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10
왕의 자녀들끼리 서로를 적대시하며 급기야 상대를 말살시키는 짓은 분명 세계의 정의와 윤리, 상식을 벗어나는 행위였다.
그리고 의도적인 외면을 하며 그들을 사지로 내몬 아버지 또한 비윤리적이고 비양심적인 인간이라며 세상의 질타를 받을만 했다.
하지만 상당수 백성들은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또 귀족끼리 지랄을 하는중인가. 잠깐 소란스럽다 말겠지.”
“귀족들이 하는 짓 치고 언제 제정신인적이 있었나? 근친상간? 패륜? 근친혼? 존속살해? 수없이 들어서 이제는 지겨울 정도야.”
“서열이 정해지면 알아서 조용해지겠지.”
“아무나 좋으니 자비롭고 똑똑한 놈이 통치를 해줬으면 좋겠어.”
“내버려둬. 제 2차 걷는 사자 전쟁에서 살아남은 놈은 영리하고 강하다는 증거니까 우리 왕국도 잘 이끌어줄테지. 차라리 잘 됐어.”
그렇게 세상의 무관심속에서 ‘엘레나’ 는 오늘도 제국으로 가는 발걸음을 힘겹게 내딛었다.
“좀 쉬었다가죠.”
아침부터 반나절을 산만 타다 겨우 산밑으로 내려왔다.
물속에 빠졌던 사람처럼 땀으로 흠뻑 젖은 그녀의 옷은 몸에 찰싹 달라붙어있었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는 그녀는 몹시 지쳐있었다.
동행자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무작정 나무 그늘 아래 털썩 주저앉았다.
앞서 걷던 사내가 뒤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손에 쥐고 있던 잔 나뭇가지를 빙빙 돌리며 말을 꺼냈다.
“그래 갖고 언제 제국까지 가겠소?”
엘레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시원한 바람을 들이마셨다.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새파란 하늘아래 끝없이 펼쳐진 대지는 그녀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나오게 만들었다.
“힘들어서 쓰러지겠어요. 좀 쉬었다 가요.”
“뭐 나야 당신이 하라는대로 하면 그만인 용병이지만. 나중에 딴놈보다 늦었다고 내 탓하지 마쇼.”
사내의 이름은 렘가프.
엘레나가 전재산과 맞바꿔 구한 용병이다.
프레드릭왕과 창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엘레나는, 천한 신분으로 2차 걷는 사자 전쟁에 참가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고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 내내 자신을 도와줄 조력자 및 경호원이 필요했다.
그래서 만나게 된 것이 렘가프였다.
30대 후반의 그는 경험 많고 실력 좋은 용병이었으며, 그로 인해 고액의 몸값을 자랑했다.
하지만 가난한 삶을 살았던 엘레나가 가진 전재산이라고 해봐야 말 한 필조차 살 수 없는 터무니 없이 작은 금액이었다.
지역에서는 나름 유명하다면 유명한 용병이었기에, 렘가프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간곡하게 매달렸다.
그러자 렘가프는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싸게 해주는 대신ㅡ, 나중에 여왕이 되거든 날 반려자로 맞아주시오.”
엘레나는 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만약 자신이 여왕이 된다면 렘가프의 공로가 크다고 생각했기에 그의 요구가 타당하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렘가프는 벌써 여행 초기부터 남편인척 굴었다.
동행하는 동안 그의 음흉한 시선이 자주 느껴졌고, 어느날은 같이 잠자리를 하자며 무례한 요구까지 했다.
“미래에 결혼할 사이인데 어때? 지금 떡치나 나중에 떡치나 똑같잖수. 그 보지가 그 보지고 그 자지가 그 자지인데.”
“야, 약속을 잊지마세요. 우리가 이룬건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그러니 당신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어요.”
“쳇, 깐깐하긴. 창녀의 딸이 정숙할리가 없을텐데 희한하네. 고귀한 귀족분의 핏줄을 물려받아 그런가 요조숙녀짓이 몸에 뱄네. 귀찮게시리.”
엘레나는 그가 매우 부담스러웠고 매번 어지럽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했다.
당장이라도 렘가프와 헤어지고 싶었으나, 제국까지 가려면 그의 도움을 필히 받아야했기에 어쩔 수 없이 그와 인연을 이어나가며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고 있었다.
“아아, 잠깐 바람 좀 쐬다 가보실까.”
렘가프가 옆으로 와서 철푸덕 주저앉았다.
그가 너무 밀착해서 앉는 바람에 그의 어깨가 엘레나의 몸과 닿았다.
엘레나는 조심스럽게 옆으로 이동해서 그와 간격을 벌렸다.
그러든 말든, 렘가프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반쯤 찢어진 지도를 자루에서 꺼내 바닥에 펼쳤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레이크빈이라는 마을이 나온다오. 오늘은 거기서 하룻밤 묵자고.”
“알았어요.”
“돈은 얼마나 남았소? 여관에서 자도 되지?”
“걱정마세요. 충분히 있어요.”
“방을 두 개 잡으면 돈이 더 나갈테니 하나만 잡자구.”
“네……”
렘가프는 미소 띤 얼굴로 힘없이 대답하는 엘레나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허름한 드레스가 땀난 등에 착 달라 붙어서 그녀의 흰 살결이 비치고 있었다.
비록 옷이 초라하고 낯빛이 볕에 탔다 하더라도 고귀한 귀족의 피를 물려받은 그녀의 미모는 지워지지 않았다.
길고 꼬불꼬불한 금발 머리, 작고 오똑한 코, 맑은 호수 같은 초록빛 눈동자, 갸름하고 여성미 넘치는 얼굴선, 그리고 무엇보다……
약간 두텁고 길게 찢어진 입.
엘레나의 이목구비 중에서 저 매력적인 입술 모양이 유난히 도드라져 눈을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렘가프는 저 아름다운 입술에 페니스를 찔러넣고 싶은 욕망이 가득했다.
입이 커서 만족스럽게 잘 해줄 것 같았다.
하지만 강제로 가질 생각은 없었다.
렘가프도 나름 신사였다.
거칠고 무도한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야수처럼 살아오다 보니, 야성성이 강하기에 순수하고 솔직하게 본능을 표출할뿐 엘레나의 몸에 무리하게 손을 댈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설득을 해서 합의하에 관계를 가질 예정이었다.
어차피 그녀와 끝까지 가야할 운명이 되었으니, 굳이 지금이 아니더라도 시간은 많다.
그는 여유가 있었다.
처음 엘레나를 봤을때, 그녀의 미모에 홀딱 반했고 그녀를 그냥 떠나보내기가 무척이나 아쉬웠다.
그래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녀를 갖고 싶어서.
갖고 싶다는건 하룻밤으로 끝낼 인연이 아니라 평생 내 여자로 만들고 싶다는 의미다.
가정을 이루며 한평생 같이 살고 싶다는 의미.
엘레나를 자신이 본 여자중에 가히 최고의 여자라 생각하며 미래에 그녀와 가정을 이룬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자 그저 즐거웠다.
“근데 여왕이 되려는 이유가 뭐요?”
바닥만 쳐다보고 있던 엘레나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돌아보자 렘가프가 재차 말을 이었다.
“당신의 이복형제자매들은 돈도 많고 휘하에 사람들도 많을텐데, 이렇게까지 생고생을 해가며 제국으로 가려는 이유가 뭔지 궁금해서 그렇소. 사실…… 왕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가장 약할거야. 돈도 없고.”
“돈……”
엘레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왕이 되고 싶은 이유는 별거없어요. 그동안 워낙 가난하게 살아서 지긋지긋해요. 단 하루라도 좋으니 귀족처럼 떵떵거리며 잘 살고 싶을뿐이에요. 그게 전부예요. 저 같은 천민에게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소중한 기회를 놓치기 아깝잖아요.”
“고작 잘 살고 싶다라.”
렘가프가 너무 소박해서 시시하다는듯 큭큭 웃었다.
“어쨌든 나한테는 좋은 일이지. 마누라가 돈이 많으면 나도 돈이 많아질테니까. 그러니 힘내자구 공주님. 내가 힘껏 도와주겠어. 우리 둘이 힘을 합쳐 왕좌를 강탈해버리는거야. 알겠소?”
렘가프가 불끈 쥔 주먹을 들어보였다.
“나만 믿으시오.”
이 순간만큼은 렘가프가 참으로 든든했다.
엘레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쥐고 그의 손등을 툭 쳤다.
서로 힘내자는 의미였다.
“고마워요.”
그 순간이었다.
나란히 앉은 렘가프와 눈을 마주치는 찰나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난데없이 말을 탄 사내가 두 사람의 옆을 빠르게 지나치면서 렘가프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스윽!
“이야호!”
사내는 괴성을 지르며 그대로 멀어졌고, 깜짝 놀란 엘레나는 황급히 렘가프를 바라보았다.
렘가프의 표정은 얼음처럼 굳어있었다.
“아……”
그의 머리가 어깨를 타고 밑으로 굴러떨어지며 엘레나의 발치에서 멈췄다.
엘레나는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동시에 뒤에서 올가미가 날아와 그녀의 목에 걸렸다.
올가미가 목을 조이자 엘레나는 숨이 막혀 발버둥을 쳤다.
“저러다 죽겠다! 느슨하게 풀어 등신아!”
뒤에서 어떤 사내가 수십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선두에서 말을 모는 그는 바로 데들리 베놈 뉴베리였다.
“흐음, 좋은 물건을 주웠군.”
버나드가 레이크빈에 은신할 예정이라는 첩보를 입수한 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레이크빈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러던차에 앞서 달리던 정찰조가 우연히 엘레나와 렘가프를 발견했고, 운좋게 발견한 먹잇감들에 대한 도적들의 사냥 방식은 아주 단순했다.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살려라.’
뉴베리는 올가미에 걸려 슬프게 울어대는 엘레나를 유심히 들여다 보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년 참 예쁘군. 얘들아! 내 맹세하지! 버나드를 죽이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녀석에게 이 계집을 주겠다! 모두 최선을 다 해다오!”
“와아~!”
“좋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