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되찾는 노력, 수련59
걷는 것을 멈추고 어느 계곡 근처에서 야영을 준비했다.
“마스터울프님은 역시 영웅이라 그런지 늙지도 않으시는군요.”
“영웅이라서가 아니야. 그냥 우리집안이 다들 동안이라 그런것 뿐일세.”
“동안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 중에 최고로 동안이십니다. 역시나 영웅이라 뭔가 달라도 다르시군요.”
“영웅 소리는 좀 치우게.”
야영을 준비하기에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오랜만에 만난 랜턴과 회포를 풀 생각에 버나드는 조금 들떠있었다.
“술을 들고 다니길 잘했습니다. 오늘 마시는 술은 평생 기억에 남을 정도로 맛있는 술이 되겠군요.”
“우리 왕국의 영걸인 마스터울프와 마시는 술이라구. 한잔 한잔 곱씹으며 아껴 마셔야할거야.”
“버나드, 누나가 따라줄게. 자 받으렴.”
타닥타닥 타는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은 네 사람은 술을 마시며 말린 뱀장어 껍질을 뜯어먹고 계란을 구워먹었다.
술과 말린 뱀장어 껍질, 계란은 모두 랜턴의 것이었다. 그외에도 빵이나 치즈 등 그는 가지고 있던 식량을 아낌없이 모두 내놓았다.
“마스터울프님도 아시다시피 부모님께 물려받은 제 일이 이 마을 저 마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세상 소식을 알려주고 편지도 전해주는 일입니다. 여기저기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다보면 고맙다며 계란도 주시고, 술도 주시고, 가끔 값비싼 고기도 주시곤 합니다. 오늘 같은 날 아쉽게도 돼지고기가 없네요. 낮에 들렸던 마을에서 받았으면 좋았을텐데.”
버나드는 신경쓰지말라며 그에게 음식값으로 금화 열닢을 쥐어주었다.
랜턴은 금화를 보고 깜짝 놀라며 거듭 사양했으나 버나드가 워낙 고집을 부리는지라 어쩔 수 없이 고마운 눈빛으로 공손히 건네받았다.
“맛있게 드셔주시니 기쁩니다.”
여행 도중치고는 나름 호화로운 식사였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랜턴의 일은 여러 마을을 오가며 바깥세상 소식을 알려주는 이야기꾼이었다.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보고 들은 얘기를 주민들을 모아놓고 구수하게 풀어놓으면 답례로 음식이나 물품을 받았고, 때론 주민의 의뢰를 받아 다른 마을에 편지를 전달해주거나 여러 잔심부름을 해가며 혼자 살아가고 있었다.
외부 소식을 접할 수단이 없어 세상과 격리된 채로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외지 마을 주민들에게 이야기꾼 랜턴은 요긴한 정보통이었다.
“늘 두 분이 다니시다가 10년전쯤에 어머니께서 먼저 돌아가셨어요. 그 후엔 아버지 혼자서 외로이 여러 마을을 다니셨죠. 저는 집과 밭을 지켜야했고요.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다녔던 길을 수년간 홀로 다니시면서 울고 웃고 항상 어머니를 떠올리며 추억에 잠기셨습니다. 그리고 4년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제가 이야기꾼 일을 물려받았죠. 집하고 밭은 있어봤자 돌볼 사람이 없으니 전부 처분했어요.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게 제 성격에 맞는 것 같기도 해서.”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고 몰입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야기꾼의 재주이리라.
모닥불 앞에서 랜턴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지나간 인연들에 대한 아쉬움에 가슴 한켠이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런 말을 남기셨어요. ‘랜턴, 네 엄마와 내가 제 명대로 살 수 있었던건 마스터울프님의 선물이었단다. 언젠가 그 분을 다시 뵙는 행운이 찾아오거든, 나와 엄마를 대신해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해다오.’”
랜턴은 그렇게 말하며 버나드를 향해 정중히 머리를 숙이며 부모를 대신해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솔직히 마스터울프님처럼 대단하신 분을 미천한 제가 다시 뵙게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하늘에 계신 부모님께서 도와주신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버나드는 목이 메이는듯한 감격에 젖어 랜턴을 향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일행과 떨어져 홀로 밤하늘에 떠오른 초승달을 바라보며 아련한 추억에 잠겼다.
오래전 랜턴의 엄마가 해줬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앞으로 저희집을 당신의 집이라 생각해주세요. 언제든 놀러와서 푹 쉬고 가세요.”
참으로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없다 생각하니 입안에 쓴 맛이 감돌았다.
그리고 더욱 슬펐던건……
버나드는 나락으로 추락하기전까지만 해도 그들을 단순히 정보망으로만 바라봤었다.
따스한 마음씨를 가진 랜턴의 부모를 그저 이용하기만 했다.
‘난 얼마나 매정한 인간이었던가.’
화가 났다.
“……”
버나드는 곧 크게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에게 난 화를 삭힐겸 잠시 산책을 다녀올 생각이었다.
그런식으로 버나드가 모닥불을 떠난 와중에도 랜턴의 입은 쉬지않고 계속 움직였다.
데보라와 란은 그에게서 버나드의 과거 이야기를 듣는게 즐거운 나머지 모닥불 앞을 떠날줄을 몰랐다.
“아, 그러고 보니……”
랜턴이 갑자기 데보라와 란을 번갈아쳐다보며 그녀들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15년전에 봤던 여귀족님은 안계시네요? 마스터울프님과 단짝처럼 붙어다녀서 두 분이 결혼하실줄 알았는데.”
“엘프님이요?”
“레아 말하는거야?”
데보라와 란이 쌍둥이처럼 말린 뱀장어 껍질을 질겅질겅 씹어먹으며 동시에 대꾸하자 랜턴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 분은…… 엘프가 아니었는데.”
그는 그때의 기억을 회상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분명 귀는 안뾰족했어요. 저처럼 인간 같았고, 무척 아름다우신데다 마스터울프님도 그 분께 머리를 숙일 정도로 신분이 엄청나게 높은 고위 귀족분 같았는데. 그때 그 대단한 여귀족분께서 마스터울프님을 막 따라다니는 느낌이 강했거든요. 두 분 나이도 비슷하고 그래서 잘될줄 알았는데 희한하군요.”
그 말을 들은 데보라가 씹고 있던 말린 뱀장어 껍질을 퉤하고 모닥불 속으로 뱉어냈다.
“금발인가요?”
란도 입안에 든 말린 뱀장어 껍질을 모닥불 속으로 퉤하고 뱉으며 굳은 표정을 지었다.
“키는?”
버나드에게 자신들이 모르는 여자가 있었을거라고 상상도 못했던 두 여자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데보라는 데보라대로 심각했고, 란은 레아한테 차갑게 굴던 버나드가 다른 여자랑 어울려 지냈다는 것에 레아의 친구로서 조금 화가 났다.
‘아이고 큰일났다! 내가 괜히 헛소리를 하는 바람에 마스터울프님께 폐를 끼치게 생겼어!’
많은 사람을 상대해본 이야기꾼의 관록이랄까.
두 여자의 분위기를 재빨리 눈치챈 랜턴이 얼른 멋쩍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하하하 죄송합니다. 기억이 가물가물 해서…… 다시 생각해보니 엘프님이 맞는 것 같아요.”
“정말인가요?”
“진짜야?”
“네, 제가 잘못생각했습니다. 엘프님 맞아요.”
라고 대답하면서 랜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엘프는 확실히 아니었는데…… 금과 은으로된 휘황찬란한 갑옷을 입고 위풍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는 여귀족이었어…… 프레드릭 전하와도 마주서서 대화할 정도로 위치도 상당히 높았던 것 같고……’
아무튼, 오랜만에 술을 마셨더니 하루종일 긴장돼있던 몸이 이제야 풀리는 기분이었다.
버나드를 비롯 다른 사람들에게도 스멀스멀 잠기운이 올라왔다.
“이리와서 자게.”
“어엇, 영광입니다. 미천한 저한테 이래주시지 않아도 되는데……”
“괜찮아.”
버나드는 망토를 바닥에 깔아 직접 랜턴의 잠자리를 봐주고 그는 데보라의 옆으로 가서 누웠다.
덮을것 하나없이 맨바닥에 누워있던 데보라는 버나드가 옆에 눕자 기다렸다는듯이 그의 팔에 편안히 머리를 기댔다.
버나드나 데보라나 잠자리가 불편해도 옆에 누군가 있다는 것이 큰 위로가 되었다. 더구나 술기운까지 있어 오늘밤 잠이 무척 잘올 것 같았다.
란은 나무 위로 올라가 굵고 튼튼한 나뭇가지 위에 드러누웠다.
잠시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녀는 이내 눈을 감으며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 란.”
그녀는 곧 깊은 잠에 빠졌다.
***
다음날,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났다.
버나드는 간밤에 몇번이고 깨는 바람에 밤새 한숨도 못잤다.
이 주변에 뭔 짐승들이 그렇게나 많던지, 일정 시간마다 야영지 주변을 서성이는 짐승들을 쫓아내느라 잠을 설쳤다.
“헤어지자니 섭섭하군요.”
“언젠가 또 만나겠지.”
야영지를 깔끔히 정리한 후, 버나드는 줄기차게 하품을 하며 랜턴을 배웅했다.
랜턴은 헤어짐이 정말 아쉬운지 버나드한테 뭐라도 하나 더 챙겨주고 싶어 안달했다.
그러다 버나드 일행에게 말이 없는 것을 보고 그가 손뼉을 치며 솔깃한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두어 시간정도 걸어가시다 보면 에그넘 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이 하나 나올겁니다. 그 마을이 최근 ‘금사자’ 라고 불리는 말 한마리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는데……”
명마를 공짜로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운을 떼며 시작한 얘기는 제법 흥미로웠다.
“왕들이 타고 다닐것 마냥 생김새가 고귀하게 아름다운 것은 물론이거니와 건장한 장정 세 명을 한꺼번에 태우고도 빠르게 달릴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고 사람의 말귀까지 알아들을 수 있는 굉장히 똑똑한 말입니다. 예전에 어떤 농부가 그 야생마를 운좋게 어릴때 주워 키우면서 길들였는데, 사람들 사이에서 대단한 말이라고 입소문을 타다보니 그 소문이 어느날 렌그룬 영주의 귀까지 들어가버린 겁니다.”
훌륭한 명마를 손에 넣고 싶었던 렌그룬 영주는, 처음에는 돈으로 농부를 유혹해 보았으나 소용없었다.
농부는 금사자를 가족처럼 여기며 아꼈기에 다른 사람에게 팔고 싶은 생각이 일절 없었다.
결국 렌그룬 영주는 명마를 손에 넣고 싶은 탐욕에 물들어서 농부를 죽이고 금사자를 빼앗았다.
“부질없고 못된 짓이었죠. 그게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습니다. 죽은 농부를 향한 금사자의 충심은 실로 어마무시했습니다. 하루아침에 주인을 잃은 녀석은 기질이 난폭해지고 사나운 사자처럼 굴었습니다. 뒷발에 맞아 죽을까봐 무서워 아무도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죠. 렌그룬 영주는 그런 금사자를 길들이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였으나 끝내 실패했습니다. 그러자 화가난 영주는 금사자를 죽이기로 결정했죠.”
금사자의 목에 커다란 돌을 매달아 매장시킨뒤 그 땅에 좋은 약초를 심을 생각이었으나 영리하고 힘이 센 금사자는 단숨에 사람들을 물리치고 숲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 후 금사자는 자주 에그넘 마을에 출몰해 정성껏 가꾼 작물을 짓밟고 뜯어 먹는 것도 모자라 가축 우리까지 부수며 농가에 큰 피해를 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현재 에그넘 마을에서는 금사자를 사냥하거나 데리고 갈 사람을 간절히 찾고 있는중이죠.”
랜턴이 웃으며 말했다.
“가는길에 그곳에 한번 들려보심이 어떠십니까? 프레드릭 전하와 함께 왕국을 세운 마스터울프님이라면 제아무리 금사자라 할지라도 왕국의 영웅을 알아보고 머리를 조아릴지도 모를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