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되찾는 노력, 수련55
“멈춰라! 멈추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하고 무력을 행사하겠다!”
수차례 경고에도 불구하고 버나드는 뚜벅뚜벅 걸어와 경비병들의 창날이 닿는 거리까지 접근했고, 그 앞에서 잠시 멈춰서며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길을 열어라. 조용히 비켜주면 서로 피를 볼 일은 없을 것이다.”
“뭐 인마?”
“이놈 보소. 아침부터 약주를 자셨나 별 미친놈을 다 보겠네.”
세 명의 경비병들은, 갑옷도 없이 칼 같지도 않은 칼만 달랑 들고 나타난 버나드를 향해 기막혀했으며 아울러 별볼일 없어 보이는 그의 차림새를 보고 더욱 우습게 여겼다.
적어도 버나드가 칼을 휘두르기전까지는.
“싸우겠다면 죽음을 각오해라.”
얌전히 비켜줄 의사가 없음을 확인한 버나드는 망설이지 않고 공격을 가했다.
퍽!
“커억!”
경비병 한 명이 칼날에 붙은 마른 흙덩이에 목을 얻어 맞고 비틀거렸다.
흙덩이라지만 단단하게 굳어 있었기에 위력은 돌에 맞는 것과 같았다.
“이 자식이!”
“공격해!”
깜짝 놀란 경비병들이 일제히 창으로 찌르려는 찰나 버나드가 먼저 움직였다.
그는 잽싸게 옆으로 이동한 후, 얼굴을 맞아 정신을 못차리던 경비병의 창을 빼앗고 그것을 칼 대신 주무기로 사용했다.
버나드는 자신에게 대항하는 적을 살려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칼을 쓰자니 마른 흙덩이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바람에 몽둥이 같아서 살상이 불가능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곳에 오기전부터 적들의 무기를 빼앗아 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경비병들을 처음 봤을때부터 미리 염두해두고 있었기에 그의 동작은 매우 신속하고 빨랐다.
칼을 바닥에 버리고 창을 빼앗은뒤 즉시 검기를 입히며,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창대를 쳐내고 이내 다른 창까지 연이어 튕겨냈다.
그 다음 이어진 그의 동작에는 망설임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단호함.
마치 그는 시작한 이상 끝장을 보겠다는듯 아무 거리낌없이 세 명의 경비병을 단숨에 죽여버렸다.
버나드의 움직임은 놀라울정도로 유연하고 가벼웠으며, 불필요한 동작으로 괜히 힘 빼는 일 없이 급소만 정확히 찔러서 손쉽게 일을 마무리지었다.
“맙소사, 진짜 해버렸네.”
그 광경을 근처 나무 위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고양이는 혀를 내둘렀다.
버나드의 깔끔한 실력은 둘째치고 그가 자신이 요구한 일을 실제로 행할줄은 몰랐던지라 그저 놀라울따름이었다.
“정말 마스터울프야? 정말 왕과 싸울거야?”
버나드가 마스터울프가 맞는지는 여전히 반신반의하나 그의 각오가 어떤지는 지금 눈으로 확인했다.
렌그룬 영주는 왕궁을 제 집 드나들듯이 수시로 드나들 정도로 프레드릭왕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자.
그런 자를 건드렸다는건 왕실을 적으로 삼는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진짜 왕과 싸울 생각이구나.”
버나드가 행동으로 보여준 이상 고양이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예정에도 없던 이후의 일을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많이 바빠지겠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버나드를 내려다보며 고양이가 짓궂은 미소지었다.
“물론 저 녀석이 여기서 살아남는다는 가정하에 말이지.”
***
버나드는 죽은 경비병들을 잠시 둘러보다 손에 쥐고 있던 창을 버렸다.
툭.
마을 안쪽은 소란스러웠다.
입구에서 벌어진 싸움을 목격한 이들이 다급하게 뿔피리를 불어 마을에 닥친 위기를 알리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버나드는 초조해하거나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바닥에 떨어뜨린 ‘오래된 칼’을 다시 주웠다.
“피가 묻었군.”
창으로 경비병 세 명을 찌를때 피가 튀겼나보다.
칼날에 붙은 마른 흙덩이들의 표면에 붉은 피가 군데군데 묻어있었다.
무시하고 앞으로 한발 내딛을때였다.
문득 칼이 아주 미세하게 부르르 떨고 있는게 느껴졌다.
“음?”
코앞에 들고 칼날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마른 흙덩이에 갇힌 칼날이 미세하게 떨고 있는 것이 눈으로 보였다.
마치 뭔가를 요구하듯… 아니, 더 원하듯.
칼은 살아있었다.
“제기랄.”
버나드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힘없이 무미건조하게.
칼의 정체를 깨닫고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심적으로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다.
입가에 허탈한 미소가 그려졌을 뿐이다.
“마검이었나.”
손에 쥔 칼의 피를 갈망하는 탐욕스러운 모습을 보고 한눈에 알아봤다.
마검.
주인을 잡아먹는 칼.
아니면 그에 준하는 대가를 치러야하는 칼.
많은 경험을 가진 버나드 정도 되는 인간이 마검의 존재를 모를리 없다.
마검의 사용자는 언젠가 죽거나 광기에 빠져버리는 불운한 결말을 맞이한다.
그러나 버나드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잘됐어.”
마검은 주인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대신 그 성능과 위력만큼은 확실했다.
세상 그 어느 칼도 따라오지 못할 아주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고 들었다.
그러니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앞으로 할 일에 분명 큰 도움이 될테니까.
그리고 마검이 두렵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버나드는 이미 자포자기한 인간이다.
프레드릭을 죽인뒤 레아의 시체를 안장하고 나서 그 이후를 살아가고 싶은 의지도 목적도 없다.
현재 그가 바라보는 인생의 끝은 레아를 향한 속죄뿐이다.
그것이 죽음이라도 좋다.
“너의 주인이 되어주마. 내게 힘을 보여라.”
버나드는 칼을 쥐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
혼자서 영지를 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그것이 버나드라면 얘기가 다르다.
버나드는 렌그룬 영주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고, 렌그룬이 다스리는 마을의 구조를 꿰뚫고 있었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정도였다.
그가 가진 병력의 규모까지도.
어떤 영지든 마찬가지지만 평상시에는 병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병사들이 존재하는 시기는 농노들이 병사로 동원된 전시뿐.
평시에는 영주와 계약한 기사들과 그 종자들 및 가족 친인척들이 영지를 지킨다.
따라서 큰 규모의 영지가 아닌 이상 일반 영지는 수비병력이 최대한 많아봐야 백명.
소영지는 40명도 채 안된다.
그런 상황에 중무장을 갖춘 기사는 대략 2명에서 10명쯤.
요주의 상대는 기사뿐이고 버나드가 알고 있기로 렌그룬 영주가 보유한 기사들은 모두 여덟명이었다.
즉, 여덟명만 처리하면 혼자서 평시의 영지를 박살내는게 무리는 아니란 소리다.
하지만 그전에 파상공세를 감당할 수 있는 체력과 실력이 뒷받침되어야했다.
얼마전 요르트나 분지에서 2주간의 수련을 끝마친 버나드는 자신감이 넘쳤다.
렌그룬 영주를 죽이라는 고양이의 무리한 요구를 무모하게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버나드는 내심 자신의 실력을 가늠해보고 욕심이 있었다.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홀로 다수를 상대하며 연속으로 벌어지는 전투를 통해 잊혔던 기억이 또 되돌아오지는 않을지.
현재 버나드는 개인적인 복수도 챙기며 여러가지를 실험하러 이 마을에 와있는 것이다.
“침입자다! 마을에 침입자가 나타났다!”
“몇명이야?”
“한명!”
“한명……?”
마을 입구에서 살인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영주의 관저에서 기사 몇명이 출동했다.
그들은 말을 타고 마을 입구로 신속하게 이동했다.
이윽고 현장에 도착하자 세 구의 시체만 보일뿐 침입자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는가!”
“마을 안으로 들어온 것은 확실히 봤습니다!”
“찾아라! 근처 산에 거주하는 도적놈일지도 모른다!”
혼자서 다수를 상대하는건 버거운 일이었으나 나름 이점도 있었다.
남들의 시선을 피해 몸을 숨기기가 쉽다는 것이다.
아울러 번개처럼 모습을 드러내기도 쉬웠다.
사뿐!
“어……?”
버나드가 난데없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기사 두 명이 섞여있는 한 무리 앞에 나타났다.
종자의 양어깨를 밟고 당당히 선 그를 보고 모두가 위를 올려다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놈인가……?”
“쟤야?”
“저, 저놈 맞습니다!”
버나드가 모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도망쳐라. 도망치는 자는 살려주겠다.”
“공격해!”
“잡아!”
적들의 외침을 시작으로 적 하나가 버나드의 다리를 향해 창을 내질렀다.
휘익!
“싸울 생각이라면.”
버나드는 종자의 어깨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바닥에 착지하는 것과 동시에 그대로 팔을 뻗어 마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퍽!
퍽! 퍽!
마른 흙덩이 때문에 몽둥이로 때리는 소리가 연이어졌다.
벨수는 없어도 위력만큼은 적들의 몸이 비틀거릴 정도로 적당했으며, 부족하다 싶으면 적들의 무기를 빼앗아 찌르고 베면서 확실히 마무리를 지었다.
“끄악!”
“도망가지 말고 저놈을 잡아!”
“달려들어! 달려들라고!”
“실력이 보통이 아닙니다!”
버나드의 몸놀림은 무척 가벼웠고, 그가 휘두르는 칼은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그가 양손에 칼을 쥔 채 여기저기 옮겨다니면서 칼을 휘두르는 동안 적들은 그를 쫓아다니느라 바빴고 동료가 죽는 것을 눈뜨고 지켜봐야만했다.
그와 더불어 한 사람씩 쓰러뜨릴때마다 버나드는 쓰러진 자가 흘리는 피를 일부러 마검에 묻혔는데, 마검은 피가 묻을때마다 좋다는듯이 검신을 크게 떨어댔다.
손을 통해 전해지는 그 느낌을 버나드는 추악하다고 생각했다.
“역시 부정한 검이다. 악마같은 놈.”
물론 적들도 무력하게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속에서 믿음직스러운 기사가 등장하며 버나드의 앞길을 막았다.
다만 오래버티지 못하고 쓰러졌을뿐.
“까악!”
“크윽!”
버나드는 단숨에 두 명의 기사를 쓰러뜨렸고, 그 광경을 보고 겁을 집어먹은 종자들은 금세 싸울 의욕을 잃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못 이겨! 안돼! 안돼!”
“으아아악!”
버나드는 그들을 순순히 놔주었다.
그리고 달아나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눈에 힘을 주었다.
벌써 마검에게 잡아먹힌 것일까.
오랜만에 사람의 피를 보니 그 또한 마검처럼 흥분이 됐다.
동시에 가슴 한구석에 자리잡은 증오심이 더욱 불타올랐다.
“레온 왕국은 프레드릭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기필코……!”
버나드는 프레드릭을 떠올리며 이를 바득갈았다.
그러면서 새로운 적을 찾아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영주의 가신들이 마을 안에 뿔뿔이 흩어져서 자신을 수색중이다.
자신이 혼자라서 그런지 잘 못찾는 것 같으니 일일이 마중나가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