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되찾는 노력, 수련64
샤를과 콜먼의 말다툼을 기점으로 양측진영이 첨예한 대치상태에 돌입했다.
멜리사는 콜먼이 적당히 화만 내고 무력충돌없이 원래 가던길을 가주길 내심 바라며 저쪽의 오해를 살만한 특별한 군사행동없이 조심히 대응했으나 안타깝게도 콜먼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다음날, 상대진영의 종자들이 야영지 근처까지 몰려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다양한 욕설을 퍼부었다.
단순 욕설도 아니고 비아냥도 아닌 모욕을 넘어 천박함이 극에 달했다.
“샤를은 사실 프레드릭왕의 핏줄이 아니라 미셸이 마부한테 강간당해서 낳은 딸이라더군! 하하하!”
백검대측은 분노가 치밀었으나 부화뇌동하지 않고 계속 침묵을 지키며 대응을 자제했다.
물론 화를 표출하는 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멜리사님! 이대로 지켜보기만 하실겁니까!”
“당장 울타리 밖으로 나가서 저것들을 아작냅시다!”
“지금 이쪽에서 움직이면 영락없이 저들의 술책에 걸리고 만다. 추이를 더 지켜보자. 양쪽의 힘이 비등비등한 상황에 먼저 공격하는 쪽이 불리해. 그 점을 저들도 잘 알고 있을거야.”
바깥을 둘러보던 멜리사는 속만 태우며 자신의 막사로 돌아왔다.
그날 오후에도 또 한차례 상대진영의 종자들이 근처까지 다가와 심한 욕설을 퍼부어댔다.
“샤를 이 갈보년아! 니 보지구멍을 내 좆물로 꽉 채워주마! 어서 이리 나오너라! 내 우람한 좆을 보라구!”
종자 한 명이 바짓가랑이를 내리고 성기를 꺼내려하자 그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던 멜리사가 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이를 갈았다.
“괘씸한 놈들 같으니……! 두고 보자!”
그녀는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막사로 향했다.
실내에 들어서자 부관 러즈반이 기다리고 있었다.
“보고 드릴 사항이 두 가지 있습니다.”
“말해.”
“첫째, 탐색 결과 3왕자 진영에는 타이탄 등급의 기사가 대략 여섯명정도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멜리사가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며 혀를 찼다.
“우리의 두배군.”
“네.”
타이탄 등급의 기사라 함은 제 아무리 돈 많은 귀족이라 할지라도 손에 넣기 힘든 최고가, 최상의 품질을 자랑하는 장비로 완전무장을 갖춘 기사를 일컫는다.
탄탄한 방어력과 강력한 공격력을 자랑하는 타이탄 기사 한명은 마치 이동하는 요새나 마찬가지였다.
일반 기사 열명이 동시에 달려들어도 타이탄 기사 한명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 힘이 막강했다.
“다음.”
“둘째, 방금 3왕자측이 보낸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러즈반이 돌돌 말린 양피지 두루마리를 건넸다.
멜리사는 한중간에 걸린 매듭을 풀고 빠르게 읽어내려갔다.
이윽고 그녀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미쳤군.”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샤를리나님이 알몸으로 우리 진영에서부터 저쪽 진영까지 두 번 왕복하면 사과를 받아들이고 떠나겠다지 뭐야. 나원참, 애당초 우리 샤를리나님께서 뭘 잘못했다고 지들이 사과하라마라야.”
그 말을 들은 러즈반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큰 손해없이 떠날수만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게 없지요. 잠시 밖에 나갔다올테니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뭐하려고?”
“우리를 따라다니는 창녀들중에 샤를리나님과 비슷한 체격과 머리색을 가진 여자를 본것 같아서 말입니다.”
창녀들은 봉급을 받는 기사들을 상대로 영업하는 것을 좋아했고, 평소에 가게에서 생활하다가 부대가 이동하는 모습을 발견하면 좋다고 따라와 며칠간 동행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와 같이 백검대 안에도 며칠전 들른 마을에서 만난 창녀 무리들이 머물던 중이었다.
얼마뒤 러즈반이 돌아왔다.
그 옆에 앳된 얼굴의 금발 소녀가 서 있었다.
“어떻습니까?”
“얼굴이 비슷하군.”
멜리사는 꼼꼼이 관찰한 후 소녀를 돌려보냈다.
다시금 러즈반과 단 둘이 이야기했다.
“저 아이를 발가벗겨서 내보내심이 어떻습니까? 샤를리나님과 얼굴도 비슷해서 몰라볼겁니다.”
“3왕자가 샤를리나님의 얼굴을 봤으니 들통날수도 있어. 멜라니아란 마녀가 얼굴을 바꾸는 마법을 알면 좋겠군.”
“마녀라면 가능할겁니다.”
“알았어, 저 창녀를 대역으로 내세우는 것을 두 번째 방안으로 생각해보지. 우선은 3왕자 바로 밑의 권력자와 만나서 이야기를 해봐야겠어. 원래 싸움이란건 당사자 간에 못풀면 주변 사람들이 나서서 해결할 수도 있는 법이니까.”
콜먼과의 만남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후 대치상태가 계속되자 샤를도 마냥 편할리가 없었다.
침대 위에서 베개를 꼭 끌어안은 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중인지 걱정하고 있던 샤를은 클레어를 멜리사에게 보내 보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괜히 화냈나……’
성질이 나는 바람에 제멋대로 행동한 것이 이렇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줄은 꿈에도 몰랐다.
집에서는 제멋대로 굴어도 끽해야 엄마인 미셸한테 혼나면 끝이었는데, 지금은 달랐다.
자신의 철부지 같은 행동으로 인해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이고 자신을 포함 여러 사람이 죽을지도 몰랐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당황스럽고 무서웠다.
이윽고 클레어가 돌아왔다.
“강한 힘을 가진 두 세력끼리 맞붙어 봐야 누가 이기든 양측 다 큰 손실을 입을 것을 서로가 알고 있다합니다. 따라서 상호공멸을 하기보다는 우리쪽과 저쪽의 서열 2위들끼리 만나서 대화를 할 생각인가봅니다.”
싸움이 아닌 대화란 말에 샤를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우리쪽은 그럼 멜리사가 나가는거야?”
“네.”
“저쪽도 만나겠데?”
“그건 아직 모르겠습니다. 멜리사 경이 만나자는 서신을 곧 보낼 모양입니다.”
샤를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으면 좋겠다.”
다음부터는 중요한 인물과 만날때는 성질을 좀 죽여야겠다고 다짐하는 그녀였다.
***
“저쪽에서 회담을 거절했습니다.”
러즈반이 달갑지 않은 소식을 들고 찾아왔다.
“내일 오전까지 샤를리나님이 알몸 행진을 하지 않으면 오후부터 전면전에 돌입하겠다고 강경하게 나왔습니다.”
“막 나가겠다는거야? 저들은 머리가 없나? 다 죽고 싶어서 그래?”
멜리사가 투덜대는 와중에 러즈반이 조심스레 말했다.
“창녀를 준비할까요?”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안되겠어.”
멜리사가 작심한듯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저쪽이 끝을 보겠다면 기꺼이 받아주겠어. 우리는 전쟁터에서 죽는걸 영광으로 아는 기사들이야. 창녀 같은 잔꾀는 필요없어. 우리의 명예와 품격을 떨어뜨릴 뿐이지.”
러즈반을 돌아봤다.
“모두에게 돌발사태에 대비한 즉응태세를 갖추라 일러. 언제든지 바로 무기를 들고 뛰쳐나갈 수 있도록.”
“네.”
러즈반이 떠난지 얼마되지 않아 부하 한명이 뜻밖의 소식을 가지고 왔다.
“버나드 경이 돌아왔습니다!”
“버나드 경이?”
멜리사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와서 나타나봤자 뭘하겠다고……”
적과 협상이 진행되는 중이면 모를까 전투를 눈앞에 두고 있는 마당에 그의 존재가 성가시게 느껴졌다.
쓸데없이 나서서 간섭하면 지휘에 방해가 될테니까.
선장은 한명이면 충분했다.
“여기 올 필요 없으니 푹 쉬라고 해.”
“그, 그게, 샤를리나님한테 인사도 하지 않고 곧장 이리로 오는중입니다.”
“뭐?”
“내가 없는 동안 큰일이 생겼다고 들었습니다.”
갑자기 버나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그가 입구의 천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오는중이었다.
“보아하니 내 도움이 필요해보이는군요.”
턱을 뒤덮을 정도로 짧은 수염이 자라고 꽁지머리를 한 버나드를 보고 멜리사가 인상을 확 구겼다.
원래 그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으나 기존과 달라진 머리스타일과 턱수염 등 야생미 넘치는 그의 외모가 너무 잘 어울려서 더욱 꼴보기 싫었다.
“누가요? 누가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한댔죠?”
그녀는 쌀쌀맞게 말을 뱉고나서 이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안으로 들어와 자신의 눈앞에 선 버나드의 모습이 왠지…… 전보다 어려보였달까?
나흘전만해도 어깨가 떡 벌어져 듬직하고 잘생긴 청년이었던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살짝 앳되어보이고 키도 좀 작아진 것 같다.
얼굴 하나는 더 높던 그의 키가 지금은 조금 높은 정도.
청년은 청년인데 아무리 봐도 십대 후반쯤으로 보인다.
‘어떻게 된거지? 전에 마녀의 저주에 걸렸다더니 또 그건가? 볼때마다 사람이 바뀌니 정말 별난사람이야.’
아무튼 생각은 거기서 멈췄다.
자신이 상관할바가 아니라며 하던 얘기를 계속했다.
“여기 일은 나한테 맡기고 당신은 숙소로 가서 쉬세요. 이제 막 온 사람이 뭘 알겠어요.”
“아까 이곳에 오다 우연히 마주친 벗들에게 사정은 대충 전해들었습니다. 콜먼 왕자가 샤를리나님을 위협한다죠?”
“그래서요?”
멜리사는 대화를 나누기 싫다는듯이 퉁명스러웠다.
그럼에도 버나드는 차분했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유지했다.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그들이 우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해왔고, 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내일 전투를 벌일 계획이에요. 됐나요?”
“그렇군요.”
버나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별말을 하지 않자 멜리사는 오히려 그런 그의 태도가 더욱 불쾌했다.
“다 안다는듯한 얼굴 하지 말고 할말이 있으면 해봐요.”
버나드는 여유롭게 그녀를 바라봤다.
“내가 밤의 늑대들에 있을때, 우리 조직의 주된 임무중 하나는 전쟁을 막는 일이었습니다. 적대세력에 의한 전쟁을 억제하는 것, 전쟁이 발발할지라도 빠르게 원인을 제거하여 전쟁 기간을 단축시키는 것, 위협적인 세력이 등장했을시 이 두 가지를 최우선으로 생각했죠.”
멜리사가 팔짱을 끼며 피식 웃었다.
“전쟁을 초래한 날 어리석다고 말하고 싶은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하십시오. 당신의 결정을 존중합니다. 대신 나는 나만의 방식대로 문제를 풀겠습니다. 어차피 나와 상의해서 이 문제를 풀 생각은 없었을테죠?”
“어머, 참 똑똑하셔라.”
그녀가 빈정댔다.
“그래서 잘나신 분은 눈앞에 마주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묘안을 갖고 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버나드는 한결 같았다.
그녀가 뭐라고 하든 너그러이 감싸안듯이 그녀를 대했다.
마치 거센 바람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백전노장처럼.
“윗분들께 문제가 생기면 그걸 해결하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입니다. 참 골치 아프죠.”
“그 말은 동감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난 이런 일을 수도 없이 겪어봤습니다.”
“그 젊은 나이에?”
버나드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간단히 해결하는 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 일 역시 굳이 전쟁까지 갈 필요가 없죠. 단언컨대 내일 전투는 없을 것입니다.”
멜리사가 미간을 좁히며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이 상황에 허세부릴거예요?”
“작전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때마침 운좋게도 좋은 도구들이 우리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죠.”
“무슨 소리죠?”
“유령들이 콜먼 왕자를 죽이러 갔습니다.”
그 엉뚱한 말에 멜리사가 기가찬 표정을 지었다.
“농담하지 말아요. 며칠 다른 곳에 있다오더니 헛소리만 늘었군요.”
“말씀드렸다시피 나는 늘 하던대로 전쟁을 억제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할 뿐입니다. 잠시뒤 반가운 소식이 들려오겠죠.”
그제야 그녀가 난해한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맙소사! 설마 암살자를 보낸건가요?”
버나드가 비릿하게 웃어보였다.
“자타공인 우리 왕국 최고의 암살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