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되찾는 노력, 수련53
버나드와 데보라는 즉시 표식을 남겼던 장소로 이동했다.
잠시 후 그곳에 도착하자 주변 사물은 낮에 봤을때와 특별히 달라진 점은 없었으나, 버나드가 강아지풀을 깔아두었던 돌덩이를 들추자 강아지풀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가져간거야?”
“가져간걸 보니 만날 생각이 있나봐.”
“근데 왜 아무것도 없어? 어디서 만나자고 쪽지라도 남겨놔야 우리가 찾아가지.”
“괜찮아. 녀석은 아마……”
바닥을 쳐다보고 있던 버나드가 시선을 들며, 진지한 눈빛으로 주변을 유심히 둘러보았다.
“근처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거야.”
그러면서 데보라의 손을 잡았다.
“다른 곳으로 가자.”
“어디로?”
“조용한 곳으로 가면 놈이 모습을 드러낼거야.”
버나드는 데보라를 데리고 인적이 없는 외진곳으로 향했다.
빠르게 걷던 그의 발걸음은 어느 골목 입구에 도달하자 느려졌다.
잠시 멈춰서서 뒤쪽과 주변 집들의 지붕 위를 둘러보고는 이내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버나드? 골목에서 똥 냄새나……”
“오물을 여기다 버려서 그래.”
냄새나는 골목안에서 잠시 기다리자 이윽고 인기척이 들렸다.
누군가가 골목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밤이 되어 주위가 어두웠기 때문에 간신히 사람의 형체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왔군.’
버나드는 그를 경계하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와. 달빛이 비치는 곳에서 얼굴보고 얘기하자고.”
하지만 상대는 골목 입구에 우두커니 선채로 이렇다할 반응이 없었다.
뜸을 들이며 그의 대답을 기다리던 버나드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의뢰인과 얼굴을 보고 얘기하는게 두렵나? 그렇다면 이 상태로 얘기하지.”
그렇게 말하자 상대에게서 웃음소리가 들려오며, 골목 안으로 당당히 걸어들어와 모습을 드러냈다.
고양이는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타이트한 전신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무광의 가죽옷으로 전신을 감싸고 얼굴만 빼고 손부터 발끝까지 몸 전체가 빈틈없이 가죽으로 뒤덮여 있었다. 신발조차 신지 않았다.
“얼마나 있어? 난 보통 도적놈들과 달라서 많이 비싸거든. 돈 없으면 안받아줄거야.”
아그리오족 출신의 고양이는 상당한 미인이었다.
아그리오족들은 인간과 외모가 흡사하나 얼굴이 전부 눈매가 위로 올라간 고양이상인데, 그녀 역시 얼굴에서 날카롭고 도도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과 동시에 섬뜩한 요염함이 느껴졌다.
다만 아그리오족들의 체격은 인간보다 왜소하다.
고양이의 키는 대략 150cm 정도로 보였고, 얼굴이 작고 균형잡힌 몸매를 갖고 있었으나 가슴은 거의 없다시피할 정도로 작았으며 그에 반해 잘록한 허리에서 이어지는 골반 라인은 체격에 비해 조금 큰 편이었다.
본래 아그리오족 여자들은 골반이 풍만하다고 소문이 나있었다.
그 덕분인지 뛰는 것도 잘한다.
어떤 종족이든 아그리오족과 달리기 시합을 벌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며 세상에 널리 알려질 정도였다.
그리고 아그리오족들은 모두 꼬리가 달려있었다.
몸에서 유일하게 짐승 같은 부분이다.
꼬리가 없었다면 그들은 아마 인간으로 취급되었을 것이다.
인간의 외모와 완벽하게 흡사했으니까.
그저 고양이상을 한 인간들이라고만 여겼을 것이다.
“잘왔다.”
버나드가 흡족하게 웃었다.
그녀의 꼬리가 어둠속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으나 보나마나 검은색으로 짐작되었다.
하지만 아그리오족 중에 검은색 꼬리를 가진 이는 없다. 그들은 갈색 아니면 금색 또는 은색의 머리색을 갖고 있었고 꼬리색 또한 머리색과 똑같았다.
현재 긴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고양이의 머리카락색은 흑발이었고, 어둠속에서 잘 보이지 않기 위해 염색한게 분명했다. 그런 의미에서 꼬리도 검은색으로 염색했을 것이란 추측을 할 수 있었다.
“지인이 잘 쓰던 표식을 강아지풀로 만들었길래 누굴까 하고 호기심이 생겨서 와봤는데 좀 실망했어. 당신한테선 돈 냄새가 안나네.”
고양이가 손을 들어 버나드와 데보라를 번갈아 가리켰다.
“둘 다 행색이 초라하잖아. 딱 봐도 돈 없어 보여. 한때 큰물에서 놀았던 나같은 거물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우리 돈 많거든요!”
“그 지인이 혹시 엘프인가?”
버나드의 입에서 불쑥 엘프란 단어가 튀어나오자 고양이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며 눈매가 가늘어졌다.
“레아를 아나보군?”
“어느 정도는.”
버나드는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며 말을 돌렸다.
“그녀를 통해 널 알게 됐다. 네가 해줄 일이 있어.”
“방금 말했잖아. 나 꽤 비싸다고.”
“돈은 얼마가 들어도 신경쓰지 않는다.”
“뭐야, 부자처럼 이야기하네. 안믿어. 근데 레아랑 무슨 관계야?”
고양이는 일에 대한 얘기보다 레아에게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레아가 쓰던 표식을 만들줄 아는걸 보면 그녀와 상당한 친분이 있는 사람 같은데. 당신, 정체가 뭐야?”
“의뢰인의 정체를 캐묻는게 네 방식인가? 초짜도 그러지 않아.”
“뭐?”
초짜란 단어가 어처구니 없는지 고양이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그러는 사이 버나드는 빠르게 생각했다.
‘레아와 친했던 여자야. 그 점을 잘 이용하면 관계를 틀 수 있겠어.’
버나드는 대화 방법을 수정했다.
자신의 정체를 노출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어차피 버나드는 그녀와 계속 일을 할 생각이 있었고, 관계를 이어나가다 보면 빤히 드러날 사항들이었다.
“좋다, 레아에 대해 궁금한게 있으면 물어봐. 서로 신뢰만 쌓을수 있다면야 아는 한도에서 기꺼이 대답해주지.”
그러나 버나드의 말은 오히려 그녀의 얼굴빛을 어둡게 만들었다.
“당신 누구야. 내 앞에 왜 나타났어?”
갑자기 정색하더니 노려보며 쏴붙이는데, 목소리에서 혐오감마저 느껴졌다.
데보라가 펄쩍 뛰었다.
“어머! 우리가 길을 막았다는듯이 이야기 하시네요! 고양이님이 제 발로 왔잖아요!”
“고양이?”
고양이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고양이란 호칭은 레아가 자신을 부르던 애칭이었다.
물론 인간들은 때때로 아그리오족을 향해 고양이라고 낮잡아 부르기도 하지만 레아가 부르던 고양이는 그런 의미가 아닌 유대감이 느껴지는 친밀한 단어였다.
고양이는 데보라가 말한 ‘고양이’가 레아의 것과 비슷한 의미로 쓰여졌다는 것을 알았다.
“어째서 고양이란 말까지 알고 있지? 솔직히 말해. 레아랑 어떤 관계야?”
고양이가 사납게 말하며 조바심을 낼수록 버나드는 여유가 있어졌다.
그는 이때다 하고 말했다.
“내가 마스터울프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고양이는 버나드를 뚫어질듯이 바라보다가 갑자기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고양이상 얼굴로 웃으니 요염해보였다.
“당신이 밤의 늑대들을 이끌던 마스터울프라고?”
“그렇다.”
“누굴 속이려는거야.”
대화내내 경계를 하며 서로간의 간격을 유지하던 고양이가 발을 성큼 내딛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어둠속에 가려졌던 꼬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색 꼬리는 흔들리지 않고 허공에 가만히 세워져 있었다.
“킁킁.”
고양이는 버나드의 가슴에 코를 박고 체취를 맡아보더니 말했다.
“레아가 말했어. 마스터울프의 몸에서는 항상 라벤더향이 나고 나이는 30대라고. 하지만 당신을 보면 라벤더향은 커녕 30대라는 생각도 전혀 안들어. 심지어 나보다도 어려보이는데?”
“사정이 있어 신체에 변화가 생겼다. 그건 차차 말해주지.”
“수상해. 정말 수상해.”
고양이는 뒤로 물러서며 짙은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레아의 죽음을 알고 있었고, 밤의 늑대들이 해체됐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허나 마스터울프의 생사에 관해서는 전혀 들은바가 없다.
“당신도 붙잡힌걸로 아는데 어떻게 탈출했어?”
“그것도 차차 설명해주지.”
“왜?”
“얘기가 길어지잖나.”
버나드가 미소지었다.
본인이 마스터울프인 이상 그녀를 믿게할 방법은 많았다.
“작년에 레아를 시켜 네게 라스번 가문을 감시하라는 임무를 맡겼었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버나드는 그 자리에서 지금까지 고양이가 했던 일들을 술술 나열해댔다.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레아를 통해 들었던 얘기들도 생각나는대로 전부 말했다.
그러자 고양이의 눈빛이 좀 전과 미묘하게 달라졌다.
“소름끼칠 정도로 정확히 알고 있네.”
“내가 바로 마스터울프니까.”
자신있게 대답하는 버나드의 모습을 보며 고양이가 속으로 생각했다.
‘마스터울프라면…… 엄청난 놈이 지금 내 앞에 있는거야. 이건 인생 최대의 영광이라고!’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의심을 지우지 못했다.
‘나를 제거하기 위해 왕궁에서 보낸 자객이면 어쩌지? 밤의 늑대들 본부에 남겨진 기록을 통해서 내 행적을 달달 외운 가짜 마스터울프 일수도 있어.’
그렇기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 밖에 없었다.
왕궁에서 레아 및 밤의 늑대들과 관련된 자들을 끝까지 찾아내서 모조리 죽이는 작업을 실행중일 수도 있으니까.
“비록 레아를 통해서였지만 당신과 일하는건 나쁘지 않았어. 돈 잘주고 지원 잘해주고.”
“기쁘군. 내 의뢰를 받아주겠나?”
“아니.”
고양이는 천천히 뒤로 물러서며 그늘속으로 들어갔다.
어둠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당신이 진짜 마스터울프라면 내게 무엇을 의뢰하고 싶은지 조금은 예상이 가. 솔직히 나 또한 레아를 해친자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어. 우리 둘 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마음이 살짝 꿈틀거려. 하지만 거래를 하기 전에 당신이 정말 마스터울프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
“어떤식으로?”
“내가 말하는 놈을 죽여봐.”
“거절한다. 사람 죽이는 일은 안해.”
“당신이 마스터울프가 맞다면 구미가 당길거야.”
그녀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렌그룬 영주를 죽여. 여기서 가까운 곳에 그의 영지가 있지. 당신도 잘 알겠지만 렌그룬 영주는 프레드릭왕의 충실한 후원자다. 왕실이 싫어할 짓을 해서 날 믿게해봐.”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져갔다.
“할지 말지 알아서 판단해. 난 당신이 그를 죽이면 돌아오겠어. 물론 공짜는 아니야. 내 부탁을 들어주면 당분간 당신과 함께 다녀주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무료로.”
그렇게 말을 한뒤 홀연히 사라졌다.
버나드는 한참동안 깜깜한 어둠속을 지그시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데보라가 다가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위험해보여 하지마.”
버나드는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마음을 굳혔다는냥 말문을 열었다.
“할거야.”
데보라를 돌아보며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프레드릭을 지지하는 영주들도 내 적이야. 모두 죽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