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되찾는 노력, 수련61
버나드가 손에 쥐고 있는것은 바로 렌그룬 영주의 머리였다.
자신을 괴롭히는 것으로 모자라 제 주인을 살해한 원수의 머리였으니 금사자가 못 알아볼리가 없다.
“푸히힝!”
버나드를 꿰뚫을 기세로 달려오던 금사자가 갑자기 앞발을 높이 치켜올리며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그 모습을 신기하게 여긴 주민들이 숨을 죽이고 쳐다봤다.
“어, 어떻게 된거야?”
“손에 들고 있는게 뭐길래 멈춘거지?”
버나드는 주민들을 등지고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그의 손에 들려있는게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금사자가 사람에게 화난 이유는 이 자 때문이야.’
버나드는 앞서 만난 랜턴의 이야기를 듣고 금사자를 길들일 해법을 찾아냈다.
‘렌그룬 영주는 농부를 죽이는 것도 모자라 말을 안듣던 금사자까지 매장시키려했죠.’
금사자가 이렇게된 원인은 모두 렌그룬 영주의 탓이었다.
그러니 문제의 근원을 없애면 금사자를 길들일 수 있지 않을까?
금사자에게 복수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주마. 네 것이다.”
버나드는 손에 들고 있던 머리를 금사자의 발앞으로 던졌다.
파리가 들러붙고 피로 얼룩진 머리가 잔디 사이를 데구르르 굴러 금사자의 발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콰직!
금사자는 가차없이 렌그룬 영주의 머리를 짓밟았다.
***
버나드의 예상은 적중했다.
복수를 해낸 금사자는 그 뒤로 거짓말 같이 순해졌다.
“버나드 경이 해냈어! 저 난폭한 말을 길들였다고! 이제 우리 마을은 안전해!”
마을 주민들은 서로 얼싸안으며 기쁨을 나눴다.
“멋진 기사님이야!”
“저렇게 듬직한 분이 세상에 또 어디있을까!”
“이제 농작물이 잘 자랄테니 한시름 덜었어!”
버나드의 다음 차례였던 도전자들은 저마다 땅을 차며 툴툴거렸다.
“제기랄, 제기랄!”
“아……! 저 멋진 말을 뺏기다니!”
그런 가운데 촌장은 흐뭇하게 웃으며 크게 선포했다.
“우리 에그넘 마을은 아킨테의 미셸님께서 인정한 오크를 두려워하지 않는 기사 버나드 경에게 큰 빚을 졌습니다! 우리 마을은 이것을 잊지 않기 위해 버나드 경에게 존경과 경의를 표하며 기념비를 세울 것입니다! 그리고 제 딸인 율리아를 은혜에 보답하고자 바치겠습니다!”
“와아~!”
주민들이 만세를 외치며 열광했다.
데보라는 인상을 찌푸리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귀족 피 빨아먹을 생각에 딸 보내는거 누가 모를줄 알아! 어디서 개수작질이야!”
그녀는 촌장을 향해 오른손을 들어 가운데 손가락을 세웠으나 환호성을 지르는 주민들에게 파묻혀 그녀의 몸짓과 소리는 그 어디에도 전해지지 않았다.
란은 멍하니 버나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스터울프는 정말 놀라운 사람이다 하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금사자는 버나드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안했다.
계속 버나드를 따라다니면서 그의 가슴이며 팔, 겨드랑이, 사타구니 냄새를 맡느라 여념이 없었다.
마치 새 주인의 냄새를 기억하려 애쓰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것이 버나드가 마을로 오자마자 한 주민에게 안장을 받아 녀석의 등에 얹어도 투정을 부리지 않고 가만히 받아주었다. 심지어 재갈을 물리고 고삐를 잡아당겨도 성질 포악한 금사자란 악명이 무색할만큼 순둥이처럼 얌전히 당하고만 있었다.
아무래도 버나드와 함께 다니고 싶은 모양이다.
그가 어디를 가도 쭉 따라가고 싶다며 몸으로 표현하는게 아닐까.
그 마음을 눈치채고 버나드도 금사자에게 친근하게 대했다.
“금사자란 이름은 네게 어울리지 않아. 새로운 이름을 지어줘야겠어.”
금사자는 암말이다.
그리고 왕과 황제가 타고 다닐법한 훌륭한 생김새를 가졌다.
달콤한 크림 같은 상아색을 가진 갈기털은 여자의 머릿결처럼 풍성했으며 부드럽고 윤기가 흘렀다.
이처럼 아름다운 말에게 금사자란 이름은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이름이 없을까……”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하던 버나드는 늘 가슴 깊이 그리워하는 레아를 떠올렸다.
그녀의 분신이라도 좋으니, 그녀로 생각할만한 무언가가 가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좋아, 네 이름은 레……”
“레아는 안돼.”
란이 불쑥 다가와서 딱 잘라 말했다.
“그녀는 당신 밖에 몰랐어. 얘는 주인이 두 번째잖아.”
“음…… 그런가.”
버나드가 머리를 긁적였다.
“당신은 다른쪽으로는 훌륭한데 그쪽으로는 너무 둔해.”
“그쪽이라니? 무엇을 말하는 거지?”
“몰라, 말하기 귀찮아. 알아서 생각해.”
란은 허리를 숙이고 가죽 신발끈을 바짝 동여맸다.
“나 오늘 떠날거야. 시킨거 외에 부탁할거 있음 빨리 얘기해.”
“생각나면 말해주지.”
“내가 떠나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 얼른 생각하는게 좋을거야.”
버나드가 시킨 일 때문에 먼 길을 가야해서인지, 란의 신경이 평소보다 조금 날카로워 보였다.
“나중에 돌아오면 나 선물 사줘. 옷이나 장신구 같은거.”
“알았다.”
“듣던 것과는 달리 의외로 상냥하네.”
“오해마라. 네가 한 일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급해줄뿐이다.”
“네네, 그러시겠죠. 아무도 오해안해요.”
란이 혀를 빼죽 내밀었다.
좌우지간 버나드는 금사자에게 ‘라벤다’ 라는 새이름을 붙여주었다.
그가 좋아하는 꽃인 라벤더의 이름을 끝발음만 달리해서 라벤다 라고 지었다.
그 후 라벤다를 타고 한참동안 들판을 내달렸다.
라벤다의 넓고 튼튼한 등위에 앉아 달리고 있노라면 마치 하늘을 나는 기분이 들었다.
기개 넘치게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허공을 가르는 바람소리가 너무나 짜릿했다.
달리면 달릴수록 버나드는 라벤다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버나드가 스트레스를 한껏 풀고 마을로 돌아왔을때 란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데보라가 말하길 렌그룬 영주에게서 빼앗은 재물을 모두 가져가며 나중에 또 보자는 말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단다.
그리하여 데보라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
그날 저녁 마을에 잔치가 벌어졌다.
버나드를 성대히 대접함과 동시에 그동안 말썽을 피우던 라벤다가 길들여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것이었으나 정작 내용은 촌장 딸의 송별회에 가까웠다.
“금사자를 길들인 버나드 경이라면 내 딸을 믿고 맡길 수 있습니다!”
잔치가 열리기 직전 촌장은 버나드를 만나 딸을 거두어 달라고 간곡히 요청했고, 버나드는 망설임 없이 제안을 수락했다.
촌장 가족들은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딸과의 이별이 못내 아쉬워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라기보다는 딸의 미래가 나아질거라는 희망과 기대가 섞인 기쁨의 눈물임은 분명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외지의 시골에서 돈 없이 가난하게 살바에야 멋지고 듬직한 기사님이나 따라다니면서 봉급 받고 하녀 생활을 하거나 그게 아니면 아싸리 자식을 낳아주며 그나마 편한 인생을 사는게 딸한테 도움되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더욱이 딸이 잘되면 나중에 큰 돈 들고 금의환향 할수도 있는 노릇이고…… 기회가 있을때 외지인인 버나드에게 딸려보내는게 마을에서 평생을 살게하는 것보다 훨씬 가족과 마을의 발전에 도움되는 일이었다.
“나리, 제 이름은 율리아라고 합니다. 낮에 식사할때 뵀어요.”
약간 붉은빛이 감도는 머리색에 청순한 미모를 지닌 그녀는 눈꼬리가 아래로 처져 거북이처럼 귀여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약간 살이 찐것 같았으나 곧 빠질 젖살 같아 보였고 시골처녀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얌전하고 순진한 맛이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기억난다. 정말 나와 동행할 생각이냐?”
“네, 나리께 제 몸과 마음을 다 드릴거예요.”
말하는게 참 야무졌다.
“내가 가는 길은 네가 그리는 꿈과 많이 다를거야. 어쩔땐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 각오가 되어있다면 나를 따라나서고 두렵다면 남아도 좋다.”
“전 나리를 따라나서기로 부모님과 얘기가 끝났어요. 마을을 구해주신 나리께 제 미래를 맡기고 싶어요.”
잔치가 끝난뒤에는 촌장이 마련해준 방에서 율리아와 같이 잤다.
그녀를 품으라고 촌장측이 준비한 일이었으나, 버나드는 밤새 그녀의 몸에 손끝도 대지 않았다.
자신이 율리아의 주인이 되었다는 상징적인 의미만 가질 생각으로 함께 잔것뿐이었고, 더구나 잠자리에는 데보라도 함께였다.
그렇게 셋이 잤고, 만약 버나드가 마음만 먹었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율리아와 관계도 가졌을 것이다. 욕정 때문이 아닌 그녀의 몸을 정복해 완벽하게 자신의 종으로 삼을 생각으로. 버나드는 귀족으로서 평민을 낮잡아 보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던 이유는 나중을 위해서였다.
나중에 멜라니아가 처녀혈이 필요해질때쯤 그녀에게 처녀혈을 제공해주는 대가로 필요한 것을 받아내기 위해서.
다음날 아침.
에그넘 마을 주민들이 모두 나와 세 사람을 배웅했다.
“버나드님 말씀 잘 듣고 건강하게만 살거라.”
“여긴 걱정 말고 네 일만 신경쓰렴.”
“잘가, 누나. 흑흑.”
“아버님, 어머님, 동생아,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나리와 함께 꼭 들를게요. 그때까지 몸 건강히 잘지내세요.”
눈물의 작별인사를 마친후 버나드는 라벤다의 등에 데보라를 태우고 그 뒤에 율리아를 태운뒤 자신이 두 사람의 중간에 올라탔다.
앞에 앉은 데보라의 허리를 감싸안듯이 고삐를 쥔뒤 그대로 말을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버나드가 흡족하게 웃었다.
“역시 라벤다야. 빠르다. 이 속도면 이틀이면 도착하겠어.”
달리는 내내 뒤에서 자신의 허리를 꽉 껴안은 율리아의 팔이 미세하게 떨고 있는게 느껴졌다.
졸지에 가족과 생이별을 하게된 그녀가 자신의 등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우는 중이었다.
옷의 등부분이 어느새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버나드는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넬까 생각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그가 그녀에게 해줄말은 하나뿐이었다.
“본진에 도착하거든 비좁은 텐트에서 생활해야 될거야. 자리가 없으면 밖에서 자야하니 마음 단단히 먹어.”
데보라가 발랄하게 덧붙였다.
“거기 성질 더러운 마녀도 있단다?”
율리아가 급히 눈물을 삼키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 마녀요?”
“마녀뿐만이 아니야. 하는 일마다 되는게 없는 빚쟁이 화가도 있어.”
데보라는 자신의 오빠를 아무렇지도 않게 깎아내렸다.
그러자 율리아가 훌쩍거리다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어요.”
그것이 시발점이 되어 데보라와 율리아 두 사람의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말이 달리는 동안 두 사람은 즐겁게 얘기를 주고 받았고, 버나드는 들판에 무성히 자란 풀밭의 향기를 맡으면서 북쪽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최대한 빨리 갈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샤를리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