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되찾는 노력, 수련49
텅!
텅!
달가닥!
버나드가 칼을 들고 두 차례 내려치자 녹슨 자물쇠가 힘없이 뚝 끊어졌다.
“과연 뭐가 들었을까?”
데보라가 활짝 웃으며 깨진 자물쇠를 빼내고 재빨리 보물상자를 열었다.
“콜록, 콜록!”
퀘퀘한 냄새를 손으로 휘저으며 안을 들여본 결과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왜 비었어?”
보물상자 안은 텅텅 비어있었다.
버나드, 멜라니아, 데보라 세 사람은 곧바로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빈 상자였나……”
“아무것도 없으면서 자물쇠는 왜 채워져 있었던거야.”
“쯔쯔, 망할놈들.”
멜라니아는 혀를 찼지만 한편으로는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공간인가.’
그러나 그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탐나는 보물은 독차지해야 제맛!
“갖다 버려. 어이, 마크! 텐트나 치자!”
“금화라도 들어 있을줄 알았는데…… 아쉽다.”
보물상자에게 급 흥미가 떨어진 버나드와 데보라는 금세 제 할일을 하러갔다.
멜라니아만 남아서 텅빈 보물상자를 끌어안고 킥킥 거렸다.
“상자안에 아공간이 설치되어 있을지도 모르겠군. 함 들여다봐야겠어. 다소 시일은 걸리겠지만 말이지.”
하필 아공간의 존재유무를 확인해볼 수 있는 재료들이 그녀의 수중에 없었다.
거처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랑민과 비슷한 생활을 하다보니 무언가를 쌓아두고 모아놓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필요한 도구나 재료를 구매하는 일 또한 날 잡고 해야하는 일이라서 무언가를 하려면 즉시 못하고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나중에 큰 도시에 들르거든 재료를 구해 확인해보자는 생각을 하며 별의별 잡동사니가 가득한 그녀의 짐속에 텅빈 보물상자를 쑤셔넣었다.
“잠시만 기다리고 있거라, 아가야.”
그때 버나드가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멜라니아를 한심하게 쳐다보는중이었다.
“당신 속을 모를줄 알고. 뛰는놈 위에 나는 놈이있지. 당신이 아공간을 풀때까지 기다리마.”
***
“줄리안 경이 바들레인 지방까지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오는중이라고?”
안소니 후작은 줄리안이 이끄는 나이트 섀도우의 감시 결과를 보고받고 있었다.
“아킨테군에 무언가 있는것처럼 움직이더니 헛탕만 쳤다고 합니다. 거기까진 특별할게 없다고 볼 수 있는데, 이후 그의 행보중에 수상한게 하나 있습니다. 귀환하는 길에 뜬금없이 키클롭스 사냥에 나섰다지 뭡니까.”
나이트 섀도우의 본 목적은 버나드의 사냥이건만 쓸데없이 키클롭스 사냥에 나서며 애먼 사상자를 발생시켰다는 것이다.
“무슨 연유로 사냥했다는가?”
“말로는 지역 주민들이 요청했답니다.”
“그가 그 지역 주민들을 만날 일이 뭐가 있어? 확실히 이상한 짓거리를 했구만.”
안소니 후작은 불쑥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줄리안의 목숨을 구해준 것은 그였으나 100퍼센트 신뢰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때 버나드의 왼팔이었던 자다.
과거 자신의 주인이었던 자를 물어죽이는게 가능할까?
안소니 후작은 늘 이런 의문을 품고 다녔다.
줄리안을 믿지 못함에도 그를 가까이 둔 이유는 일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예전, 밤의 늑대들이 가지고 있던 인적정보자원은 실로 어마무시했다.
인적정보자원이란 정보를 제공해주는 자들이다.
밤의 늑대들이 수십년간 공들여 축적한 인적정보자원은 신분과 계급,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수만명에 이르렀다.
첩보요원, 암호 해독요원, 여러 영지나 이웃왕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활동하는 비밀요원, 전국 각지 밤의 늑대들에게 매수된 자들, 밤의 늑대들과 긴밀히 공조하며 은밀히 활동하던 개인 또는 단체 등등.
그러나 이 모든 정보 수집 루트가 밤의 늑대들의 수장인 버나드가 숙청되면서 하루아침에 붕괴되었다.
밤의 늑대들과 함께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버린 것이다.
모두에게서 연락이 끊겨버렸다.
왕실이 나서서 밤의 늑대들을 처단했다는 소식에 본인까지 화를 당할까 우려하여 겁을 집어먹고 연락을 끊은 자들도 있었고, 밤의 늑대들을 처단한 왕실에 대한 반발심 때문에 화가 나서 일을 그만둔 자들도 있었다. 하루아침에 그들이 사라진 이유는 다양했다.
따라서 레온 왕국은 현재 장님 신세나 마찬가지였다.
각지에서 주요 정보를 제공해주던 정보원들을 한꺼번에 잃자 전국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수집할 길이 없고, 이와 더불어 이웃왕국들의 동태 또한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새로운 정보망 구축이 절실했다.
그리하여 안소니 후작이 왕실 내 쓸만한 인물을 긴급히 물색해보았으나 그는 곧 크게 놀라고 말았다.
버나드를 대신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각종 정보에 관해 진실과 다르게 알고 있거나 엉뚱한 소리들을 늘어놓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당장이 급하건만, 그들이 첩보일에 손이 익고 발 넓은 인맥과 새로운 정보망을 구축하며 버나드가 일궈낸 수준에 오르려면 족히 10년은 기다려야할듯 싶었다.
그렇기에, 하루아침에 까막눈이 된 왕실은 어수선했고 안소니 후작은 발등에 불이 떨어져 어쩔 수 없이 줄리안을 쓰기로 결정했다.
예전 밤의 늑대들이 갖고 있던 정보망의 일부라도 건져올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그런데.
줄리안을 정보조직의 수장자리에 앉히면서 떨떠름했는데 역시나 그 맛이 시다. 그것도 보통 신것이 아니라 매우 시다.
“흐음…”
바들레인 지방까지 내려갔던 줄리안의 수상한 행보를 보고 받은 안소니 후작은 머리를 흔들면서 쯥 소리를 냈다.
“안되겠어. 줄리안 경을 지워버리게. 왕도로 돌아오는 즉시 체포해서 보내버려.”
“예,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현장에서 바로 처형해도 좋네. 덮어 씌울 혐의야 많으니까.”
“예.”
기사가 가볍게 묵례를 하고 뒤돌아서 밖으로 나갔다.
집무실에 홀로 남은 안소니 후작은 눈을 가늘게 떴다.
원래는 적당히 이용해 먹은 후에 처리하려고 했건만, 불안해서 도저히 안되겠다.
줄리안이 사라짐으로서 왕국의 첩보분야 상황이 힘들어질지라도 화근이 될 싹은 미리 자르는게 낫겠다는게 그의 결론이었다.
“새로운 수장을 육성하는게 낫겠어. 그게 몇년이 걸릴지라도.”
그로부터 30분 후, 전투에 나갔던 프레드릭왕이 돌아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사실 지금 왕도는 전쟁중이었다.
앞서 모친이 다른 프레드릭왕의 세 아들이 의기투합해 왕도 부근까지 연합군을 이끌고 당도한 상황이었고, 프레드릭왕은 이를 괘씸하게 여기며 직접 군사를 끌고나가 반격에 나선 상태였다.
들리는 소식으로 보아 프레드릭왕의 승리로 끝난듯했다.
안소니 후작은 서둘러 성밖으로 나가 프레드릭왕을 맞이했다.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오, 안소니. 주군을 전쟁터에 내보내놓고 책상에 앉아 편히 쉬는 기분은 어땠는가.”
“그리 말씀하시면 어찌 대답해야할지……”
“하하, 농담일세!”
왕은 수년간 놀고 먹어 살이 찌고 게을렀지만, 전투에 대한 동물적인 감각만은 여전히 건재했다.
과거 전국을 재패했던게 운이 아니었단걸 말해주듯 왕은 승리하는 법을 알았다.
“승리 같지도 않은 승리야. 간만에 살 좀 빼는가 했더니 앉아만있다가 끝났네. 한심한 놈들.”
프레드릭왕은 자신에게 반기를 든 세 아들을 포로로 잡아왔다.
날은 흐리고 쌀쌀했고 사생아들의 사형을 집행한다는 소식을 들은 귀족들이 사형장으로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처참한 몰골의 세 아들은 두 팔이 뒤로 묶인 채 무릎을 꿇고 나란히 앉아있었다.
왕은 직접 그들을 심문했다.
제일 왼쪽에 앉아있는 아들의 턱을 칼집으로 들어올리며 그와 눈을 마주봤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윌리엄. 당신이 사촌여동생을 강간해서 태어난 자식이다.”
“그랬던가.”
프레드릭왕은 껄껄 웃었다.
“내 기억에는 그 계집이 날 꼬셨던걸로 아는데. 부끄러워서 아들한테 거짓말을 했나보군.”
“역겨운 자식! 반드시 천벌을 받을 것이다!”
“하늘은 아버지한테 반기를 든 패륜아를 더 응징하고 싶어할게다.”
왕이 손을 들어올리자 사형집행관이 곧바로 윌리엄에게 칼을 내려쳤다.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던 귀족들이 비명을 질렀고 잘려나간 목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왕은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 번째 아들은 윌리엄의 목이 잘리는 순간 바지에 오줌을 싸서 바지를 비롯해 주변 바닥이 젖어있었다.
“고개를 들어라.”
“사, 살려주십시오.”
“너의 이름은?”
“토, 토마스입니다.”
“토마스라, 네 사슴처럼 똘망똘망한 눈을 보니 누구의 아들인지 알것 같다. 네 모친은 시녀였던 쉐린이구나.”
“마, 맞습니다!”
토마스가 용서해달라는듯이 밝게 웃었다.
하지만 프레드릭왕의 표정은 싸늘했다.
“네 어미가 오래전 내 침실에서 귀중품을 몰래 훔쳐간적이 있지. 그래서 쫓아냈다. 이 녀석도 죽여.”
“옛!”
“아, 아버지!”
사형집행관의 칼이 가차없이 내려쳐지며 주변을 에워싼 귀족들에게서 또 한차례 비명이 터져나왔다.
프레드릭왕은 태연히 마지막 아들에게 다가갔다.
“날 몰아내고 싶었으면 2차 걷는 사자 전쟁에 참가해서 놀것이지, 기껏 판을 짜줬더니만 거기가서 놀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이 아비를 공격하다니 정말 기가차는구나.”
“잡설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빨리 죽이십시오.”
“당당한 모습으로 나오니 오히려 측은하군. 네 이름은?”
“스콧입니다. 어머니의 성함은 잔느고요.”
“아, 렌드롬멜 가문의 계집인가. 사근사근하고 예뻤는데 말이야.”
“저주나 받으십시오.”
“세 녀석이 하나같이 버르장머리가 없어. 그러니 아버지를 공격할 생각이나 했겠지.”
프레드릭왕이 허공에 털듯이 가볍게 손을 휘젓자 사형집행관은 기다렸다는듯이 씨익 웃으며 스콧의 목을 내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