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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화 〉되찾는 노력, 수련54 (87/200)



〈 87화 〉되찾는 노력, 수련54

낯선 영지, 웨스트팜에서의 첫날이 불안감속에 지나가고 있었다.
영주 가족과의 저녁만찬을 끝낸 샤를은 기운 없는 모습으로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침대에 엎어져 흐느껴 울었다.

샤를은 어머니 미셸 없이 홀로 다니는 여행이 무섭고 두려웠다. 알 수 없는 앞날에 대한 불안감은 날이 갈수록 커졌고 밤만되면 눈물이 흘러나왔다.
울다가 지친 그녀는 몸을 새우처럼 한껏 오므렸다.
그리고 버나드를 떠올리며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모든 것의 시초는 버나드 그였다.
그만 아니었어도 지금쯤 아킨테 영지 자신의 방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뭐람.
억지로 끌려다니면서 생고생만 하고 있다.

“나쁜놈…… 나쁜놈……!”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함께 눈물도 같이 흘러나왔다. 그러면서 계속 버나드를 끝도없이 욕했다.
클레어가 문앞에서 지켜보고 있었으나 그녀는 시선을 내리고 조용히 서 있을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현재 샤를의 심정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랴.

“어머니가 그 녀석을 받는다고 했을때 적극적으로 달려들어서 막았어야 했는데.”

화가 나고 답답한 나머지 주먹으로 침대를 쾅쾅 처댔다.

“내가 왜 제국까지 가야하는데! 가서 뭘해야할지도 모르겠단 말이야!”

정말 속 터지고 억울해서 미칠지경이었다.
게다가 더욱 열이 받았던 것은, 여기까지 샤를을 끌고온 당사자인 버나드는 며칠째 그녀를 내팽게쳐둔채 혼자 제멋대로 돌아다니고만 있다는 것이다.

주인을 내버려두고 어디서 뭘하는지.
뭔짓거리를 하고 돌아다니는지.

만약 버나드가 종일 그녀 곁을 지키며, 지난번 호위때처럼 위로가 되는 말을 쉬지 않고 건넸다면 짜증과 분노가 그나마 덜했을 것이다.
그러나 버나드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거의 방목하다시피 샤를을 놔두고 있었다.

“내일 만나면 한대 때려주고 싶어. 그 녀석이 너무 얄미워 죽겠어.”

샤를은 모르겠지만 버나드는 사실 그녀를 무척 신경쓰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인간관계에 무심하고 둔감한 그의 성격상 스스로 나서서 누구를 위로하고 달래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인간미 넘치게 자발적으로 찾아와 사적인 고민을 들어준다거나 함께 걱정해주는 일은 버나드에게 있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해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허나 윗사람의 명령이라든지 임무에 필요한 일이었다면 그는 샤를을 찾아가 고민을 들어주고 함께 걱정도 해줬을 것이다.
다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게 아니라 메뉴얼에 적힌걸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듯이 흉내만 내는 수준이겠지만.

“……”

클레어는 샤를이 울며 잠드는 모습까지 지켜본뒤 조용히 불을 끄고 방을 나섰다.
겉으로 내색은 안했으나 그녀 또한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이대로 샤를을 내버려두다간 시들어가는 꽃처럼 점점 생기를 잃고 쓰러질까봐 염려되었다.

“버나드…… 만나서 얘기해야겠어……”

최근 몰라보게 성장한 버나드가 어렵게 느껴졌으나 샤를을 위해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

방안에는 수증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나무욕조가 자리하고 있었다.
멜리사는 입고 있던 옷을 모조리 벗어던지고 장미 꽃잎이 둥둥 떠다니는 목욕통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심신이 개운해지며 절로 기분 좋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후우…… 행복해.”

그녀는 느긋하게 몸을 씻으며 버나드를 떠올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생각 밖에 안들었다.
백검대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했다지만 그래도 그렇지 샤를의 호위까지 내팽개쳐두고 어디론가 훌쩍 사라져버릴줄이야.
그로인해 멜리사는 하루종일 샤를을 비롯 자신들을 초청해준 웨스트팜 영주까지 상대하느라 진을 뺐다.

“우리가 지켜주면, 당신은 영주한테 찰싹 달라붙어서 수다떠는 일이라도 해야할 것 아니야.  나한테  다 시키는거야.”

혼자서 투덜대며 한참동안 목욕을 즐기던 멜리사에게 그리아와 카샤가 찾아왔다.

“좋은 방이네.”
“침대 마음에 들어.”

카샤는 다짜고짜 침대로 뛰어들며 푹신한 감촉을 만끽했고, 넓은 방안을 천천히 둘러보며 안으로 들어온 그리아는 목욕통에 살짝 걸터 앉으며 물속에 들어가있는 멜리사의 육체를 내려다보고 미소지었다.

“방금전에 버나드 경이 다녀갔어.”
“여기 들렸어? 지금 어딨지?”

침대의 푹신한 감촉에 심취해 있던 카샤가 대답했다.

“떠났어.”
“왜?”

그리아가 둥둥 떠다니던 장미 꽃잎을 가지고 놀며 대답했다.

“일이 있대.”
“여기보다 중요한 일이 어딨다고?”

멜리사가 황당해하며 목욕통에서 몸을 일으키자 목욕물이 세차게 출렁거렸고 물기 묻은 그녀의 젖가슴도 물결치듯 흔들렸다.

“당장 붙잡아와.”
“바쁜가보던데.”
“알게 뭐야! 나만 고생하고 있잖아!”

그리아는 풍만한 가슴골에 끼어두었던 쪽지를 꺼내 멜리사에게 건넸다.

“이걸 주고 갔어. 읽어봐.”

멜리사는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서둘러 쪽지를 펴보았다.
빠르게 내용을 읽어내려간 그녀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급한 사정이 생겨 3일 정도 자리를 비웁니다.
그동안 샤를리나님을 부탁합니다.

추신. 혹여나 발생할지도 모를 적의 기습을 대비해 플랫폼 운영을 권장합니다. 민간인이 우리와 같이 다니면 적들은 함부로 샤를리나님을 공격하지 못할 것입니다.

너무나 일방적인 통보였다.
화가난 멜리사가 쪽지를 와락 구겼다.

“내가 무슨 자기 부하야? 건방져……!”

그녀의 두 눈에서 불꽃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버나드 경을 미워하지마. 그는 멋진 사내야.”

침대의 푹신한 감촉을 즐기고 있던 카샤가 그렇게 말하자 그리아가 웃으며 멜리사를 쳐다봤다.

“카샤는 그에게 반했어.”
“뭐 때문에?”
“몰라. 그냥 마음에 든대. 그런데 그에게 연인이 있다는 말에 슬퍼하는중이지.”

그 말을 듣고 멜리사가 상당히 어이없어했다.

“카샤, 당장 사제에게 가서 눈 검사 좀 받아봐.”

***


데보라와 함께 야영지의 텐트로 돌아온 버나드는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프레드릭왕의 충실한 후원자 렌그룬 영주의 영지는 현재 머물고 있는 웨스트팜으로부터 말을 타고 반나절이면   있는 거리였다.

“오래걸리지 않을거야.”

마크와 멜라니아에게 대충 사정을 설명한 후, 버나드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자란 머리를 뒤로 바짝 땡겨서 묶었다.
그가 정수리 위로 머리를 묶은 꽁지머리를 하자 데보라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저도 모르게 탄성을 자아냈다.

“얼굴도 갸름한데 머리를 그런식으로 묶으니까 섹시해보여……!”

버나드가 피식 웃었다.

“데보라는 늘 나한테 듣기 좋은소리만 해.”
“버나드가 멋지니까 그러지.”
“헛소리하고 자빠졌네.”

옆에서 듣고 있던 멜라니아가 콧방귀를 꼈고 마크도 덩달아 거들었다.

“야야, 버나드 지금 죽으러 가는 길인데  개소리야.”
“버나드는 안죽어요 오라버니! 불길하게 왜 그런 소리를 하는거예요!”

데보라가 발끈하며 한동안 마크한테 잔소리를 퍼부어댔다.
이윽고 준비가 끝나자 버나드는 오래된 칼을 주워 말안장에 달린 가죽주머니에 쑤셔넣었다.

“그 칼로 가져가게?”

마크의 귀에서 피가날 정도로 잔소리를 퍼붓던 데보라가 다가와서 묻자 버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 녀석으로 쓰려고.”
“그 칼로 사람은 못죽이잖아. 무겁고.”
“괜찮아. 나름 가벼워.”
“그 칼을 꼭 고집해야겠어?”

데보라가 재차 걱정하는 기색으로 물었다.
그러자 버나드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속내를 밝혔다.

“이 녀석은 마치 지난날의 나처럼 꽁꽁 막힌 녀석 같아. 계속 쓰다보면 자신의 고집이 잘못되었음을 언젠가는 깨닫게 되겠지.”
“칼이 깨달아……? 깨달으면 어떻게 되는데?”
“칼날에 붙어있는 마른 흙덩이들이 떨어지지 않을까?”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멜라니아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 시인이 된거냐? 못난 늑대가 칼을 사람처럼 생각하며 오글거리는 소리를 지껄이니 웃겨죽겠다.”
“시끄러워.”

버나드는 멜라니아를 향해 인상을 구겼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도 속으로 민망했다.
예전에는 안그랬는데 어쩌다 이렇게 감성적으로 변했을까.
속으로 자문하며 도망치듯 말위에 올라탔다.

 시간뒤 푸르스름한 새벽의 여명이 밝아오를 무렵, 데보라를 뒤에 태운채 쉬지않고 달려온 버나드는 마침내 렌그룬 영주의 영지에 들어섰다.
산으로 둘러싸인 평야지대에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꼭 무사해야해?”
“응.”

데보라를 말과 함께 남겨둔 채 버나드는 홀로 마을 입구로 다가갔다.
특이한 모양의 칼 한자루를 쥐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를 보고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이 흠칫 놀라며 창을 치켜들었다.

“멈춰라!”
“정체를 밝혀라!”

경비병들의 다급한 경고에도 버나드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위장으로 몰래 잠입할 생각따위는 일절 없었다.
입구에서부터 철저히 부숴나가겠다는 생각뿐.
살기를 담은 버나드의 차가운 시선은 눈앞의 경비병들이 아닌 여기서 아득히 먼 왕도만 바라보고 있었다.

“기다려라 프레드릭. 당신의 멸망이 시작됐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오래된 칼날에 화르륵 검붉은 검기가 휘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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