬펐다.
“내 손으로 사람을 죽였어……”
버나드에게 독이 든 음식을 갖다준 자신의 행동을 탓하며 그의 명복을 빌었다.
“나를 원망해주세요. 죄송해요. 나중에 제가 여왕이 되면 꼭 묘비를 세워드릴테니까…… 그걸로 참아주시면…… 큰 돈 들여서 크고 화려하게 만들어드릴게요. 반드시 이름도 기억할테니, 버나드 씨……”
그때 안에서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술병이 깨지는 소리, 비명 소리, 의자가 박살나는 소리 등등.
“무슨 일이지……?”
엘레나는 덜컥 불안한 기분이 들며 서둘러 창문 쪽으로 뛰어갔다.
창문을 통해 슬쩍 안을 들여다본 그녀는 이내 경악했다.
피비린내 나는 칼부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죽었어야할 버나드가 멀쩡히 살아있었다.
“어, 어떡해!”
빨리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 벌컥 들었다.
즉시 건물에서 떨어지며 황급히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문득 버나드가 떠올랐다.
그는 현재 마른 흙덩이들이 붙은 희한한 칼을 들고 멋지게 싸우는 중이었다.
“자, 잠깐만! 가만 있어봐…… 어쩌면…… 그 사람한테 부탁하면……?”
독약에도 끄덕없는 신기한 사람이라며.
“그는 강해.”
잘하면 버나드를 자신의 경호원으로 고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기대감이 그녀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독이 든 음식을 갖다준건 협박 받아서 그랬다고 하면 용서해줄거야.”
자신의 이름을 물어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보여주던 그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착한 사람이지 않을까.
“수중에 가진 돈은 없지만, 렘가프 씨한테 했던 것처럼 결혼을 전제로 제국까지 데려다 달라고 하면……”
사기치는게 아니었다.
자신의 꿈을 이뤄주는 사내에게 그녀는 정말로 시집갈 생각이 있었다.
어차피 그지 같은 인생.
나이도 20대 후반이라 노처녀 소리 들을 나이다.
남들보다 무척 늦은편이었고, 그로인해 남자 가리지 않고 사지만 멀쩡하면 결혼해도 좋다고 여겼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단 지켜보자.”
결국 그녀는 근처에 숨으며 싸움이 끝나길 조용히 기다렸다.
여관에서의 전투.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을 집어넣고 돌을 던지면 그 돌에 누군가는 꼭 맞기 마련이다.
다수에 비해 소수는 지속적으로 전투를 강요당하기에 체력적으로 불리하지만, 실내가 꽉 찰 정도로 많은 적들이 있다면 오히려 체력 소모가 덜 할 수도 있다.
칼을 대충 휘둘러도 알아서 맞아준다.
그리고 적들이 죽는 맛에 기운이 샘솟는다.
게다가 한 사람이 아닌 두 세 사람을 한꺼번에 벨 수 있었다.
여럿이 죽어나가는 광경을 보고 사기가 더욱 치솟으며 피곤함 따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를 취했다고 한다.
“히히히!”
“헤에!”
“킥킥!”
루로키나 삼남매는 베는 맛에 취한 채 사방팔방 날뛰며 말그대로 미친듯이 칼을 휘두르고 다녔다.
“끄악!”
“사, 살려줘! 억!”
“허헉!”
밖에서는 라벤다가 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여관 주위를 철통같이 감시하고 있다가, 간혹 밖으로 탈출한 이가 있으면 빠르게 쫓아가서 뒷발로 힘껏 걷어차버렸다.
“으악!”
난전.
버나드와 루로키나 삼남매는 좁은 공간에서의 난전을 마음껏 즐겼다.
오십여명이었던 도적들의 숫자가 하나둘 줄어 이윽고 다섯명이 남았을때, 그것으로 사실상 전투는 끝이났다.
살아남은 도적들은 싸울 의지를 잃고 바지에 오줌을 싸며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하, 항복!”
하지만 버나드는 그들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졌어! 졌다고! 봐! 무기도 버렸잖아!”
“내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는걸 원치 않아.”
한 사람씩 다가가서 그들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그리하여 수없이 많은 시체가 널브러진 실내 바닥.
살아남은 이가 없는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때 한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개자식! 네놈이 오늘 살아돌아갈성 싶으냐?”
그의 두 눈동자가 독기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싸움이 시작되기전 제일 먼저 버나드에게 당한 뉴베리였다.
“나야 나. 나 D.V란 말이다. 데들리 베놈 뉴베리!”
마검에 붙은 마른 흙덩이에 머리를 처맞고 기절해버렸던 그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뉴베리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왕도에서 잘나갔던 이유가 뭔줄 알아?”
그가 사악하게 히죽 거렸다.
그 모습을 버나드는 잠자코 바라보기만 했다.
뭐든 할테면 해보라는듯이 여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내 온몸이 맹독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받아랏!”
스윽!
뉴베리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검을 빼들어 자신의 오른 손바닥을 일자로 긋고,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녹색 피를 번개같이 버나드를 향해 뿌렸다.
“피하기엔 이미 늦었다고!”
한 번!
두 번!
세 번!
오른팔을 X자로 세차게 휘저으며 버나드의 온몸에 자신의 피를 듬뿍 묻혔다.
뉴베리의 체내에 흐르고 있는 피는 지독한 독성을 지니고 있었다.
뉴베리는 본래 인간이지만 과거 어떤 사연으로 인해 체질이 완전히 변해버렸다.
맹독을 생산해 내는 그의 몸은 이제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하하하! 죽어! 죽어! 죽어어어!”
녹색 피가 닿은 곳은 염산을 뿌린 것처럼 녹아내렸다.
목재로 된 벽이 흰 연기를 내뿜으며 녹아내리고,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의 피부도 녹아내렸다.
단 하나 피를 뒤집어 쓴 버나드만 제외하고.
놀랍게도 눈앞에서 흩뿌려지는 녹색 피는 버나드의 얼굴 피부에 닿는 족족 새하얗게 투명해지며 말끔히 증발되어 버렸다.
그리고 버나드가 몸에 두르고 있던 갈색 망토가 완전히 녹아내리자 그가 입고 있는 화려한 녹색 갑옷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찌 된거야?”
세차게 팔을 휘젓던 뉴베리가 동작을 멈췄다.
그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뭐냐고! 넌 왜 멀쩡해!?”
“왜 그럴까?”
버나드가 미소지었다.
“이게 바로 아티팩트의 힘이지.”
“아, 아티팩트!? 그게 뭔데?! 아티팩트가 어딨어!”
“곧 죽을 인간에게 설명해봐야 시간 낭비일뿐.”
버나드는 상체를 약간 숙이더니 그대로 튕겨나가며 화살처럼 빠르게 접근했다.
넋나간 표정을 짓고 있던 뉴베리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 다음 그의 목을 졸랐다.
“크윽……!”
“마침 네 몸뚱이를 쓸곳이 떠올랐다. 죽어서 나를 위해 봉사해라.”
“커억!”
버나드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뉴베리의 목을 더욱 꽉 조르자, 얼굴이 새빨갛게 붉어진 뉴베리가 약간 저항을 하는듯 하다가 금세 숨을 거두었다.
그것으로 확실히 끝났다.
“후우.”
마침내 싸움이 끝났다는 안도감에 버나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 뜨고 죽은 뉴베리를 잠시 내려다 보며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데들리 베놈 뉴베리. 네 몸뚱아리가 가진 맹독이라면 어쩌면……”
보물상자속에 살고 있는 고대 괴물 레비아탄을 죽일 수 있지 않을까?
괴물의 커다란 입속에 뉴베리의 시체를 던져 넣으면 어떨까 하고, 조금전 뉴베리와 싸우면서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도 해서 손해볼건 없어. 안되면 말고.”
그렇게 중얼거리며 죽은 뉴베리의 오른손바닥을 지혈해 새어나오는 피를 멈추게한 다음, 주변 시체들이 걸치고 있던 망토로 뉴베리의 몸을 칭칭 휘감았다.
시체를 야영지까지 가져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혼자 작업하는 동안 어째서인지 루로키나 삼남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싸움은 진작에 끝났거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실내는 조용했다.
“루! 딘? 샨!”
주위를 둘러보며 삼남매의 이름을 크게 불러봤으나 대답이 없다.
“이럴 애들이 아닌데.”
‘혹시 밖에서 도망친 도적들을 처리하는 중인가?’
그때였다.
2층 난간에서 뜬금없이 딘과 샨이 동시에 떨어지며 1층 바닥을 굴렀다.
“아윽……!”
“아구야……!”
“딘? 샨?”
누군가에게 얻어맞았는지 딘과 샨은 통증을 호소하며 일어나질 못했다.
딘이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울먹거렸다.
“큰일났시라. 엄청 강한놈이 나타났시라……!”
“아파부요. 마스터울프 나 아파부요!”
저벅.
저벅.
때마침 2층쪽에서 육중한 금속소리가 들렸다.
“……?”
버나드는 우두커니 서서 2층 난간을 주시했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칠흑의 투구와 갑옷을 입고 있는 한 사내였다.
한 손으로 루의 머리채를 붙잡고 질질 끌고 온 그가 루를 밑으로 홱 던졌다.
버나드가 서둘러 밑에서 그녀를 받았다.
얼굴이 멍든 루는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루까지……”
“루로키나 거지 삼남매를 데리고 계실줄이야 뜻밖입니다. 왕비와 왕세자를 시해하고 반역자가 된 것도 모자라 이젠 인간이 아닌것들과 다니시는 겁니까?”
버나드가 미간을 좁히며 위를 올려다봤다.
“그 목소리…… 기억나는군.”
“오랜만입니다, 단장님.”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밑을 내려다보고 있던 흑기사가 투구를 벗었다.
짧은 머리에 다부진 인상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버나드가 눈을 크게 떴다.
“갈테르!”
“예, 당신의 부하였던 뤼지앙의 갈테르입니다. 다행히도 절 잊지 않으셨군요. 하긴 한때 레온 왕국의 영걸 후보로까지 불렸던 저니까요.”
버나드의 미간에 생긴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네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거지?”
“왜긴요. 그야 단장님을 죽이러 왔으니까요. 다시 말해 복수하러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