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4화 〉되찾는 노력, 수련51 (84/200)



〈 84화 〉되찾는 노력, 수련51

***

얼마 후, 집무실에서 제 1공주 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안소니 후작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야단났군.”

그의 생각보다 사태가 급격히 흘러가고 있었다.
앤 공주가 프레드릭왕을 시해하려한 것을 미리 막지 못한 책임이 일부 자신에게도 있었다.

“골치아파.”

추궁당할 책임을 덜기 위한 조치를 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됐기 때문에 고민하고 있을때였다.

“줄리안 경과 영애님이 왕도로 귀환했습니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기사가 말했다.

“현재 줄리안은 성밖에서 대기중이고 그곳에 무장을 갖춘 병사들을 대기 시켜놓았습니다. 별다른 말씀이 없으시면 바로 거행하겠습니다.”

그의 보고에 안소니 후작이 고개를 들었다.

‘안돼, 줄리안을 죽이기에는 역시 이르다.’

느긋하게 있을때가 아니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하루빨리 정보망 구축이 절실했다.
이에 새로운 정보망을 구축한답시고 새로운 인물을 내세워 그가 일이 손에 익을때까지 세월아네월아 기다릴게 아니라 기존 인물을 통해 사전에 구축된 정보망을 이용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멈추게.”
“네?”
“병사들을 물려.”

자리에서 일어나 재차 말했다.

“줄리안 경은 아직 가치가 있다. 살려둔다.”


***

멜리사가 이끄는 백검대는 웨스트팜이라는 영지에 도착해 있었다.
작은 도시지만 실력 좋은 가죽 장인들이 모여산다는 유명세 덕분에 나날이 번창하고 있는 곳이었다.
 때문인지 거리는 복잡하며 활기찼고 가죽세공 가게과 가죽 옷 판매점이 즐비했다.

“여기서 부족한 물자를 조달한뒤 모레 새벽에 떠난다!”

대략 십여일만에 만난 도시인지라, 멜리사는 도시 근처에 야영지를 세우고 각종 식료품과 기름, 무구를 손질하는데 필요한 도구 같은 것들을 조달하기 위해 기사와 종자들을 데리고 도시안으로 들어갔다.
샤를과 클레어도 백검대의 호위를 받으며 영주를 만나러갔다.

그리고 그와는 별도로 버나드는 따로 행동했다.
멜리사가 여전히 옹고집을 부리고 있었기에 그녀와 상의해서 무엇을 한다는게 불가능했고, 버나드는 백검대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움직였다.

“우와, 오랜만에 사람들 보니까 반갑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고 데보라가 무척 좋아했다.
그녀와 단둘이 도시로 들어온 버나드는 곧바로 여관으로 직행했다.

적당한 여관을 찾아 방을 대실하고,  방에서 데보라와 오랜만에 진한 사랑을 나누었다.
매일 단체로 이동을 하다보니 남들 보는 눈도 있고 서로를 생각하는 각별한 애정에 비례해서 들끓어오르는 성욕을 속시원히 해결하지 못해 끙끙 앓기만 하다, 때마침 도시에 도착한 참에 서로의 육체에 굶주려있던 두 사람은 아무도 없는 빈 방에 들어서자 곧장 짐승처럼 뒤엉켰다.

“오늘 아침부터 이 순간만을 기다렸어.”
“나도.”
“하으윽, 버나드.”

옷 벗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옷이 찢어지든 말든 뒷일은 생각지도 않은 채 오직 즉흥적인 즐거움만을 생각하며 그동안 벼르고 벼르던 욕망을 한껏 채워나갔다.

“하, 항, 으, 으응!”

자유롭다는 것은 행복했다.
삐걱삐걱!
침대가 부서질 것처럼 비명을 질러도 행복했다.

“아이, 버나드도 참. 누나 가슴이 그렇게 좋아? 자, 이쪽도. 이쪽도 빨아줘. 한쪽만 빨아주면 유두가 짝짝이 되니까.”

데보라는 쾌락을 만끽하며 쉼없이 재잘거렸다.

“흐으응! 버나드, 조, 조금만. 천천히 좀……! 나 또 이러다 나, 나온단 말이야. 아……!”

버나드는 데보라의 혼잣말에 대꾸하지 않았으나 그녀의 재잘거림을 듣는 것이 즐거웠다. 여자의 숨 넘어가는 신음과 사근사근한 목소리처럼 침대 위에서 남자를 기쁘게 해주는 것은 없다. 데보라가 느끼며 재잘거릴수록 버나드의 귀는 즐거웠고,  즐거운 기분은 하반신에 우뚝 솟아있는 부위로 몰려들어 지치지 않고 찌를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헉, 헉! 헉!”

버나드의 페니스는 단 한순간도 멈추는 일없이 열심히 샘물을 파냈다.
하지만 깊은 웅덩이속에 고인 샘물은 마르지 않고 계속해서 뿜어져나왔다.

그러다 데보라가 갑자기 아, 하고 외치는 순간, 버나드는 크고 탐스러운  젖가슴을 일그러지도록 움켜진  그녀의 몸안에 욕망을 잔뜩 쏟아냈다.
그와 동시에 여관에 온 목적과 여체를 향한 굶주림도 함께 소멸했다.

***


“어머, 옷이 많이 늘어났네."

거리로 나오자 데보라가 가슴 부분을 내려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텐트에 가면 갈아입어야겠어."

어쩔 수 없다며 금세 단념한 그녀가 버나드를 돌아봤다.

"이제 어디로 갈거니?”

조금전 여관에서 몸을 씻은 덕분에 그녀에게서 좋은 향기가 났다.

버나드의 입가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갈색 머릿결이 젖어있는 데보라를 보자니 왠지 뿌듯한 기분이 들어서.

‘나 때문에 젖었어.’

아마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모를것이다
터질듯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를 가진, 이 멋진 여자를 늘 품에 안을 수 있다는 벅차고 미묘한 감정을.

하지만 버나드는 자신과 데보라와의 관계가 연인사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노예나 하녀 같은 느낌은 또 아니다.
내 것이지만, 본인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내 것이랄까.
데보라가 싫다면 언제든 떠나보낼 용의가 있었다.
어차피 먼 미래에 헤어질 운명일테니까.

“버나드? 무슨 생각해?”
“응? 뭐라고 했어?”

그녀가 귀뒤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웃는다.

“방금 그 표정 귀여워. 우리 어디로 가?”
“아.”

버나드가 어깨를 들썩이며 한쪽 어깨에 끈으로 매고 있던 오래된 칼을 고쳐맸다.

“세공점에 들려 가죽 칼집 하나 만들고 쓸만한 정보원이 있나 찾아볼 계획이야.”
“칼집이 금방 만들어질까? 며칠 이따 오라고 하면 어떡해? 우린 모레 새벽에 출발 예정이잖아.”
“잘 만들 필요없어. 베이지 않도록 대충 덮개 역할만 하면 돼.”
“기술이 있으면 누나가 만들어줄텐데.”

데보라는 아쉽다는듯이 중얼거리며 버나드의 등에 걸린 오래된 칼을 바라봤다.
영롱한 붉은빛을 자아내는 칼날에 묻은 흙덩이들이 군데군데 촘촘히 붙어 있어 그건 칼이라기 보다는 뭉툭한 둔기 같았다.
어젯밤 버나드가 흙덩이들을 떼어내겠답시고 망치로 툭툭 두드리고 날카로운 날로 쓱쓱 긁어보기도 했으나 흙덩이들은 마치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래도 가벼우니까 됐어. 흙이 붙었는데도 가볍네.”

결국 버나드는 무기 장인이라든지 그와 관련된 전문가들을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장인의 손을 빌리면 어떻게든 해결되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칼날에 붙은 마른 흙덩이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근데 버나드. 정보원은 어디서 찾을거야? 지난번처럼 술집에 가서 찾을거니? 그러다 또 싸움나면 어떡해?”

데보라의 질문에 버나드는 나란히 길을 걸어가며 가볍게 대답했다.

“그 방법도 있고, 다른 방법도 있고.”
“다른건 어떤 방법인데?”
“저기봐.”

버나드가 길을 멈춰서며  가정집 담벼락을 가리켰다.

“저기 보여?”
“어디?”
“저기, 저 돌에 그려진 표식.”

데보라가 갸우뚱하며 눈을 깜빡 거렸다.

“누나는 멍청해서 모르겠어……”
“이리와봐.”

버나드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담벼락에 가까이 다가가자 버나드가 손으로 돌의 표면을 만져보였다.

“이 망치모양 그림 보여?”

데보라가 눈을 크게 뜬다.

“그게 망치모양이야? 그냥 긁힌거 아니야?”
“망치 모양이야. 도둑들의 암호지.”
“세상에.”
“써진게 웃기네.”

버나드가 혼자 킥킥 웃는 모습을 보고 데보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림말고 글자는 안보이는데…… 뭘 보고 웃는거니?”

버나드가 망치 그림을 거듭 만지며 대답했다.

“이 망치 그림이 무슨 뜻이냐면, ‘집주인의 성격이 더러우니 피해라’ 라는 도적들의 암호야. 괜히 건드렸다가 매맞지 말라는 신호지.”
“뭐어?”

데보라는 신기한듯이 재차 눈을 껌뻑였다.

“왠지 재밌어.”

버나드는 그녀가 흥미로워하자,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고 옆집으로 이동했다.
옆집 담벼락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이내 또다른 표식을 찾아냈다.

“여기 이 돌에는 동그라미 중앙을 일자로 긋고 ‘V’ 라고 쓴 다음 작은 점이 하나 찍혀 있네.”
“이건 뭔데?”
“50대 과부가 혼자 사는 집이라는거야.”
“맙소사! 너무 무섭다. 그런것까지 공유하는거야? 도적들끼리?”
“다음집에 가볼까?”

버나드는 근처의 집들을 두루 돌아다니며 담벼락에 그려진 도둑들의 표식을 일일이 설명해주었다.

“이 집은 주인이 착해서 먹을걸 구걸하면 잘 주는 집.”
“웃기다.”

다음 집으로 이동했다.

“음, 이 집은 부인의 솜씨가 좋아 술이 맛있는 집.”
“별걸 다 공유하는구나.”

또 다음 집으로 이동했다.

“이 집은 젊은 여자 혼자 사는 집.”
“이런 표식은 지워버리자.”
“응.”

그리고 다음 집으로 이동했다.

“흐음, 이 집은 남편이 영주 밑에서 일하니 건들지 말라네.”
“도적들한테는 좋은 정보네.”

마지막으로 다음 집으로 이동했다.

“또  집은……”

표식을 바라보던 버나드가 미간을 좁혔다.

“이건 집에 대한 정보가 아닌데?”
“뭔데?”
“이 표식은 자길 써달라는 광고야.”
“고용해달라는거야? 누구한테?”
“같은 도둑들한테. 자기들끼리 서로 일자리를 소개시켜주기도 하거든. 근데……”

버나드가 턱을 어루만지며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이건 낯익은 표식이야. 분명  고양이가 쓰는 표식 같은데.”
“고양이?”

버나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잘하면 좋은 정보원을 구할  있을지도 모르겠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