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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6화 〉되찾는 노력, 수련63 (96/200)



〈 96화 〉되찾는 노력, 수련63

“3왕자측으로부터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줘봐.”

젊은 부관이 멜리사에게 돌돌 말린 양피지 두루마리를 건넸다.
그렇지 않아도 백검대측도 3왕자 일행을 의식하고 고민하던 차였다.
일찍이 멜리사는 샤를을 찾아가 3왕자와 잠깐 만나 인사라도 나누는게 어떻겠냐며 건의했으나 단숨에 묵살당했다.
이유는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것이었다.

현재 샤를은 화가 나있고, 우울하고, 모든 일을 가신들에게 떠넘긴 채, 하루종일 숙소에서 나오지 않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로인해 모든 일을 멜리사가 단독으로 처리해야만 했다.
다른 일들은 그녀 혼자서 결정한다 치더라도, 샤를의 배다른 형제자매들인 3왕자를 상대하는 일만큼은 샤를이 직접해야한다고 생각해 3왕자측에 연락하기를 망설이던 차에 때마침 3왕자쪽에서 먼저 서신을 보내왔다.
뭐라고 적혀있을까 궁금해 다급한 마음으로 서신을 펼쳐 읽어내려갔다.
이윽고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젊은 부관, 러즈반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답신을 보내는 일이면 어찌해보겠는데, 저쪽에서 만나자는군.”
“아…… 지금 샤를리나님의 상태로는 아마도 거절하시겠군요.”
“정찰에 의하면 3왕자쪽 병력이 우리보다 많고 강해.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봐야 좋을게 없어. 잠깐 만나 인사만 하고 서로 좋게 헤어지면 그뿐인 일을 괜히 어렵게 만들 수야 없지.”

멜리사는 서신을 책상위에 던져놓고 서둘러 외투를 챙겨입었다.

“당장 샤를리나님을 만나봐야겠어. 애도 아니고 떼쓰는 것도 어지간히 하셔야지.”

그녀는 곧장 샤를의 막사를 찾았다.
입구를 클레어가 지키고 있었다.

“샤를리나님을 뵈러 왔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3왕자쪽에서 교분을 맺자는 연락이 왔다고 전해드려. 정말 중요한 일이야. 꼭 참석하셔야한다고 강조해.”
“네.”

잠시  클레어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

“몸이 아파 걷는 것조차 힘들다고 하십니다. 쉬고 싶으시다고……”

멜리사는 클레어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막사 입구를 바라보며 크게 외쳤다.

“샤를리나님! 샤를리나님께서 어떠한 제스쳐도 없으시면 3왕자께서 자신을 무시했다고 불쾌하게 여길지도 모를일입니다! 그러면 여행 내내  분 사이에 불편한 기류가 형성되어  여파가 밑에 사람들에게까지 전해지며 심하면 양측간 싸움이 벌어질 가능성도 높습니다! 잠깐만이라도 3왕자를 만나시어 덕담이라도 한마디 해주시고 헤어지십시오! 그게 귀족간 예의이고, 예의범절만 잘 지켜도 앞으로 남은 여정에 불필요한 마찰없이 여행길이 더욱 순탄해질 것입니다! 소신의 간곡한 청입니다!”

후련하게 말을 뱉은뒤 잠시 기다려보았다.
곧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입구의 천이 젖혀지며 잠옷을 입은 샤를이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잠깐이면 되는거지?”

멜리사가 고마운 나머지 환하게 미소지었다.

“네. 잠깐만 만나면 됩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양진영의 한중간에 자리잡은 들판에 식탁 하나와 의자  개가 덩그러니 차려졌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식탁보 위에 맛있는 음식들이 놓여 있었고, 샤를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이복오빠인 콜먼과 생애처음으로 마주했다.
몇달전 왕궁에 이복형제자매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적이 있었으나 샤를은 아무 관심없이 그들을 대충 둘러봤을뿐 딱히 눈여겨본 사람이 없었기에 그녀는 오늘 콜먼을 처음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름다운 드레스 차림의 샤를이 허리를 살짝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킨테 가문의 후계자 샤를리나입니다.”
“오, 나의 동생 샤를. 만나서 반갑구나.”

콜먼은 활짝 웃으며 살갑게 맞이했던 반면에 샤를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딱딱하게 인사를 건넸다.
억지로 이 자리에 나온 까닭에 짜증난 그녀의 심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러나 현재 콜먼의 눈에는 그녀의 굳은 표정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하나하나 뜯어보느라 정신이 없는 그였다.

‘과연 제 엄마를 닮아 예쁘군. 빨리 침대로 가고 싶어! 쓰읍!’

샤를의 가느다란 허벅지를 쓰다듬고 싶은 욕구를 짓누르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앉을까?”

샤를은 언뜻 드러난 그의 음흉한 눈길을 알아채고 불쾌히 여겼다.
절로 인상이 구겨지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고 식탁에 앉았다.
콜먼은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하인들이 고생  했겠군. 맛있어 보이는구나. 많이 먹으렴.”

성욕과 식욕을 동시에 느끼며 빠르게 칼과 포크를 집어든 콜먼에 비해 샤를은 자리에 앉은 채 가만히만 있었다.
입안에 든 음식을 우걱우걱 씹어먹던 콜먼이 그 모습을 이상히 여기며 물었다.

“왜 안먹니? 입맛에 맞는게 없어?”

그러자 샤를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배불러요.”
“배불러?”
“네. 아까 여기 오기전에 과자를 좀 먹었더니 배가부르네요.”

그 말로 인해 자리가 금세 처음보다 더 어색해졌다.
콜먼은 즉시 칼과 포크를 내려놓으며 물수건으로 입술을 닦았다.
그렇게 식사를 그만두고 밝게 웃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샤를,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지 않았니?”
“샤를이라고 줄여서 부르지 말아주셨으면 좋겠네요. 샤를리나 라고 제대로 불러주세요.”

샤를의 차가운 말대꾸에 콜먼의 얼굴이 단숨에 차갑게 굳었다.
원래 콜먼의 성질도 보통이 아니었기에 샤를의 쌀쌀맞은 태도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만한 아량따위는 그에게 눈곱만치도 없었다.

사실 여기오기 전, 그의 참모인 플레오스가 작전을 위해 샤를의 환심을 사는게 먼저라고 콜먼에게 신신당부를 했으나 콜먼은 그것을 까마득히 잊고 이내 화가 치밀었다.
곧바로 그의 본색이 드러났다.

“그럼 넌 이 오빠를 향해 왕님이라고 불러주렴. 차기 왕은 내가 될게 뻔하니까.”

샤를이 팔짱을 끼며 코웃음을 쳤다.

“왕이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형제자매들중에 나 말고 왕이될 자가 누가 있겠어?”

콜먼이 두 팔을 벌리며 자랑스럽게 대꾸하자 샤를이 즉시 맞받아쳤다.

“바로 나죠. 내가 왕이 될거예요.”

솔직히 샤를은 왕이 되고 싶은 마음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냥 눈앞의 콜먼이 짜증 났고, 자신을 방치중인 버나드가 짜증 났고, 지금  자리가 짜증이 났다.
콜먼이 하도 마음에 안들게 행동을 하다보니 순간  망쳐버리고 싶은 생각이 벌컥 들었을뿐이다.

“허튼 소리야.”

콜먼이 괘씸하다는 얼굴로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 숨소리와 냄새가 상당히 불쾌하다는듯 샤를은 대놓고 손으로 코와 입을 가리며 말없이 인상을 찡그렸다.
누가 프레드릭왕의 핏줄을 물려받은 자식들 아니랄까봐 서로 성격이 똑같았다.
지지 않겠다는듯이 서로를 노려봤다.

“네 어머니는 한때 왕비였으나 왕비 자격이 박탈되어 역사서에 첩으로만 나올뿐 왕비로 기록되지도 않지. 네가 여왕이 되면 역사의 오점이 될거다. 정통성 없는 첩의 자식이 왕좌를 물려받는 꼴이니까.”

노골적인 비아냥이 샤를을 화나게했다.
그래서 그녀 역시 그를 조롱했다.

“아아, 정말 쓸모없는 오빠네. 역시 만나지 말걸 그랬어. 시간 아깝게 뭐하는 짓일까.”

콜먼이 이를 갈았다.

“너 지금 나를 모욕했어!”
“당신이 먼저 나를 모욕했을텐데?”
“정통성도 없는 첩의 자식 주제에 모욕이라니! 오히려 감사히 생각하며 순순히 받아들여도 모자를 판에!”

샤를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도 참 힘드셨겠네. 이딴 사람을 자식이라고 낳아놨으니.”
“입 다물어! 더 떠들어댔다간 전부 박살내버리겠다!”

콜먼이 씩씩거리며 뒤를 가리켰다.

“저걸 봐!  이상 나를 모욕했다가는 내 자랑스러운 군대가 네년을 족칠것이다! 맹세하마!”

샤를이 어깨를 으쓱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내 군대는 놀고 있는줄 알아?”

그녀도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

“내 기사들이 왕이 되겠다는 당신의 헛된 야망을 철저히 짓밟아줄거야. 각오해!”

그 말을 끝으로, 때마침 두 사람의 고성에 놀라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감지한 양쪽 가신들이 재빨리 뛰어와서 두 사람을 갈라놓으며 그대로 자기 진영으로 데리고 갔다.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고, 서로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명분이 생긴 양쪽 진영은 활활 불타올랐다.
남은 것은 전쟁뿐이었다.

그 와중에 콜먼의 가신 플레오스가 탄식을 내뱉었다.

“손쉽게 먹을  있었던걸 이렇게 멍청하게 가다니! 빌어먹을! 왕자한테 맡기는게 아니었는데! 이래서야 애써 세운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잖나!”

본래 그의 계획대로라면 서로의 만남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어 샤를측이 방심한 틈을 타 수뇌부들의 목을 칠 생각이었다.
 시각 멜리사 역시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가 3왕자인만큼 훌륭한 기사들도 많을테고 어느쪽이 이기든 결국 큰 피해를 입을거야. 야단났군.”

그녀의 머릿속에 문득 얼마전 버나드의 당부가 떠올랐다.

‘추신. 혹여나 발생할지도 모를 적의 기습을 대비해 플랫폼 운영을 권장합니다. 민간인이 우리와 같이 다니면 적들은 함부로 샤를리나님을 공격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생각이 들자 갑자기 아쉬웠다.

“버나드 경의 말을 들을걸 그랬나……”

이어 나지막이 투덜거렸다.

“그나저나 버나드 경은 대체 언제오는거야.”

아기산을 진정시켰던 그라면 이 막막한 상황을 타개할 해법을 갖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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