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8
막사에서 버나드를 기다리고 있던 멜리사는 깊은 고민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얼마전 버나드에게 했던 말을 후회하고 있었다.
‘마스터라고 다 같은 마스터는 아니니 우리 백검대 일에는 끼어들지 말았으면 좋겠군요. 샤를리나님을 안전하게 제국까지 모셔다 드리는 일은 내 주도하에 이뤄질겁니다. 그것만 명심하세요.’
그때 그 말을 한게 정말 어리석었다고.
‘불필요한 말을 했어. 내가 왜 그랬지?’
버나드와 며칠 같이 지내본 결과 미셸이 왜 그를 아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버나드는 강하고 영리했다. 상황판단이 빠르고 상황을 지혜롭게 이용할줄 알았다.
앞서 두 차례 큰 위기가 닥쳤을때 그의 활약 덕분에 무난히 헤쳐나올 수 있었다.
‘그의 선택은 항상 좋은 결과를 불러왔어.’
멜리사는 이미 버나드를 인정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인정했냐고 묻는다면, 전부터 서서히 버나드가 남다른 인물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다가, 이번 콜먼 왕자와 싸운것을 기점으로 버나드를 완전히 달리보게 되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는 더 이상 경계해야할 대상이 아니었다.
앞으로 함께 가야할 아군이 되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게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존심을 굽히기는 죽어도 싫다는 것!
그로인해 난관에 봉착했다.
‘지금부터라도 그와 상의해서 모든 일을 추진해 나가고 싶은데 어떻게 제안하면 좋지?’
처음 만났을때부터 사이좋게 지내왔다면 모를까, 그에게 다짜고짜 모든 일은 백검대가 다 할테니 빠지라는 등 첫 단추를 잘못 꿰고 시작하다보니 관계를 바로 잡기가 무척 어려웠다.
“미, 미안해요…… 앞으로 같이 상의해서 일했으면 하는데……”
앞에 버나드가 서 있다고 생각하며 연습삼아 중얼거리던 멜리사는 창피하고 쑥쓰러운 나머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머리를 감싸 쥐고 발을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아악! 도저히 못하겠어!”
심지어 버나드를 자신보다 아랫등급으로 바라보던 그녀였다.
출생 배경이 좋고, 지위도, 돈도, 자라온 환경도, 어느것 하나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평민에서 기사가 된 버나드 보다 자신이 훨씬 우월한 인간이라는 것을 늘 상기하고 다녔다.
그런 상황에 고개를 숙여야 한다니!
마치 상관이 부하에게 머리를 숙이는꼴 아닌가!
죽어도 하기 싫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는 계속 그를 끌어들여야 한다고 떠밀고 있었다.
‘샤를리나님을 무사히 제국까지 모셔다 드릴려면 버나드 경의 도움을 받는편이 좋아. 그게 옳아. 우리를 위해 당연한 일이고.’
멜리사는 엄연히 백검대의 지휘관이다.
만약 그녀가 편협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미셸이 먼저 그녀의 됨됨이를 알아보고 결코 백검대장의 자리에 앉히지 않았을 것이다.
제 아무리 출신배경이 좋다한들 조직을 관리할만한 역량과 도량이 없다면 장차 조직을 쇠퇴시킬게 뻔하니까.
따라서 미셸이 멜리사를 수장의 자리에 앉혔다는 것은 멜리사가 가진 그릇의 크기가 백검대란 조직을 감당할 수 있을만큼 크다고 본 것이다.
미셸의 짐작대로 멜리사는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반성하고 뉘우칠줄 아는 사람이었다.
또한 사적인 감정을 내세우기 보다 조직을 위해, 버나드처럼 얄미운 사람의 노력을 인정하고 그를 받아들일줄 아는 책임감 있고 포용적인 지휘관이었다.
허나, 그녀의 마음이 버나드를 끌어안고 싶어도 쉬이 그러질 못하는 이유는, 최근 버나드는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었고, 그러한 점이 못마땅했다.
자신이 먼저 백검대를 같이 이끌자고 제안하면 왠지 그가 더욱 기고만장해질게 눈에 보여서 그점이 짜증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패배를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패배를 선언한다는건 상대가 뭔짓을 해도 이해하겠다는 암묵적 동의!
자신과의 관계에서 승자인 버나드가 주도권을 쥐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기싸움에서 진 나는 항상 그에게 끌려다니게 되겠지.’
멜리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 자신이 먼저 손을 내미는건 안되겠다.
‘내 체면을 지키면서 그를 끌어들이는 좋은 방법이 어디 없을까……?’
거듭 고민하던 그녀의 머릿속에 마침내 좋은 수가 떠올랐다.
밝게 웃으며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 버나드 경이 먼저 말하도록 상황을 유도하는 거야. 그러면 그와의 관계에서 난 계속 우위에 있을 수 있어!”
때마침 밖에서 버나드가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멜리사는 서둘러 표정을 고쳤다.
“두고 봐, 버나드 경. 반드시 당신의 입에서 같이 일 하자는 말이 나오게 만들테니까.”
***
얼마뒤, 버나드는 멜리사에게 정산을 받았다.
“제 명예를 걸고 말씀드리죠.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저와 똑같이 드렸습니다.”
“굳이 그런 말씀은 안하셔도 됩니다. 믿습니다.”
“행여나 오해하실까봐 그랬죠.”
어딘가 초조해보이는 멜리사의 말에 버나드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금화 500닢.
말 두 필.
5인이 일주일치 먹을 식량.
살아있는 돼지 두 마리.
소금 1kg
후추 200g
이상 버나드가 분배 받은 전리품이었다.
“여기 서명 부탁드려요. 전리품을 지급했다는걸 기록으로 남겨야하니까요.”
“예, 잘 받았습니다.”
서명을 마친 후 버나드는 사람을 보내 데보라와 마크, 율리아를 불렀다.
짐이 많아 혼자서 가지고 가기 힘들었다.
세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멜리사의 막사 밖에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나가기전, 멜리사에게 사흘 정도 자리를 비운다는 말을 전할 생각에 그녀를 돌아보던 참이었다.
초조한 표정으로 실내를 왔다갔다하던 그녀가 우뚝 멈춰서며 먼저 말을 건네왔다.
“저, 버나드 경?”
“네?”
“아, 저…… 그러니까 음……”
그녀가 어색한 미소를 띤 채 물었다.
“같이 다니는 데보라라는 여자와는 애인 사이인가요?”
“……”
버나드는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한다는듯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대답했다.
“네.”
멜리사 역시 자신이 생뚱맞은 질문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려는 버나드를 멈춰세울 생각에 아무렇게나 꺼낸 질문이었기에 어떻게든 이어나가야했다.
“기사 작위를 받기 전에 사겼나 보군요?”
“받은 후 입니다.”
“의외군요. 그녀에게 특별한 매력이 있나보죠? 아, 혹시 큰 가슴이 탐나서?”
버나드는 무심코 웃음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솔직히 데보라의 큰 가슴은 그녀를 좋아하게 만드는 매력 요소중 하나였다.
“그런 여자 만나기 쉽지 않죠.”
“대부분의 기사들은 영주의 딸과 결혼하는 낭만을 꿈꾸며 평민 여자들을 잠자리 상대로만 취급하죠. 잠시 머물다 가는.”
“…하고 싶은 말씀이 뭐죠?”
버나드의 표정이 금세 굳어진걸 알아챈 멜리사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걸 자각했다.
괜히 쓸데없는 말을 꺼내서 분위기만 민망해지자, 당황한 그녀가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힘드네요……”
지친듯, 도움이 필요한 여인처럼 가냘픈 표정을 짓고 그의 눈을 마주봤다.
“요즘 많이 힘들어요.”
“누가요?”
“당연히 저죠.”
“……?”
멜리사는 심장에 손을 얹으며 진솔한 목소리로 고백했다.
“사실, 저 혼자 샤를님을 잘 지킬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요. 샤를님을 무사히 제국으로 모셔다드리고, 제국과 협상해서 레온왕국이 빼앗긴 유물을 되찾는것, 샤를님이 왕좌를 차지할 수 있도록 돕는건 엄청난 사명감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 같아요. 제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요? 이처럼 두려워하고 있는 제가……?”
멜리사는 슬픈 생각을 하며 억지로 눈물을 쥐어짰다.
곧 그녀의 두 눈에 쥐똥만한 눈물이 글썽 거렸다.
‘후후, 눈물은 여자의 무기지. 여자가 흘리는 눈물은 남자로 하여금 무엇이든 들어주게 하는 마법이 담겨있다고 어머니께서 말씀 하셨어.’
주르륵.
간신히 쥐어짜낸 눈물 한방울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멜리사는 애원하는 눈빛으로 버나드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버나드 경…… 당신은 이 두려움을 극복할 방법을 아시나요? 아신다면 부디 저에게도 알려주세요. 흑흑……”
멜리사는 흐느껴 울며 속으로는 사악하게 웃었다.
‘자, 버나드 경. 내 눈물을 보고 당신이 할 말은 딱 하나입니다. 가슴을 떵떵 치면서 날 위해 개처럼 봉사하겠다고 선언하세요! 빨리!’
눈앞에서 우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버나드의 입술이 열렸다.
“경험이 부족하면 책을 많이 읽으면 조금 도움이 됩니다.”
“예……?”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 그의 입에서 튀어 나오자 멜리사는 뒤통수를 세게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게…… 다예요?”
버나드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정 부담이 되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도 방법이겠죠.”
그의 대답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무적이며 지독하게 건조했다.
버나드가 여자를 잘 위로해주는 다정한 사람 같았으면 레아랑 벌써 결혼 했을 것이다.
그의 성격을 모르는 멜리사는 즉시 뒤돌아서며 분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저 사람 뭐야? 내 눈물이 통하지 않아……?’
멜리사는 낙심했으나 이제 시작일뿐이라며 단념하지 않고 다시 의욕을 끌어올렸다.
‘역시 눈물로 호소하는짓 따위는 나한테 맞지 않아. 버나드 경의 애인처럼 청순한 얼굴에 가슴 큰 여자들이 해야 통하겠지. 방법을 바꿔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