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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화 〉되찾는 노력, 수련57 (90/200)



〈 90화 〉되찾는 노력, 수련57

시간이 흐를수록 마을은 더욱 소란스러워졌고, 많은 비명이 쏟아졌다.
이윽고 마을 전체가 고작 단 한명의 침입자를 두렵게 여기기 시작했다.

“무턱대고 맞서지 마라! 지원이 올때까지 기다려!”

한명의 침입자란 소리에 버나드를 얕보고 있던 가신들의 움직임도 크게 달라졌다.
여럿이 무조건 에워싸며 달려드는게 아니라 지형지물과 공성병기, 원거리 무기를 사용해 전략적, 조직적으로 대응하기에 이르렀다.

마을 전체가 긴장하며 두려워한다는 것은 마을을 통치하는 영주의 심장도 떨리고 있단 소리다.
그리고 마을이 큰 위기를 맞이했을때 영주가 시급히 해야할 일은 직접 위기에 맞서든지 아니면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 상황이 종료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버나드가 봤을때, 렌그룬 영주의 성향으로봐선 후자였다.
지금쯤 렌그룬 영주는 분명 어딘가에 숨어있을 것이다.

겁먹은 그를 굳이 찾을 필요는 없었다.
버나드는 마을에 들어오기 전부터 렌그룬 영주가 어디로 도망칠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관저? 아니다.
아무도 모르는 지하굴? 그것도 아니다.
렌그룬 영주는 보나마나 신전에 몸을 숨겼을게 뻔했다.

1차 걷는 사자 전쟁 당시, 사방이 적에게 둘러싸인 위기 상황속에서  마을을 구했던건 다름아닌 버나드 자신이었다.
그때 렌그룬 영주는 암살 당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신전에 들어가 사제로 위장한 채 지내고 있었다.

따라서 그 시절의 기억이 현재 렌그룬 영주가 어딨는지를 빤히 짐작케했고, 버나드는 서두르지 않았다.
자신의 검술을 조금이라도 향상시키기 위해 가능한한 많은 적을 상대하려 노력했으며, 오래지 않아 어깨가 뻐근해질때쯤 신전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아서 놀랐어. 무섭지 않아?”

그때까지 숨어서 지켜보던 고양이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버나드는 무심한 눈빛으로 그녀를 지나치며 나지막이 대꾸했다.

“나와 계약할 준비나해라.”

시체와 피로 얼룩진 거리를 걸었다. 고양이가 뒤를 바짝 따라다니며 수다를 떨었다.

“당신 정말 마스터울프야? 진짜로? 믿겨지지 않아서 그래. 마스터울프를 실물로 본 사람은 아마 내가 최초일거라고!”
“목소리를 낮춰.”
“왜? 누가 들을까봐서? 작게 말할테니까 빨리 말해봐. 정말 맞아?”
“맞다고 말했을터다.”
“버나드!”

뒤를 돌아보니 데보라가 뛰어오고 있었다.
버나드는 발걸음을 멈추고 황급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숨어있으라니깐  여기까지 왔어?”
“버나드가 무사한지 걱정돼서.”
“바보같아. 빨리 돌아가.”
“누나도 따라다니면 안돼……?”
“방해만 돼.”
“흑…… 버나드 차가워.”
“그런 문제가 아니야. 말 들어.”
“두 사람 무슨 사이?”

고양이가 호기심 어린 눈길로 버나드와 데보라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때 버나드가 바닥에 떨어진 칼을 자연스럽게 줍더니 건너편 지붕 위로 빠르게 던졌다.
휘익!
검기가 실린 칼자루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푹!

“커억! 어, 어떻게……!”

지붕위에 숨어있던 궁수 한명이 꿰뚫린 가슴을 움켜쥐며 밑으로 떨어졌다.
털썩!
버나드는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아무일도 없었다는듯이 고양이를 마주봤다.

“데보라는  여자다.”

그러고는 곧장 발걸음을 옮기며 그녀를 지나쳤다.
데보라에게 다가가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가라고 다그쳐봤자 어차피 안듣겠지. 가까이 붙지 말고 멀리서 따라와. 눈에 띄지 않게.”
“버나드도 참, 누나가 곁에 있는게 좋으면서 솔직하지 못하다니깐.”
“뭐……?  여자라면 애인? 레아말로는 마스터울프는 여자한테 관심없는 벽창호라고 들었는데!?”

놀란 표정을 짓는 고양이의 말에 버나드가 유난히 발끈했다.

“난 벽창호가 아니다! 여자들의 생각을 잘 모를 뿐이야!”

이어 짧게 헛기침을 한 후 애써 침착한 얼굴로 그녀에게 지시하듯 말했다.

“데보라를 맡기마. 그녀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

그 말을 남기고 버나드는 신전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데보라는 그의 말에 감동한 나머지 양볼을 감싸며 무척이나 좋아라했다.

“버나드는 날 너무 좋아한다니깐~ 정말 누나를 힘들게 하는 나쁜 남자야~”

서로 주거니 받거니, 버나드와 데보라의 닭살 돋는 짓들을 보며 고양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 잠도 같이 자?”
“당연하겠죠?”
“그럼 그짓도 했어?”

고양이는 믿지 못하는 눈길로 자신보다 키가 큰 데보라를 올려다 보았다.
그러자 데보라가 싱긋 웃어보인다.

“난 버나드의 아들을 임신하기 위해 그와 매일 노력하고 있답니다?”

고양이의 입에서 곧바로 탄식이 터져나왔다.

“오 저런, 레아가  사실을 알면 슬퍼할거야.”

그녀는 곧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비극적인 운명이야. 하지만 레아는 세상을 떠났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어.”

오래전 레아와 단둘이 술집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여자들끼리의 진솔한 대화.
서로 툭 터놓고 많은 얘기가 오가던 중에 고양이가 불현듯 물었다.

“좋아하는 사람있어?”

레아가 밝게 웃었다.

“말 못해.”
“있구나?”
“몰라.”
“말해줘. 궁금해.”

고양이의 거듭된 재촉에 레아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들릴듯말듯한 목소리로 수줍게 고백했다.

“……그 사람일까.”
“누구?”

그녀는 밑으로 시선을 향한 채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마스터울프.”


***

12년전  1차 걷는 사자 전쟁이 종식된 후 이어져온 평화는 사람들을 나태하게 만들고 훌륭한 전사들을 먼 지역으로 떠나게 만들었다.
렌그룬 영주가 다스리는 마을에 버나드라는 침략자가 불현듯 나타나자 일부 영주의 친인척들은 그의 소재를 파악하려 마을을 수색하기는 커녕 화를 당할 것을 우려하여 건물뒤, 다리밑, 심지어 마을밖  곳곳에 숨어 있었다.
겉으로는 매복중이라고 변명했으나 정작 버나드가 자신들이 있는곳을 지나치면, 화들짝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는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또한 어떤이들은 거리 곳곳의 사상자를 목격하고 난뒤 두려움에 빠져 곧바로 집구석에 틀어박힌 자도 있었다.

그러는 동안 버나드는 렌그룬 영주의 여덟기사중 일곱명을 차례차례 쓰러뜨렸고, 어느 시점에 이르자 버나드를 막아서는 이들이 더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덕분에 버나드는 방해를 받지 않고 무난히 영주가 숨어있는 신전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버나드가 나타난 것을 눈치챈 영주쪽에서 그들이 가진 마지막 여덟번째 기사를 내보냈다.
하얗게 칠해진 신전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리며 커다란 체구를 가진 기사가 등장했다.

그런데 이 기사.
존재감이 삼상치 않다.
신장은 2미터가 넘었고, 고가로 보이는 두꺼운 판금 갑옷을 입은데다 머리에 쓰고 있는 투구의 모양새는 실로 단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엄청난 위압감을 풍겼다.
길쭉한 원통형 투구를 쓰고 있었는데, 투구의 높이가 족히 1미터는 되었기에 외관으로 봤을때 그의 키는 거의 3미터에 가깝게 느껴졌다. 이 정도면 오우거를 상대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
게다가 손에는  몸집처럼 커다란 양날도끼를 쥐고 있다.

여덟번째 기사의 존재감이 너무 강한 나머지 뒤에서 데보라와 고양이가 걱정하는 목소리로 외쳤다.

“버나드 조심해!”
“진짜 마스터울프라면 저런 녀석따위 상대도 안될거야!”

버나드는 여덟번째 기사와 마주보고 서면서 ‘오래된 칼’을 고쳐잡았다.
현재 버나드는 갑옷을 입지 않고 있었고, 속으로 ‘갑옷을 입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끔 하는 상대를 만나는건 처음이었다.
살짝 긴장이 됐다.

휘익!
육중한 몸이 하늘을 날았다.
먼저 공격에 나선 것은 여덟번째 기사였다.
덩치는 오우거처럼 커다란게 높이 뛸줄도 알고 몸이 무척 가벼워보였다.

그가 도끼를 양손으로 쥐고 내려치자 버나드가 재빨리 피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깔린 돌들이 박살이 나버렸다.

여덟번째 기사가 느릿한 움직임으로 다시 도끼를 들어올리는 순간 버나드는 손에 쥐고있던 칼을 떨어뜨리고 곧바로 땅을 박찼다.
버나드는 빠르게 적을 공략할 방법을 찾아냈고, 온몸이 고가의 판금으로 뒤덮인 괴물을 상대할 방법은 단 한가지 뿐이었다.
관절을 비트는 것.

배후로 돌아가 높이 뛰어서 여덟번째 기사의 등에 철썩 매달렸다.
그대로 번개처럼 기어올라가 두 다리로 녀석의 목을 휘감은뒤 양팔로 투구를 붙잡고 힘껏 목을 비틀었다.

두두둑!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묵직하면서도 통쾌하게 전해졌다.
이어 목뼈가 부러진 머리가 가볍게 들리는 것까지 확인한  신속히 몸에서 뛰어내렸다.

“후우.”

바닥에 착지한 버나드는 후련한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그와 동시에 판금을 입은 거구가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버나드 멋져!”
“대단해!”

뒤쪽에 숨어있던 데보라와 고양이쪽을 돌아보면서 버나드가 미소지었다.

“이제 영주만 남았다.”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그가 그렇게 방심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머리카락이 쭈뼛서며 등골이 오싹했다.
등뒤에서 오싹한 기운이 느껴지기 무섭게 데보라와 고양이가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안돼!”
“피해!”

버나드가 눈을 크게 뜨며 서둘러 뒤를 돌아봤다.
죽은줄 알았던 여덟번째 기사가 어느덧 일어나 도끼를 머리 위로 들어올린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녀석은 버나드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곧바로 도끼를 내려쳤다.
휙!
푸욱!

“으아악!”

버나드의 오른팔이 어깻죽지에서부터 통째로 잘려나갔다.
간신히 피한 덕분에 그 정도 선에서 끝났다.
버나드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분명 전신이 두동강 났을 것이다.

촤아악!
팔이 잘려나간 어깨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엄청난 고통이 버나드를 괴롭혔다.
아픔보다 더욱 힘들었던건, 오래전 감옥에 갇혔을때 자신의 사지를 재미로 잘랐던 간수 휘틀이 뜬금없이 떠올랐고 그때의 기억이 머릿속을 지배하며 버나드에게 더욱 커다란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가 허리를 숙인 채 정신을 못차리는 사이 여덟번째 기사는 재차 도끼를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버나드를 도와야 해!”
“여기 있어, 내가 갈테니까!”

고양이가 민첩하게 나섰다.
그녀는 화살처럼 앞으로 튀어나가며 길다란 꼬리로 허벅지에 꽂혀있던 단검을 뽑아들었고, 버나드를 주시하느라 방심하고 있던 여덟번째 기사의 등에 재빠르게 올라타며 투구 밑에 생긴 틈으로 단검을 찔러넣었다.
순식간에 목을 찔린 여덟번째 기사는 그제야 쓰러졌다.
쿵!

“어디 면상 좀 보자!”

육중한 몸이 쓰러지자 고양이는 불안한 나머지 투구를 벗기고 목에다 다시 한번 칼을 찔러넣었다.
여덟번째 기사는 귀신도 아니고 그저 힘 좋게 생긴 사람일뿐이었다.

“크윽!”

버나드는 잘린 어깨 부위를 감싸며 비틀비틀 걸어갔다.
그가 향한곳은 ‘오래된 칼’이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마검을 내려다보며 그는  위에 대고 어깨를 털었다.
잘린 어깨에서 핏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먹어라. 처먹어라.  피를 처먹고 깨어나라! 어서 내게 힘을 내놔!”

칼날에 덕지덕지 붙은 마른 흙덩이들의 표면에 핏물이 붉게 번져나갔다.
그러나 칼이 부들부들 떨기만 할뿐 그게 다였다.

“뭐가 부족한거냐. 뭐가……”

힘없이 중얼거리는 그의 입술에서 난데없이 거미줄이 뻗어나오더니, 점성이 있는 하얀실 수백 가닥이 단숨에 그의 몸을 칭칭 휘감기 시작했다.

“뭐지!?”

버나드는 크게 당황했지만 빠져나올  없었다.
그는 그대로 고치속에 갇혔다.
 광경을 보고 데보라와 고양이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체 어떻게 된거야? 적의 마법인가?”

고양이가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나마  놀란 데보라가 손뼉을 마주쳤다.

“아! 나 저거 본적 있는데……!”
“마법이야?”
“기다려보면 알아요!”

데보라의 말대로 잠시 기다리자 버나드가  고치를 찢고 나왔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있었다.

“마녀의 저주도 쓸만할때가 있군.”

알몸으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잘렸던 팔이 완벽히 재생되어 있었다.
다만……
가까이 다가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데보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버나드? 어째 조금 전보다 키가 더 작아진 것 같아.”

그의 몸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고양이도 덧붙였다.

“얼굴도 약간 어려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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