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3
백검대 야영지 주변 한적한 산속.
“이거 먹오?”
“좋디.”
“좋아부로?
“웅, 좋디.”
“그럼 이짝은 어떠분디?”
“그것도 좋디.”
“헷갈리게 하지마러 가시나야.”
둘째 샨이 왼손에 들고 있던 새끼 고블린 시체를 무릎을 감싼 자세로 쪼그리고 앉아있던 루 앞에 던졌다.
이어서 오른손에 들고 있던 죽은 뱀 한마리도 루 앞에 내려놓았다.
“잘 보고 다시 골라바라. 어떤게 더 맛있을 것 같오야?”
때마침 정찰을 나갔던 첫째 딘이 돌아왔다.
“둘이 모하는기.”
“아침밥으로 뭘할지 고르고 있제.”
새끼 고블린 시체와 죽은 뱀을 번갈아 내려다보던 루가 산발이 된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둘 다 해먹으면 안되부로?”
“오!”
명답이라는듯 샨이 손뼉을 마주치며 좋아했다.
“그 방법이 있었구마!”
“둘째 오빠는 등신이랑게.”
루가 킥킥 웃었다.
샨은 그 즉시 새끼 고블린 시체와 죽은 뱀을 들고 근처 개울로 가죽을 벗기러 떠났다.
쪼그려 앉아있던 루는 이제 막 돌아오자마자 땅바닥에 드러누워 잠을 청하는 딘을 향해 자갈을 집어 던졌다.
날아간 자갈은 딘의 정강이를 맞추고 밑으로 떨어졌다.
딘이 졸린 눈을 뜨며 루를 쳐다봤다.
“뭔디?”
“마스터울프 보고 싶댜.”
“안된다.”
“왜 안되냐.”
“마스터울프가 말한거 못들은겨? 우리는 눈에 띄지 말고 숨어서 따라다니랬다.”
“싫댜. 마스터울프랑 다니고 싶댜.”
“귀여워 보이려고 말끝마다 댜댜 하지마러라.”
“내 발음이 원래 이런댜.”
“똥 싸지 말아부로.”
루는 바닥의 자갈을 주워 다시 딘한테 던졌다.
“마스터울프 내놔라……!”
그녀가 인상을 쓰며 때를 썼으나 딘은 무시하고 눈을 감았다.
“마스터울프가 이제 아무도 못믿겄다 했시라. 뭐시냐, 구, 군주? 응. 다시는 군주 안모신다 했다. 그래서 지금 같이 다니는 인간들도 수 틀리면 다 죽여버린다잖나. 우리는 그래서 여기 있는거다. 만약을 위해서. 비밀병기처럼.”
“큰 오빠야, 우리가 배신자 왕을 죽이러 가면 안되는기라?”
“니 또라이가. 택도 없는 소리다. 마스터울프가 할 수 있었으면 벌써 했게찌 왜 안하고 있겠는교?”
“왜 안하는디?”
“우리보다 수만배 돈 많은 왕이여, 왕. 왕 주변에 대단한 놈들 많을꺼지라.”
“큰 오빠랑 둘째 오빠보댜 싸움 잘하는 사람 많은기?”
“그건 함 붙어봐야 알겠제.”
“흐음……”
루는 입술에 검지손가락을 대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다시금 외쳤다.
“마스터울프 내놔라!”
“안된다고 몇 번을 말해부로! 니년 머리는 10초마다 리셋되는 기가!”
***
“맛있어……?”
“음, 그럭저럭.”
버나드는 수련에 앞서 인적이 없는 숲속에서 빵을 먹고 있던중이었다.
클레어는 옆에 나란히 앉아 그가 먹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넌 왜 안먹어?”
“난 만드는 것만 좋아해.”
“입이 짧은가 보군.”
버나드는 빵을 남겼다.
클레어가 빵을 만들어줘서 그녀한테 고맙다거나 그녀의 성의를 봐서 다 먹어야한다는 책임감 따위는 없었다.
그저 맛만 평가하기 위해 빵 한개만 집어먹고 그대로 끝냈다.
이윽고 새벽 수련이 끝난 후 자리를 떠나려하자 클레어가 버나드를 붙잡았다.
방금 수련이 끝난 참이라 숨이 찬 탓에 땀으로 얼룩진 그녀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헉, 헉…… 기다려봐. 잠깐 할 얘기가 있어.”
“남은 빵 가져가라고?”
“아니. 그거 말고.”
클레어는 샤를에 대해 이야기했다.
미셸이 떠난 후로 샤를이 매일 운다고.
우울해하고 슬퍼하며 짜증이 심해졌다고.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듣고난 후 버나드는 이마에 손을 갖다대며 탄식을 뱉었다.
“전혀 생각지 못했어. 샤를리나님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 내 잘못이야.”
“샤를님과 만날거야?”
“그래야겠지.”
“언제.”
“오늘 바로. 아침 식사 후가 좋겠지.”
“샤를님의 식사가 끝나면 사람을 보내 알려줄게.”
“응.”
버나드의 대답에 클레어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처음으로 마주한 그녀의 미소였다.
그 모습을 보고 버나드가 아무생각없이 툭 내뱉었다.
“너도 웃을줄 아는구나.”
“응……?”
“웃는 얼굴 처음이라고. 너.”
버나드가 손가락으로 클레어의 얼굴을 가리키자 뒤늦게 무슨뜻인지 알아챈 그녀가 멋쩍어하며 금세 미소를 지웠다.
그후로 입을 꾹 다물었다.
야영지에 도착할때까지 두 사람은 말없이 걷기만 했다.
버나드는 원래 쓸데없이 잡담을 할 성격이 아니었고, 클레어 또한 평소 과묵한 사람이었기에 둘 사이에 대화가 없는 것이 오히려 정상이었다. 둘 다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샤를리나님 식사가 끝나면 연락줘.”
“응.”
“그리고 내일은 빵 같은거 가져오지마. 아침식사도 안했는데 벌써 배부르다.”
“……”
클레어와 헤어진뒤 텐트로 돌아온 버나드는 손에 장작으로 쓰일 예정이던 작은 통나무를 들고 있었다.
동이 트자 텐트 주변은 분주했다.
하녀로 받아들인 율리아가 데보라를 도와 완두콩을 넣은 죽을 끓이고 있었고, 마크는 한켠에 의자를 갖다놓고 더러운 천에다가 아침부터 무언가를 스케치하고 있었다. 그림을 그릴때 쓰는 린넨 천이 워낙 비싸서 마크는 항상 버리는 옷을 크게 찢어 거기다 그림을 그렸다.
“버나드 끝났어? 조금만 기다려~ 누나가 곧 밥줄게~”
모닥불 앞에 쪼그려 앉아 작은 솥에 담긴 죽을 주걱으로 휘젓고 있던 데보라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율리아는 버나드를 발견하자 수건과 양동이를 들고 얼른 달려왔다.
“나리, 세숫물을 떠왔습니다. 땀 많이 흘리셨어요?”
그녀의 살가운 물음에 버나드는 무표정으로 필요한 말만 뱉었다.
“양동이는 거기 놔. 수건은 이리 주고.”
“네, 나리. 혹시 또 필요한거 있으세요?”
율리아는 싹싹하게 일을 잘했다.
그도 그럴것이 그녀의 눈빛에 버나드에게 꾸중을 들을까봐 두려운 기색이 엿보였다.
그녀를 한 사람이 아닌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정말 하녀처럼 대하는 버나드였기에, 율리아는 항상 버나드 앞에 서면 긴장을 했다.
율리아의 앞에서만큼은 위엄있는 귀족처럼 행세하는 버나드의 분위기에 위축되다보니 절로 공손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게다가 버나드는 언제든지 그녀의 몸을 취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주인이었다.
심지어 기분이 틀어지면 자신에게 인생이 구속된 그녀를 죽일 수도 있었다.
물론 버나드의 성격상 하녀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일을 못한다며 죽일일은 없다. 다만 자신과 동등하게 살 자격이 없는 아랫사람으로 취급하며 관심이 없고 무뚝뚝할 뿐이지.
“필요한게 있으면 부를게. 데보라나 도와줘.”
“네.”
율리아에게 확실히 선을 긋는 버나드의 주인다운 행동은 데보라를 안심시키기에 충분했고, 그렇기에 데보라는 자신보다 나이 어린 계집이 연인인 버나드의 시중을 들고 그 앞에서 엉덩이를 흔들고 다녀도 별말을 안했다
되레 어린 나이에 종속 하녀가된 율리아를 측은하게 여기며 여동생처럼 잘 대해주었다.
율리아도 그녀를 편하게 대했다.
“율리아, 일로와서 간 좀 봐줘~”
“언니, 다 됐어요?”
“응, 한번 맛 봐봐.”
“으음. 와, 맛있어요.”
세수를 끝마친 버나드는 라벤다의 곁으로 가서 곱고 풍성하게 자란 상아색 갈기를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아까 가져온 작은 통나무를 바라봤다.
“조각을 안한지 꽤 됐는데 잘 되려나……”
우울증에 걸렸다는 샤를을 달래기위해 주워온 것이었다.
수년전, 어린 샤를과 왕궁의 정원에서 비밀리에 만나 놀던 시절.
그때 샤를이 삐치거나 슬퍼할때, 나무조각을 깎아서 짐승이나 꽃 같은 것을 만들어주면 언제 화를내고 슬퍼했냐는듯 곧장 환한 웃음을 터뜨리며 무척이나 좋아라했었다.
샤를에게 그럴듯한 위로의 말을 건네줄 자신은 없고,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그녀가 좋아할만한 선물을 주는 것뿐이었다.
“도움이 되면 좋겠는데.”
버나드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작은 통나무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낸 다음에, 조각칼이 없는 이상 급한대로 단검을 쥐고 바위에 기대앉아 나무조각을 깎기 시작했다.
자칭 조각 장인. 옛날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것 마냥 버나드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서걱.
서걱.
조각칼이 없던 까닭에 세밀한 조각상을 만들 생각은 없었고, 덩치 큰 곰을 떠올리며 대충 곰 모양만이라도 낼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정직한 곰 모양은 아니고 해학을 부여해 곰의 맹수성을 거세하고 샤를이 친근감을 느낄 수 있도록 귀엽게 웃는 곰을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찬란했던 검술 실력을 잃으며 조각 실력까지 덩달아 떨어진게 원인인지 아니면 도구가 형편없어서인지, 버나드는 이내 손을 베이고 말았다.
“아얏.”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단검에 베인 손가락에서 피가 흘러나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버나드는 곧 허탈하게 웃었다.
“조각 실력이 형편없으니 오히려 잘됐네. 샤를이 나인줄 모를것 아니야.”
죽이 완성되자 다 같이 둘러앉아 아침식사를 했다.
멜라니아는 아직도 텐트속에 처박혀 있었다.
입구가 닫혀있어 자는지 뭐하는지 모르겠다.
“아휴, 아침부터 그림 그렸더니 팔 아파.”
옆자리에 앉은 마크가 죽을 떠먹으며 투덜거리길래 버나드가 물었다.
“뭘 그렸는데?”
“그거, 괴물.”
“괴물? 무슨 괴물.”
“상자속에 들어있는 괴물 몰라? 어어엄청나게 큰거.”
“……?”
버나드가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을 짓자 마크가 왜 모르냐며 가슴을 치더니 밥 먹느라 잠시 뒤에 놔두었던 그림을 집어들고 보여줬다.
“이거 인마. 이거 몰라?”
길다란 주둥이와 긴 꼬리, 납작한 몸통에 네 발이 달린 괴물이 그려져 있었다.
괴물의 가죽은 마치 드래곤의 비늘처럼 생겼다.
“할머니가 말 안해줬어?”
“안해줬는데?”
“헉, 진짜!? 저번에 주워온 보물상자 속에 글쎄 이놈이 들어있는거야. 진짜 무서웠어! 내가 직접 들어갔다왔다니깐? 저 할머니 때문에!”
버나드는 즉시 그릇을 바닥에 놔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텐트쪽으로 향했다.
입구의 천을 열어젖힌뒤 허리를 숙이고 안을 들여다봤다.
젊은 여자, 그러니까 멜라니아가 옆으로 누운 채 나른한 표정으로 담뱃대를 태우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와주길 기다렸다는듯 버나드와 눈을 맞추며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거래할때가 온거 같은데, 우리 거래할까?”
“무슨 거래.”
“서로 좋은 거래지. 늑대도 좋고 나도 좋고.”
“당신이 걸건 뭔데.”
“저 상자속의 괴물을 주마.”
버나드는 텐트 구석에 놓여있는 상자를 힐끔 쳐다본뒤 다시 멜라니아를 바라봤다.
“저건 원래 내거였어.”
“내 말은 꺼내준다는 소리니라. 내 도움없이 저렇게 크고 무서운 괴물을 혼자 꺼낼 수 있을까?”
“……”
버나드는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당신이 원하는건?”
“난 뭐 별것 없느니라.”
그녀가 붉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늑대의 정액이면 족해. 아주 잘 팔리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