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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화 〉되찾는 노력, 수련48 (81/200)



〈 81화 〉되찾는 노력, 수련48

낡은 검과 오래된 보물상자가 버나드의 눈앞에 내밀어졌다.

-다시 불러다오. 제발.
“……”

검과 보물상자를 바라보던 버나드는 혀로 입술을 축이며 침을 삼켰다.
산을 위해 한번  노래를 불러주기로 다짐했다.

“알겠다.”

산이 잠들때까지 얼마든지 불러주리라.

***

어디서 지옥의 문이라도 열린 것인지, 끊임없이 몰려오는 산짐승과 마물들로 인해 백검대는 상당히 지쳐있었다.
산짐승과 마물들이 그리 강한 것도 아니고 사냥하기야 쉬웠지만, 말이 쉽지 잡고 또 잡고  잡아도 계속 떼로 몰려오니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다.
백검대 전원은 전력을 다해 막고, 찌르고, 베고,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같은 동작을 수없이 반복하며, 어느덧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구토감까지 느꼈다.

“언제 끝나는 거야……!”
“교대할 인원도 없어!”

하나둘씩 절망감을 느낄때였다.
숫자가 점점 눈에 띄게 줄어드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끊임없이 밀려오던 산짐승과 하급 마물들이 더 이상 늘어나지 않으며 마침내 끝이 보였다.
이윽고 마지막 한마리를 처치했을때, 기사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어? 끝난건가?”
“어떻게 된거지?”
“안와. 이제 안온다고!”

누군가 환희에 차 소리쳤다.
산짐승들의 시체 한복판에 서 있던 멜리사도 먼 방향을 바라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겼다……!”

후련한 얼굴로 피 묻은 칼을 털어내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것도 잠시, 불쑥 하고 싶은 일이 떠올랐다.
당장 버나드를 찾아가서 뽐내고 싶은 기분이 괜스레 솟구쳤던 것이다.

“봤습니까 버나드 경? 이게 바로 우리 백검대의 위력입니다.”

그녀는 히죽 웃으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린뒤, 칼을 집어넣고 서둘러 샤를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군.’

샤를이 있는 곳에 도착하자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버나드를 찾았다.

“버나드 경은 어딨죠?”

 클레어에게 자세한 경위를 전해듣고 그녀는 크게 놀랐다.

“버나드 경이 문제를 해결했다고요?”
“네.”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이고 난뒤 샤를도 옆에서 거들었다.

“그 녀석이 말하길 산이 원인이라고 했어. 지금 조용해진걸 보니 잘 해결됐나보네.”
“그러니까 산짐승과 마물들이 몰려온 이유가 저 앞에 보이는 산이 원인이었고, 버나드 경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산에 올라갔다는 겁니까?”
“응. 머리 좋은 대장이라 그런지 정리 잘하네.”

뜻밖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멜리사는 놀란 표정을 지었고, 한편으로는 버나드에게 서운했다.

‘나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혼자서 추진하다니!’

샤를을 지킨 공로가 자신에게서 버나드로 옮겨가는 기분이었다.
문제의 근원을 해결한 버나드의 역할이 더 커보였고 단순히 싸우기만한 백검대는 뭔가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그렇다보니 멜리사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보다는 부정하기 위해 애를 썼다.

‘우리 백검대야말로 대단한 활약을 한거야. 우리가 없었으면 샤를님이 위험했을게 분명해. 또한 우리가 버텨준 덕분에 버나드 경도 안심하고 산을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지.’

하지만 그녀는 가슴 한켠에 자리잡은 씁쓸함을 지울  없었다.

‘난 산이 원인이란걸 모르고 계속 막기만 했는데 그는 어디서 단서를 얻은거지? 미셸님 말대로 정말 뛰어난 자인가? 아니야, 그럴리 없어. 그보다 내가 훨씬 유능해! 누군가 그에게 정보를 귀띔해줬겠지!’

혼자서 골몰히 생각하던 그녀는 갑자기 손뼉을 치며 미소지었다.

“아! 그에겐 멜라니아라는 마녀가 있었지! 그녀가 알려준거야! 그럼 그렇지!”

그러나 그럴수록 그녀만 비참해질뿐이었다.

“하아.”

혼자 정신 승리를 해봤자 전부 부질 없는 짓.
지금 자신이 해야하는 것은 버나드를 향한 시기가 아니라 상황을 정리하고 ‘개선’하는 일이었다.
개선!
잘못된 것을 고치는 일!
멜리사는 눈에 힘을 줬다.

“그래, 따질건 따져야겠어.”

***


기사들도 말도 모두 지쳐있었다.
상황이 정리된 후, 산짐승과 마물들의 사체가 널브러진 장소를 벗어나 일찌감치 야영을 준비했다.
모두 한마음이 되어 땅을 파고 땔감을 모으며 야영을 준비하는 가운데, 멜리사는 부관에게 지휘를 일임하고 다짜고짜 버나드를 찾았다.

“어째서 나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산에 올라간거죠?”

멜리사는 마크와 텐트를 치고 있던 버나드를 따라다니면서 성화를 부렸다.

“중요한 정보를 갖고 있었으면 나와 상의를 했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물론, 얘기해야 하는 일이었죠.”

말뚝을 박던 버나드가 망치질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멜리사를 내려다보며 그녀가 너무도 분해하는 모습에, 그녀보다 먼저 한 집단의 수장의 길을 걸었던 선배로서 그녀를 위로하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누구보다 그녀의 심정을 잘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엄격한 선배로서 그녀를 다그치고 가르쳐야만 했다.
무엇을?
네가 지금 나와 손잡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국물도 없을거야, 라고.
그녀가 뼈저리게 느낄 수 있도록 넌지시 알려야했다.

“백검대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며 날 밀어낸게 누구죠?”

‘지금 비꼬는 건가요!’

하고 발끈할뻔했지만, 멜리사는 입술을 오므리며 꾹 참았다.

“그래도 위기 상황에선 모든 정보를 공유해야죠. 우린 같은 편이니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최대한 어른스럽게,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자신의 위치에 맞게 말을 잘 뱉어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버나드의 대답이 가관이다.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샤를님을 지켰습니다. 그럼 끝난거 아닌가요? 뭐가 잘못되었는지 난 도통 모르겠군요. 혼자만 화난  같아요. 화는 몸에 좋지 않습니다.”
“뭐가 어째요!?”

멜리사가 이맛살을 확 찌푸렸다.

“누가 화를 냈……!”

발끈해서 소리치려는 찰나 데보라가 맥주잔이 든 나무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멜리사가 무의식적으로 버나드에게 바짝 붙어있는 모습을 보고 탐탁지 않게 생각한 그녀는 능청스럽게 풍만한 가슴을 들이밀며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어어……?”

멜리사는 말을 뱉던 와중에 저도 모르게 데보라의 몸에 떠밀려 버나드에게서 물러났다.
데보라는 실눈으로 웃으며 그녀에게 쟁반을 내밀었다.

“대장님, 모처럼 오셨는데 대접해드릴게 맥주 밖에 없네요. 맛있는 맥주 한  드시며 말씀 나누세요. 오래돼서 김은 좀 빠졌지만요.”

멜리사는 문득 그녀의 말에 뼈가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랄까?
그런 생각이 자신의 착각이 아닐까 하는 느낌도 들었으나 어쨌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맥주는 됐습니다. 바로 갈거예요.”
“잘 마실게.”

버나드는 맥주잔을 들고 꿀꺽꿀꺽 마셨다.
멜리사는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얘기하는 중에 뭐하는 짓이냐는듯이.
그 와중에 그 곁에 서있는 데보라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버나드의 종자인지 하녀인지 뭔지 아무튼 처음 보는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미지근한 맥주를  들이키고 있는 버나드를 과하다 싶을 정도로 애정 어린 눈빛으로 쳐다봤다.
특히 목젖이 꿀렁일때마다 와…! 하고 낮게 감탄사를 내뱉기까지 했다.

“버나드, 한잔  갖다줄까?”
“많이 남아있어?”
“마크 오라버니가 마실 것 밖에 없어. 그거라도 갖다줄게 기다려.”
“아냐 됐어.”

데보라의 시선은 계속 버나드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것도 눈이 반짝반짝한 채로. 사랑에 빠진 여자의 눈빛이 바로 저 눈빛이 아닐까.
멜리사는 데보라가 버나드를 많이 좋아한다는 것을 눈치챌  있었다.

‘쓸데없는 정보야.’

그녀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거나 마셔야지. 갈증나.”

버나드가 손을 뻗어 멜리사한테 주려던 맥주잔을 집으려하자 불쑥 심술이난 멜리사가 잽싸게 가로챘다.

“내가 마실건데요?”

 내뱉고는 곧장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런데 목넘김이 어째  시원치가 않다.

“콜록! 콜록!”

결국 몇모금 마셔보지도 못하고 바로 토해냈다.
더럽게 맛없는 맥주였다.
맹물에 걸레를 쥐어짠 맛이었다.
귀족으로 태어나 평민들이 마시는 맥주가 쓰레기 맛인줄 처음 알았다.

“우웨엑!”

멜리사가 헛구역질을 하는 모습을 보고 버나드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날 골탕먹인건가요?”

눈동자에 눈물을 글썽인 채 인상을 찡그리며 묻길래 버나드는 대답대신 그녀가 남긴 맥주를 깔끔하게 비워보였다.
빈 맥주잔을 자신의 머리 위에 털면서 싱긋 웃었다.

“당신의 비위가 약한겁니다.”
“장난치지마요!”

멜리사는 격렬히 부정하듯 버나드를 두 손으로 밀치고 자리를 떠났다.
떠나는 뒷모습이 마치 독약을 마신 사람처럼 목을 붙잡고 비틀거리는 것이 당장 입가심을  물이 급해보였다.

“그렇게 맛없나……?”

데보라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때 구석에 숨어있던 멜라니아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고년 갔어?”
“응.”

버나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멜라니아가 품에 안은 보물상자를 탐스럽게 내려다봤다.

“빨리 열어보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해 죽겠다.”
“녹슨 자물쇠를 자를게 있어야겠는데.”
“저 칼로 자르면 안돼?”

데보라가 마른 흙이 덕지덕지 묻어 지저분한 검을 가리켰다.
언뜻 드러나있는 칼날의 색은 불꽃처럼 빨갰고 칼집도 없었다.
이름 모를 아기산이 노래를 불러준 대가로 선물해준 검이다.
버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걸로 해보자.”

그렇게 세 사람이 자기들끼리 얘기를 주고받는 사이 그 모습을 멀찌감치 지켜보고 있던 마크는 문득 소외감을 느꼈다.
세 사람을 부럽게 쳐다보며 탄식했다.

“요즘 부쩍 내 존재감이 희미해진 것 같아. 얘들아, 설마 날 잊은건 아니지……?”

셋 중에 가장 서운한 사람은 데보라.
오빠를 챙겨주지 않는 여동생이 그저 얄밉기만 하고 빨리 예쁜 여자를 만나 장가나 들고 싶었다.

“기다리시오 나의 그녀여!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조만간 큰 돈 벌어 갖고 찾아뵈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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