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1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2 (101/200)



〈 101화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2

또 레아의 꿈을 꿨다.
심한 부상을 당한채로 그녀와 처음만나, 그녀가 살던 산속 동굴에서 몇주간 함께 지내며, 강한체력과 더불어 동물적인 감각을 가진 레아의 자질과 가능성을 엿본 버나드는 생명을 구해준 보답겸 그녀에게 인간의 언어와 검술을 가르쳐주었다.

“헤……”

꿈속에서 레아는 순진무구한 아이 그 자체였다.
동물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그 어떤 힘든 훈련이라도 땀을 뻘뻘 흘리며 잘 따라왔다.

버나드는 때묻지 않은 그녀의 표정이 사랑스러웠다.
그녀를 속세로 데려가고 싶은 욕심이 나날이 커져갔다.

하지만 그래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몸 담은 곳은 늘 피를 묻히고 살아야하는 곳.
순수한 레아를 물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후 건강을 회복한 버나드가 홀로 떠나려 하자 레아가 펑펑 눈물을 쏟았다.
그간 정이 많이 들었던 모양이다.
더욱이 맨날 짐승들과 살다가 처음으로 자신과 비슷한 생김새의 버나드를 만나 기뻤던게 분명했다.

“같이 가자.”

결국 버나드는 우는 레아의 손을 잡아주며 그녀를 세상밖으로 데리고 나가기로 결심했다.
그녀에게 연정을 품었다기 보다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그녀를 썩히기에는 아깝다는 마음이  컸던 그였다.

“벼냐듀 고우마어!”

레아가 크게 기뻐하며 활짝 웃었다.
당시 눈물을 글썽이던 그녀의 미소가 너무나 아름다웠기에 버나드는 그날 그녀의 미소를 지금까지 잊지 못했고 앞으로도 잊을  없을터였다.

그렇게 기뻐하는 레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신도 흐뭇하게 미소짓다 눈이 떠졌다.

“아…… 옛날일이었나.”

꿈이었다는걸 깨닫고 버나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꿈속에 레아가 나오면 그 꿈은 행복한 꿈인가 아니면 슬픈 꿈인가……”

레아는 이제 자신의 곁에 없다.
꿈을 꿀때만해도 행복했는데, 깨고나니 슬픔으로 가슴이 답답했다.

“그리워.”

아무래도 오늘 반나절 정도는 계속 생각날듯하다.
계속 꿈속의 레아가 떠올라서 마음이 침울할 것 같다.

“그녀와 함께 보낸 시절을 떠올리면 즐겁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마치 저주 같아…… 늘 짊어지고 다녀야 하는 저주……”

야외 잠자리에서 상체를 일으켜 세운 채 멍하니 중얼거리고 있는데, 옆에서 자고 있던 데보라가 불쑥 잠꼬대를 했다.

“으응, 버나드…… 거긴 안돼…… 으응, 아, 아응……”

자면서 행복한 표정을 짓는 그녀.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버나드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데보라……”

원래 그녀의 잠자리는 텐트속이었지만 최근 율리아가 하녀로 들어오면서 데보라가 그녀를 핑계삼아 율리아를 텐트속으로 보내 멜라니아와 함께 자게 하고 자신은 밖으로 나와 버나드의 옆을 차지했다.
그런 데보라의 행동을 오빠인 마크는 별 생각없이 받아들였다.

“밖에서 자면 추울텐데. 뭐, 알아서 해.”

마크는 버나드의 첫인상이 작은 꼬마여서인지 키가 자란 지금도 꼬마 취급을 했다.
데보라가 버나드와 함께 다녀도 그냥 다 큰 누나와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애라고 보는 것 같았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데보라가 버나드 옆에 찰싹 붙어서 자도 마크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여동생이 버나드와 사귀고 있다는 것을 알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부스럭.
잠든 데보라의 머릿결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사이 문득 뒤쪽에서 발소리가 났다.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새벽.
두 다리를 뻗고 앉아있던 버나드가 뒤를 돌아보자 그 앞에 훈련복을 갖춰입은 클레어가  있었다.
그녀의 양손에는 목검이 하나씩 쥐어져 있다.

“약속시간이야……”
“응.”

버나드는 데보라의 이불을 목까지 덮어준뒤 기다렸다는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기지개를 켰다.

“피곤할텐데 일찍 일어났네. 원래 잠이 없나봐?”
“약속했으니까……”

콜먼과 그의 기사들을 박살낸지 벌써 3일이 지났다.
멜리사는 콜먼 덕분에 많은 돈과 무기  식량을 거둬들였고 당분간 여행 경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거기에 사로잡았던 포로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무구나 소지금을 대가로 받고 모두 풀어주었다.
노예나 하인들은 샤를의 자애와 아량을 널리 알릴겸 대가없이 풀어주었으며, 개중에서 대장장이나 목수, 요리사  숙련된 기술자들은 모두 고용해서 함께 여행길에 올랐다.

그리하여 동쪽으로 이동한지 삼일째 되는 오늘.
오늘 역시 오전부터 지루한 행군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클레어가 수련을 하려면 모두가 자는 새벽 밖에 시간이 나질 않았다.
그렇기에 잠을 줄이고 버나드를 찾아온 것이었다.

버나드는 이른 새벽부터 찾아온 그녀의 의지를 거절하지 않았다.
애당초 본인이 먼저 제안한 일이었으니까.
피곤해도 그녀를  가르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게다가……
클레어를 보면 왠지 모르게 레아가 떠올랐다.
레아를 처음 가르쳤을때가 딱 지금 클레어의 나이였다.
물론 레아는 엘프라서 인간에 비해 나이가 많고 성장속도도 달랐지만, 당시 겉모습만큼은 지금 클레어처럼 10대 후반의 싱그러운 소녀였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버나드가 먼저 클레어에게 손을 내민 이유는.
클레어를 가르치며 레아와 함께 보낸 시절을 곱씹고 싶어서.
본인의 외로운 기분을 위로 받고자 클레어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고 현실의 결핍을 채우려는게 그의 본심이었다.
그도 그런 욕심을 부정하지 않았다.

‘클레어를 레아처럼 키울 수 있을까?’

레아처럼 키워서 데리고 다니고 싶다고.
주제 넘은 생각을 하는 그였다.
어차피 헛된 상상임을 버나드도 잘 알고 있었다.
금세 불순한 마음을 접고 저 멀리 던져버렸다.

‘그 시절을 흉내내는 것만으로도 좋아.’

버나드는 클레어를 데리고 숲속으로 향했다.
클레어는 말없이 뒤따라왔다.
적당한 공터가 나오자 그곳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기본적인건 이미 다 알고 있을거야.”

버나드는 목검을 쥐고 곧바로 기술 하나를 멋드러지게 선보였다.
그의 동작은 빠르고 유연했고, 경쾌하면서 힘이 넘쳤다.
그가 움직일때마다 바람이 불고 머리위에서 나뭇잎들이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잠자코 지켜보던 클레어의 눈동자가 저도 모르게 커졌다.

‘역시 버나드는 나보다 강해……’

이윽고 제자리에 우뚝 선 버나드가 목검을 내리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병사의 축제 라는 기술이지. 지금 네게 필요한건 필살기야. 결정적인 한방으로 싸움을 끝낼 수 있어야 해.”

버나드가 보여준 기술이 대단했지만 클레어는 우선 다른걸 먼저 이루고 싶었다.

“난 검기를 다루는게 능숙하지 못해. 목검에 검기를 실을 수 있을 정도로 잘 하고 싶어.”
“그건 나중에.”

버나드의 대답은 간결했다.

“우선 병사의 축제부터 익혀.”
“그 뒤에 알려줄거야?”
“완벽히 터득하면.”
“알았어.”

클레어는 의욕을 불태우며 목검을 쥐고 버나드 옆에 섰다.

“찌르기 부터 들어간다.”
“응.”
“이때 칼날의 방향은 약간 아래쪽으로 비스듬히 둬야해. 상대를 속이기 쉽지.”

버나드는 그녀에게 검의 파지법과 연계동작을 말로 설명해준뒤, 한동작 한동작 그녀에게 시키며 자세를 교정해주고 각종 세세한 요령을 알려주었다.
천재검사 소리를 듣는 클레어였기에 허둥대거나 어리바리대는 모습은 없었다.
그녀는 거뜬히 동작을 소화해내며 버나드의 가르침을 잘 따라와주었다.
첫날은 그렇게 자세를 교정해주다 끝이났다.

다음날, 어제 하루종일 동쪽으로 이동을 했기에 두 사람은 이른 새벽 어제와 다른 장소에 서 있었다.
암벽으로 둘러진 조용한 산밑이었다.

“날 적으로 생각하고 공격해봐.”
“응.”

버나드는 그녀와 몇차례 칼을 주고받다 일부러 빈틈을 드러냈다.
클레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어제 배운대로 ‘병사의 축제’를 시전했다.
찌르기! 베기! 찌르기! 찌르기! 돌아서는척 다시 찔렀다 위로 올리기! 마지막으로 파괴적인 힘이 실린 공격까지!

클레어는 유연하고 순발력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 부족했다.
버나드는 그녀의 공격을 손쉽게 막아내거나 가벼이 흘려버렸다.

“멀었어.”
“알아.”

클레어가 분한듯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다음날 이른새벽에도 훈련은 계속 되었다.
연일 반복되는 낮의 행군으로 새벽에 일어나는게 많이 피곤했으나 클레어는 끈기있게 오늘도 버나드를 찾아왔다.

그런데 그녀의 손에 못보던 물건이 쥐어져있다.
바로  구워진 빵이 담긴 바구니였다.

“냄새 좋다.”

막 잠자리에서 일어난 버나드가 눈을 비비며 물었다.

“왠 빵이야?”
“난 스트레스를 받으면 빵을 만들어. 빵 만들면 마음이 진정돼.”
“별난 취미네.”
“버리기 아까워서 가져왔어. 먹어……?”

클레어가 조심스럽게 의사를 묻자 버나드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조금 먹어보고 맛있으면.”
“맛 없으면……?”
“안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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