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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화 〉되찾는 노력, 수련47 (80/200)



〈 80화 〉되찾는 노력, 수련47

산을 오른지 한시간쯤 지났을때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멀리 백검대와 멈춰선 마차들이 보였다.
그들은 아직도 달려드는 산짐승과 싸우는중이었다.

경사가 심한곳을 오르고 나자 이후에는 길이 한결 편해졌다.
호흡이 안정되자 버나드는 데보라와 멜라니아에게 조금씩 조금씩 말을 걸었다.

이후 정상부근의 숲에서 나무에 걸린 붉은 방울들을 발견했다.
나뭇가지에 걸린 방울들이 바람에 흔들려 딸랑거리고 있었다.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다.”

멜라니아가 높지 않은 곳에 걸려있는 방울을 단검으로 툭툭 쳤다.

“산의 마녀가 걸어놓은걸거야. 이 앞에 산의 심장이 있을게다.”

멜라니아가 기분 나쁘게 키득거렸다.

“고놈을 죽여서 말렸다 약재로 쓰면 참 좋을텐데.”
“허튼짓 하지마.”
“버나드.”

데보라가 불렀다.

“산님하고 만나면 어쩔거니? 싸울거야?”
“글쎄, 아직 모르겠어. 상대가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다르겠지.”

세 사람은 방울의 경고를 무시하고 숲속 깊은곳으로 들어섰다.
그때 세 사람은 문지기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숲의 가장 안쪽으로 들어선지 얼마되지 않아 멜라니아의 곁에 서있던 나무가 가지를 뻗어 멜라니아의 허리를 단숨에 휘감고 들어올렸다.
데보라가 비명을 질렀다.
버나드는 재빨리 칼을 뽑아 높이 뛰면서 나뭇가지를 향해 내려쳤다. 나뭇가지는 깔끔히 절단됐고 멜라니아는 밑으로 떨어지면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젠장할!”

멜라니아의 욕설이 귓가에 들려옴과 동시에 버나드를 향해 사방에서 나뭇가지들이 빠르게 뻗어왔다.
그때 바닥에서 뱀처럼 스물스물 기어오던 나뭇가지가 버나드의 왼발을 칭칭 휘감았다.
버나드는 황급히 왼발을 들어올려서 나뭇가지를 칼로 끊어내고 그를 향해 쏟아져 오는 나뭇가지들을 민첩하게 베어냈다.

“멜라니아한테 붙어, 데보라!”
“죽어 이놈들아!”

데보라는 용기있게 소리치며 마구잡이로 플레일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녀의 용맹함이 무색할 정도로 그녀가 휘두르는 동그란 철퇴는 휙휙 허공만 가를뿐 맞추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재빨리 달려온 버나드가 그 주변을 춤추듯 빙빙 돌며 데보라에게 달려드는 나뭇가지들을 모조리 쳐냈다.

“버나드 멋져!”
“박수칠때가 아니야!”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멜라니아 또한 얼른 일어나서 제몫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녀는 단검을 빼들고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나뭇가지들을 가까이 오는 족족 단칼에 처내며 무난히 버텨주었다.
맨날 방구석에 처박혀 음흉한 짓거리만 연구하느라 검술에는 문외한일줄 알았던 그녀가 의외로 제몫을 다해주자 버나드는 내심 놀라웠다.
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 나무다!  나무만 살아있어!”
“데보라를 지켜!”

버나드는 데보라를 멜라니아에게 맡기고, 멜라니아가 지목한 고목나무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나갔다.
이내 거리가 가까워지자 검기를 실어 그대로 고목나무의 기둥 한중간을 강하게 찔러 칼을 쑥 밀어넣었다.

‘됐다.’

버나드는 확실한 손맛을 느꼈다.
찌르는 속도도 대단했지만 마물의 피부를 찢는 파괴력도 강력했다.
나무기둥속으로 칼날의 3분의 2가 깊숙이 처박혔다.

일격에 숨통을 끊어내자 사방에서 달려들던 나뭇가지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조금전까지 단검을 휘두르느라 숨이 찼던 멜라니아는 거친 한숨을 토해내고 미소지었다.

“늑대야! 그 망할 고목나무 껍질  잘라갖고 오거라!  삶아 먹어야겠어!”

데보라는 플레일을 들고 후다닥 뛰어가서 고목나무 기둥을 흠씬 두들겨 팼다.
자신을 향해 달려들던 나뭇가지를 하나도 맞추지 못한 것에 대한 화풀이였다.

“감히 우리를 공격하다니  좀 맞아야해!”

퍽퍽!
퍽!

“괜히 힘 빼지마.”

버나드가 씩씩거리는 데보라를 보고 웃으며 기둥에 박혔던 칼을 잡고 뽑으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빠지지가 않았다.

“어라?”

칼자루를 두 손으로 잡고 있는 힘을 다해 잡아 당기자 칼날이 뚝 하고 부러지며 버나드의 손에 칼자루만 쥐어지게 되었다.
버나드는 탄식을 토해냈다.

“아킨테산 강철인데 뭐 이리 약해……”

미셸을 구해준 보답으로 그녀에게 선물 받은 칼이었다.
그런데 벌써 부러지다니.

“어떡해. 내 플레일이라도 줄까?”

데보라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때였다.
산이 흔들리며 고통 어린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끄아아아아!

“꺄앗!”

균형을 잃고 넘어지려던 데보라를 버나드가 재빨리 부축했다.
곧 지진이 멈췄고, 버나드는 데보라를 끌어안은 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칼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출발하자.”

***


숲 안쪽으로 계속해서 걸어들어가자 커다란 바위가 듬성듬성 있는 곳에 동굴 입구가 은밀하게 숨겨져 있었다.
세 사람은 그 앞에서 몇마디 대화를 주고 받다가 금세 동굴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동굴안은 깜깜했고, 멜라니아가 쥐고 있는 단검의 칼날이 발하는 녹색 불빛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 후, 막다른 곳에 이르러 입구를 막고 있는 얽히고 설킨 뿌리들과 마주쳤다.
뿌리의 틈을 손으로 잡아 뜯어가며 안으로 들어가자, 돌벽으로 둘러진 공동을 발견했다.

“여긴가.”
“호오.”
“지, 징그러워.”

천장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음습한 바닥에 자리잡은 산의 심장을 보고  사람은  경이로운 광경에 놀라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산의 심장은 검붉고 말랑말랑하며 축축한 표면을 가진 기괴한 모양의 생물체였다.
중앙이 갈라진 것이 어찌보면 여성의 성기를 닮은듯하고
귀두처럼 우뚝 솟은것이 달리보면 남성의 성기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참으로 묘하게 생긴 괴생물체였다.
그런 녀석이 흐느끼고 있었다.

-아파…… 아파……

버나드는 산의 심장을 똑바로 마주봤다.

“네 고통을 치료할 방법이 있나?”
-우우우…… 괴로워…… 우우……

그 직후 산의 심장이 또 한차례 크게 울부짖었다.

-끄아아아아아!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소음에  사람은 즉시 귀를 틀어막았다.
공동이 크게 흔들리며 천장에서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끔찍한 소리가 사라지자 산의 심장은 재차 신음을 흘리며 끙끙거렸다.

-아파…… 어찌하여…… 내게 이런 고통을……

산의 심장은 사경을 헤매느라 정신을 못차리는지 말을 걸어도 이렇다할 반응이 없고 계속 아프다는 소리만 주구장창 읊어댔다.
도저히 방법이 없자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멜라니아가 단검의 날을 세우고 앞으로 한발자국 나섰다.

“죽이는 수 밖에 없다.”
-아파…… 아파……
“죽이면 어떻게 되는거지?”

버나드의 물음에 그녀가 살며시 입꼬리를 말아올린다.

“이후의 일은 나도 알지 못한다. 칠십평생 살아오면서 보고 들은적이 없거든.  산의 마녀가 아니야.”
“마녀면 다 똑같은거 아닌가?”
“마녀도 마녀마다 아는 것이 다 다르다. 할 줄 아는게 있고 못하는게 있지.”
“우리가 무사히 빠져나갈 수는 있는거예요?”

데보라가 걱정하는 얼굴로 물었으나 멜라니아는 그녀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듣고 아예 무시해버렸다.
멜라니아의 시선은 고민에 잠긴 버나드를 응시하고 있었다.

“왜? 죽이는게 꺼림직하냐?”
“더 나은 방법이 없나 생각중이다.”
“어느 세월에 떠올리게? 죽이는게 가장 쉬워.”
“죽였다가 산이 무너져 내리면? 우리가 매장될 수도 있어.”
“그거야 해봐야 아는거지.”
“버나드의 말이 맞아요! 일단 같이 고민해요!”

데보라가 끼어들자 멜라니아가 괘씸하다는듯이 그녀를 쳐다봤다.

“넌 닥치고 있어 이년아. 발정난 암캐 냄새나 질질 흘려싸고 다니는게.”
“할머니 자꾸 그러면.”

데보라가 플레일을 빙빙 돌리며 미간을 좁혔다.

“진짜 저도 패는 수가 있어요.”
“둘  조용히 해봐.”

버나드는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듯 두 사람을 조용히 시킨뒤, 눈을 감고 차분히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먼 옛날 고통에 신음하던 자신을 간호해주던 레아를 떠올리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라리리 라라~♪”

데보라와 멜레니아는 돌연 그가 노래를 부르자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예상외로 고운 목소리에 감탄을 마다하지 않았다.
가사는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아름다운 선율의 버나드의 노래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평온해지며 왠지 모르게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데보라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버나드 대단해. 정말 잘 불러……!”
“으으,  피부에 닭살 돋은  좀 봐라. 늑대 주제에 잘 부르니까 재수없다.”

계속 고통을 호소하던 산의 심장도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일까.
버나드의 노래가 후렴구로 접어들 무렵 신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부들부들 떠는 것 같았던 검붉은 표면 또한 숨을 고르게 쉬는 것 마냥 조용하게 들썩거렸다.

“이샬라 로보르니아~♬”

이윽고 노래가 끝나자 버나드는 조용히 눈을 뜨며 산의 심장을 내려다보았다.
잠깐의 정적.
어두운 실내에 침묵이 감돌던 와중에 산의 심장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퍼졌다.

-아프지 않아, 졸려……

문득 천장에서 길다란 뿌리가 내려오더니 무언가를 버나드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말라서 굳은 흙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오래된 칼이었다.
보통 칼이 아닌지 생김새가 범상치 않다.

-인간이여, 이걸 줄테니  불러다오.  노래를 들으면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을 것 같다.

멜라니아가 눈을 빛내며 끼어들었다.

“산이시여,  칼은 무엇인지요?”
-땅속 깊숙한 곳에서 발견한 물건이다. 내게 산신제를 올리던 마녀에게 모든 인간들은 재물을 탐낸다고 들었다. 이것으로 부족한가?

천장에서 또 다른 뿌리가 뻗어 내려왔다.
그 뿌리는 낡고 오래된 보물상자를 휘감고 있었다.

-이것도 땅속 깊숙한 곳에 묻혀있던 상자다. 칼로 부족하면 이것도 주마.  조금전 그 노래를 들어가며 영원히 잠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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