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되찾는 노력, 수련52
그가 데보라를 돌아보며 물었다.
“석탄이나 잉크 같은것 없지?”
“석탄이나 잉크? 그런걸 들고 다닐리가. 그건 왜?”
“잠깐만 있어봐.”
버나드는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강아지풀을 발견했다.
그걸 뽑아 줄기를 꼬고 매듭지어서 독특한 모양을 만들었다.
“뭐해?”
“자기를 고용해달라는 고양이한테 만나자는 메세지를 남길거야.”
손에 쥐고 있던 강아지풀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 위에 주먹만한 돌을 얹어 놓았다.
버나드가 손을 털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끝났어? 이게 다야?”
“응.”
“너무 간단한거 아니야?”
“간단해야 더 모르지.”
“으응?”
“빨리와.”
버나드가 곧장 발걸음을 옮기며 앞서 나갔다.
뒤에 남겨진 데보라는 고개를 갸웃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간단해야 더 모른다라……”
잠깐 생각에 잠겼던 그녀는 이내 빙긋 웃었다.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는 난해한 말이지만 버나드가 알아서 잘 하겠지 하며 생각을 그만두었다.
“버나드는 모르는게 없어. 대단해.”
그녀는 옷이 늘어나는 바람에 자꾸만 흘러내리는 왼쪽 가슴을 붙잡고 서둘러 버나드에게 뛰어갔다.
***
다음으로 들른 곳은 대장간이었다.
‘오래된 칼’의 붉은 칼날에 덕지덕지 묻은 마른 흙덩이들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가게의 주인인 야장과 만나 지저분한 흙덩이들을 뗘내 달라고 의뢰하니, 그는 별것 아니라는 표정을 짓고 칼을 건네받았다.
“맡겨주쇼.”
그러나 뾰족한 철심을 대고 망치로 한참 두들기던 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흙 맞수? 더럽게 안떼지는구만.”
그에 데보라가 가슴부분이 늘어진 옷을 왼팔로 붙잡은 채 대답했다.
“흙 같은데요?”
“기다려보슈.”
야장은 오기가 발동했는지, 대장간에 있는 온갖 도구를 써서 마른 흙덩이들을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하지만 마른 흙덩이들은 그를 비웃듯 꿈쩍도 안했다.
그는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며 결국 포기했다.
“마법이 걸려있는 것 같소. 대장간에 올게 아니라 마법에 해박한 사람을 먼저 찾아보슈.”
버나드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길을 걷다 멈춰서서 칼날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만약 마법이 걸려있었다면 버나드가 벌써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상하네……”
“할머니는 아무말 안하니?”
“그 마녀는 내가 뭘 해주지 않는 이상 먼저 말 안하는거 알잖아.”
“정말 심술쟁이 할머니네.”
데보라와 말하는 와중에 그제서야 가슴부분을 계속 붙잡고 있는 그녀의 행동을 이상히 여긴 버나드가 물었다.
“옷은 왜 붙잡고 다녀?”
“아, 이거.”
데보라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잘 보렴?”
그녀는 버나드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왼쪽 가슴 위를 붙잡고 있던 손을 슬며시 놔보였다.
그러자 왼쪽 젖가슴을 가리고 있던 천이 힘없이 내려가면서, 과하게 큰 젖가슴과 약간 위쪽을 향해 솟아있는 분홍빛 유두가 버나드의 눈에 불쑥 들어왔다.
“짠! 어때?”
천진난만한 데보라와 달리 당황한 버나드의 눈이 일순 커졌다.
“뭐하는거야.”
그가 주변을 둘러보며 황급히 손을 뻗었다.
데보라의 왼쪽 젖가슴을 재빨리 가려야한다는 생각에 무심코 손바닥으로 움켜잡았는데, 그녀가 몸을 움찔하며 낮게 신음을 흘렸다.
“으응……!”
“빨리 올려.”
“버나드도 참. 길거리에서 누나의 가슴을 만지다니 대담해.”
“남들이 보기전에 빨리 올리라고.”
그녀가 옷을 올리고 나서야 버나드가 손을 뗐다.
“아무데서나 벗지마.”
“옷이 늘어나는 바람에 혼자서 흘러내렸어.”
“그럼 그렇다고 말만하면 되지 뭐하러 보여줘.”
“즐겁게 해주고 싶어서. 버나드가 누나 가슴 좋아하는걸 아니까.”
“하나도 안즐거워.”
이럴땐 데보라가 정말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버나드는 최대한 진지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나만 볼테니까 아무데서나 벗고 다니지마.”
“버나드한테만 보여준건데?”
“누가 봤을 수도 있어.”
“그런가……?”
데보라가 천진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길을 오가는 행인들을 쳐다보았다.
행인이 뜸하긴한데 버나드의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그저 버나드를 기쁘게 해주려고 한 것뿐인데……”
버나드는 그런 그녀의 손을 붙잡고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다.
“다른거 할때가 아니야. 옷부터 사야겠다.”
“아냐, 줄이면 돼. 돈 아깝게 무슨 옷이야. 너 장비 사야지.”
“나중에.”
도시 내에 완성된 옷을 파는 가게는 없었고, 헌옷을 파는 중고 옷상인이나 뜨개질에 소질이 있는 일반 가정집 여자를 통해 옷을 구매해야만했다.
이후 수소문 끝에 어느 가정집에 들려, 집주인의 부인이 짰다는 새 것이지만 새 것 같지 않은 적당한 가격의 녹색 원피스를 사서 입힌 후 가죽세공점으로 향했다.
“룰루랄라~♬”
가죽 장인들이 모여있는 거리로 가는 내내 버나드에게 처음으로 옷선물을 받은 데보라는 대단히 기뻐했다.
치마가 주름져있고 여유있는 품을 가진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발랄한 처녀 같았다.
한가지 흠이라면 그녀의 가슴이 너무 컸던 바람에, 옷을 판매한 가정집 부인이 원피스의 가슴부분에 새로운 천을 덧대어 늘렸고, 그로인해 상의 부분의 옷맵시가 좀 망가졌달까.
하지만 그럼에도 데보라는 무척이나 좋아했다.
“오래오래 입을거야~”
기분이 들떠보이는 그녀를 바라보던 버나드는 뒤늦게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여자한테 옷을 선물해줬다는게 상당히 낯부끄럽고 당혹스러웠다.
하물며 레아한테도 옷을 선물해준적이 없는데.
‘뭐하는 짓이람.’
하지만 쑥쓰러워하며 머리를 긁적이던 그의 입가에 곧 미소가 그려졌다.
언젠가 레아가 새침한 표정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단장님도 여자랑 연애 좀 해봐요. 언제까지 혼자 살거예요?’
‘난 여자 따위 필요없어. 오로지 전하만 지킨다.’
‘정말 답답해. 이러니 내가 옆에서 돌봐주지 않으면 안된다니까.’
‘난 보살핌을 받아야할 어린 아이가 아니다.’
‘그 뜻이 아니라고요. 내가 여자친구처럼 챙겨준다고요.’
‘필요없어.’
‘속으로는 좋으면서. 부끄럼쟁이.’
그 시절을 떠올리며 흐뭇하게 웃던 버나드는 이내 하늘을 올려다보며 레아의 얼굴을 그렸다.
‘나도 남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겠지? 그렇지 레아? 네 바람대로.’
레아도 좋아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데보라에게 옷을 선물한게 결코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생전 레아가 자신에게 했던 말, 바라던 말, 타이르던 말을 되새기며 그녀가 원하던대로 살아야한다는 사명감이 더욱 컸기때문이다.
‘레아, 넌 나의 길이며 전부야.’
얼마뒤 가죽세공점에 들렸다.
직공에게 ‘오래된 칼’을 보여주고 가죽 덮개를 만들어 달라고 의뢰했다.
직공은 마른 흙덩이가 묻어있는 오래된 칼을 보고 별난 칼을 들고 다닌다며 버나드를 희한하게 바라봤다.
“이런 칼을 휘두른다고?”
라고 물어보길래 버나드는 단지 장식품일뿐이라며 대답을 피했다.
그리고 칼집처럼 정확히 만들 필요는 없고 단지 수납만 가능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험하게 쓸거라서 원단도 중요치 않았다.
각종 마물들의 모피와 가죽도 판매되고 있었으나 버나드는 저렴한 소가죽으로 골랐다.
“멋진 문양도 필요없고, 모양도 대충 칼집처럼 생기기만 하면 되고, 튼튼하게 박음질만 잘 해주면 된다라…… 그 같은 가죽 주머니야 금방 만들지. 내일 아침에 오게.”
가죽세공점을 나오자 노을이 지고 있는 붉은 하늘이 보였다.
데보라는 이대로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야영지로 돌아가기가 못내 아쉬운지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계속 둘이 있고 싶은 것 같았다.
그녀가 수줍은 기색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이제…… 어떡할까? 마지막으로 여관에 한번 더 안갈래……?”
하지만 버나드는 그녀의 심정도 몰라주고 다른 생각에 열중해 있었다.
“아까 표식 남겨둔대로 가보자. 고양이가 봤으면 무슨 응답이 있을거야.”
“아참, 그게 있었지. 내 정신 좀 봐. 하하……”
데보라는 당황하며 잠시나마 야한 생각을 했던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버나드는 머릿속으로 고양이를 떠올렸다.
고양이.
레아를 통해서만 존재를 들었던 고양이.
고양이는 레아와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던 정보원이었다.
그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고양이의 정보는 늘 확실했고, 보수만 확실히 챙겨준다면 그 어떤 임무도 가리지 않았다.
게다가 한 지역에서만 활동하지 않고 왕국의 절반에 해당하는 지역을 활동 영역으로 삼을만큼 발도 꽤 빨랐다.
오래전 레아가 이런 말을 했었다.
‘고양이가 말보다 빠르게 먼 거리를 다닐 수 이유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아그리오족이죠.’
버나드는 그런 고양이를 포섭해 각종 첩보와 정보를 수집하는 정보원으로 둘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