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9
그렇게 결심하고 야심차게 뒤를 돌아보았다.
“버나드 경, 같이……”
“멜리사 경, 전할 말이……”
버나드가 동시에 말을 하니 멜리사는 하려던 말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상대에게 먼저 말하라고 양보하듯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침묵을 유지했다.
“……”
“……”
침묵이 좀 길어지자 멜리사가 손으로 권하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먼저 말씀하시죠.”
그에 버나드는 사양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급히 다녀올 곳이 생겼습니다. 사흘 정도 걸릴겁니다.”
“뭐라구요!?”
갑작스러운 통보에 놀란 멜리사의 인상이 대놓고 구겨졌다.
‘또야!?’
부대 일은 내팽게쳐둔채 또 밖으로 싸돌아다닌다며 그녀는 속으로 발끈했다.
한 두 번도 아니고 벌써 몇 번째인지!
‘이 사람은 대체 샤를리나님을 호위할 생각이 있는거야 없는거야!’
화가 나서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얼른 주름진 미간을 펴며 언제 인상을 구겼냐는듯 미소를 짓고 버나드를 바라봤다.
“버나드 경은 늘 바쁘시네요.”
“세상이 절 한시도 가만 놔두질 않는군요. 최대한 빨리 마치고 돌아올테니, 내가 없는 동안 샤를리나님을 잘 지켜주십시오.”
전혀 미안해하는 기색없이 당당히 지껄이는 모습을 보고 멜리사의 작고 동그란 이마에 남들이 알게 모르게 힘줄이 하나 튀어나왔다.
‘어쩜 저리도 뻔뻔한지!’
그러나 그녀는 끓어오르는 화를 표출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버나드를 잘 달래야 했으니까.
‘참자!’
재차 마음을 다잡으며 버나드를 향해 억지 미소를 짓던 그녀의 뇌리에 불쑥 한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설마 일부러……?’
버나드가 자꾸 밖으로 나다니는 이유가 혹시 자신 때문이 아닐까 하고.
그러니까 그거다.
예전에 우리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그녀의 말로 인해 버나드는 지금 상심한 나머지 삐쳤을지도 몰랐다.
따라서 관심을 받고 싶어 반항을 하는게 아닐까?
‘실은 갈 곳도 없으면서 괜히 바쁜척 굴며 내가 붙잡아줬으면 하는 마음에 이러는건가……?’
버나드도 속으로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라고.
함께 백검대를 이끌며 제국으로 가고 싶은 것이겠지.
‘나와 상의하면서 일하고 싶다고 먼저 말하기가 쑥쓰러운거야.’
그런 생각이 들자 억지 미소가 이내 자연스러운 미소로 변해갔다.
‘버나드 경도 귀여운 구석이 있군. 남자답게 솔직히 말하면 될텐데.’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느낌이 들자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안됐지만 버나드 경. 내가 먼저 붙잡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당신이 먼저 내게 머리를 조아리세요. 그럼 기꺼이 받아줄테니.’
멜리사는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기 일은 제게 맡기시고 잘 다녀오십시오.”
전혀 아쉬울 것이 없다는 투로 활기차게 말을 이었다.
“사흘이 아니라 더 오래 걸리셔도 상관없습니다. 부디 괘념치 마시고 편히 일 보십시오.”
시원하게 말을 마친뒤, 그녀는 속으로 사악하게 웃으며 버나드의 표정을 주목했다.
‘후후, 충격일테지. 내가 가지 말라며 붙잡을줄 알았을거야. 아니면 크게 화를 내길 바랐던가.’
멜리사는 내심 기대를 하며 버나드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봤다.
그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으면 그녀는 자신의 예상이 정확히 들어 맞았다며 크게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버나드는 뜻밖에도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든든하군요. 그럼 믿고 잘 다녀오겠습니다. 멜리사 경은 정말 훌륭한 지휘관입니다.”
그가 감탄했다는듯 엄지를 추켜올리며 뒤로 돌아섰다.
“일정이 빠듯해 서둘러야 하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봅시다.”
버나드는 그대로 입구쪽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기대했던 모습과 전혀 다른 반응이 나오자 멜리사가 크게 당황했다.
“예……? 저, 저, 잠시만요!”
뒤늦게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이미 나가버린 뒤였다.
미련없이 떠난 버나드를 보고 멜리사는 고개를 갸웃하며 헷갈린 표정을 지었다.
“뭐지? 내 생각이 틀렸나……?”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이렇게 가만히 있을때가 아니라 버나드의 속내를 캐봐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가 어디로 향하는지 미행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그래야 버나드를 당길지 밀지 자신의 노선을 확실히 정할 수 있을테니까.
“빨리 그의 생각을 알아야겠어. 쓸데없이 감정 싸움하는거 싫어.”
그녀는 서둘러 사람을 보내 그리아와 카샤를 호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네피카의 쌍둥이 자매가 막사안으로 들어오자 그녀가 즉시 명령했다.
“버나드를 미행해서 그가 어디로 가는지 알아봐.”
명령을 받은 그리아와 카샤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카샤가 좋아하겠네. 그렇지 카샤?”
“난 버나드 경에게 관심이 많아. 그를 따라다니는 게 좋아.”
이윽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버나드가 라벤다를 타고 야영지를 떠났다.
도적 길드라는 개인이 아닌 집단과 싸워야 하는만큼 평소 같이 다니던 데보라를 남겨둔 채 홀로 떠나버렸다.
“갔어.”
“우리도 가볼까.”
버나드가 야영지를 떠나는 모습을 먼 곳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리아와 카샤도 곧바로 말을 몰아 버나드를 은밀히 뒤쫓았다.
그러나 미행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두 사람은 버나드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놀라워.”
“대단해.”
버나드가 탄 말이 원인이었다.
라벤다는 번개처럼 빨랐고, 그리아와 카샤가 탄 말로는 그 속도를 따라잡기가 역부족이었다.
말이 침을 질질 흘리며 혀를 내밀 정도로 빠르게 추적했으나 들판을 달리는 라벤다의 속도는 가히 전광석화와 같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눈앞에서 달리던 버나드는 감쪽같이 사라져버렸고 온통 초록빛으로 물든 드넓은 들판은 언제 누가 다녀갔냐는듯 고요하기 그지 없었다.
“마치 바람 같았어.”
“아니, 바람이었어.”
허탈한 눈빛으로 전방을 바라보던 그리아와 카샤는 쉽게 단념하며 말머리를 돌렸다.
“카샤, 그의 말처럼 그도 침대 위에서 힘이 좋을까?”
“그러지 않겠어? 정력이 강하니 빠르고 힘 좋은 말을 손에 넣을 수 있었겠지.”
“흥미가 돋는걸?”
“건들지마. 그는 내꺼야 그리아.”
두 사람의 키득 대는 웃음 소리가 들판에 울려퍼졌다.
***
한동안 말을 달리던 버나드는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쫓아오던 그리아와 카샤가 보이지 않았다.
무난히 따돌린 모양이다.
“잘했다.”
버나드는 라벤다의 상아색 갈기털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라벤다도 제 주인의 마음을 알았는지 기쁜듯 푸힝 거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속도를 늦추며 한결 여유롭게 달렸다.
곧이어 나타난 작은 강을 따라 하류쪽으로 향했다.
버나드는 스쳐지나가는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며 샤를을 떠올렸다
야영지를 나서기 직전에 잠시 샤를에게 들렸다.
클레어의 요청으로 그녀의 기분을 풀어줄 생각에 방문한 것이엇으나 아쉽게도 그녀와 만나지 못했다.
샤를은 성을 내며 버나드의 독대 요청을 거절했다.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는거야! 꼴도 보기 싫어!”
안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화난 목소리.
숙소안에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문전박대를 당했다.
결국 버나드는 밖에 나와있던 클레어에게 곰 조각상을 전해달라는 말을 건네고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조각상을 보고 나인걸 눈치채면 어쩌지? 걱정이군.”
곰 조각상이 지난날 왕실 정원에서 함께 뛰어놀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아닌지.
자신이, 어린 시절 같이 놀아주던 그때 그 사람이란걸 샤를이 알아챌까봐 은근 걱정되기도 했다.
“열심히 조각하지 말고 대충 깎을걸 그랬나…… 훗, 뭐 괜찮아. 알아채면 어쩔 수 없지.”
버나드가 말 위에서 어깨를 으쓱하며 본인의 조각 실력을 뿌듯해하던 그 시각.
클레어에게서 곰 조각상을 전달받은 샤를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게 곰이라고?”
“네, 버나드 경이 말하길 분명 곰이라고 했습니다.”
샤를은 한번 더 손에 쥔 곰 조각상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정말 곰이야? 만들다만 돼지 조각상이 아니고?”
“제가 보기엔 돼지보다는…… 음…… 뭐랄까…… 무슨 동물인지 특정할 수 없을 정도로 묘한 조각상입니다.”
“정체불명의 조각상이란 거지? 클레어가 보기에도 진짜 못깎았지?”
“꼭 그런건 아닌데……”
“길바닥에서 주워온것 같은 쓰레기 조각상으로 내가 기뻐할줄 알았어? 그 녀석 정말 괘씸하고 성의없어.”
형편없이 만들어진 조각상은 오히려 샤를의 화만 더 돋우었다.
“이딴거 안가져. 갖다 버려.”
샤를은 손에 쥐고 있던 곰 조각상을 클레어에게 던지듯 건네주며 콧김을 씩씩 내뿜었다.
“다른걸로 다시 가져오라고 해.”
다행히도 아직 기회는 남아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