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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화 〉되찾는 노력, 수련45 (78/200)



〈 78화 〉되찾는 노력, 수련45

레아가 나오는 꿈을 꿨다.
첫만남에서 거대한 곰을 창으로 찔러 죽인 레아는 부상당한 버나드를 업고 자신이 사는 동굴로 향했다.
출혈과 통증으로 버나드가 밤에 잠을 못이루자 그녀는 가까이 다가와 자장가 같은 노래를 불러주었다.

“아라라리리라~♬”

버나드는 노래를 알아듣지 못했다.
극심한 아픔 때문에 정신을 집중하지 못한 것은 둘째치고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가사는 인간의 언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노래에는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었고, 아름다운 노래를 듣고 있자니 괴로웠던 심신이 점차 평온해졌다.
그날밤, 버나드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단잠에 빠져들었다.

나중에 레아가 인간의 언어를 배웠을때, 그때 그 노래가 무엇이었는지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회복을 도와주는 마법이 깃든 노래인가?”

예상과 달리 그녀의 대답은 너무도 간결했다.

“저도 몰라요. 까마득히 어릴때 배운 노래인데, 그때 단장님께서 힘들어하시길래 노래를 불러주면 괜찮을까 싶어서 불러줘본거예요. 아는 노래가 그것뿐이기도 했고.”

그런 레아의 말을 마지막으로 눈이 떠졌다.
벌써 아침이었다.
야외취침을 했던 버나드는 모포를 젖히고 상체를 일으켰다.
잠시  자세로 멍하니 앉아있던 그는 무심코 오래전 레아가 가르쳐준 노래를 흥얼거렸다.

“아라라리리라~ 바릐이이아~♬”

그러다 흥얼거리는 것을 멈추고 미소를 지었다.

“레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가에 아침햇살이 한웅큼 쏟아진다. 찡그려야할 정도로 눈이 부셨다.

하늘에 있을 레아를 떠올렸다.
그녀와 함께 지낼때는 늘 그녀를 가르치고 다독이며 혼내고 이끌어주는 입장이었으나 지금은 처지가 뒤바꼈다.
모든 것을 잃고 벼랑 끝에선 버나드에게 있어 오직 레아만이 삶의 희망이자 인도자였다.
그녀를 떠올리며 위로 받고, 그녀와 함께 보낸 시간들을 통해 뒤늦게 깨달음을 얻고, 그녀가 길이 되어 자신을 이끌어주고 있었다.
오늘도 그녀에게 기도했다.

“날 지켜줘 레아.”

프레드릭왕에게 복수를 다짐한 그는, 복수를 이루고 나서 무엇을 해야할지 아직 생각해본적이 없다.
만약 복수를 이루고 나서 그 뒤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면, ‘그런 마무리도 괜찮겠지……’ 하며 삶의 희망을 잃은 사람처럼 힘없이 중얼거리는 그였다.

“그것만이 네게 속죄하는 길이겠지.”


***

아케르니아 제국을 향해 떠나는 것은 내일로 예정되어 있었고, 오늘은 앞으로 일정에 관한 회의가 있었다.
진작에 논의가 되었어야할 일인데 버나드가 늦게 도착한지라 계획을 수립하는 시간도, 출발 일정도, 그만큼 늦어졌다.

회의라고 해봐야 참석자는 샤를과 버나드, 멜리사  셋 뿐이었다.
이 회의는 샤를  그녀 휘하 두 마스터만으로 구성된 소규모 회의체다.
하지만 샤를은 관심이 없는듯 첫 회의부터 나오지 않았다.
버나드와 멜리사만 참석해 자리에 앉아있었다.

둘밖에 없는 실내에서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던 두 사람에게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버나드는 주위를 둘러보며 헛기침을 한 후 그녀를 응시했다.

“시작할까요?”
“아뇨.”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논의할게 있나요?”
“많죠.”
“해산했다가 샤를님이 오시면 하죠.”
“안오실것 같은데 지금 안하면 일정에 차질을 빚을 겁니다.”
“일정은 우리 백검대가 알아서 짤테니 걱정마세요. 나중에 사람을 보내 통보하겠습니다. 내일 출발인건 변함없으니 잊지마시고요.”
“나랑 논의하기 싫다고 얼굴에 써있군요.”

멜리사가 피식 웃었다.

“어머나, 그렇게 티났나요?”
“뭐가 마음에 안드는거죠?”
“전부 다요.”
“나의 모든게?”
“모든게.”

버나드는 아리송하다는듯이 살살 뒷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당신한테 미움 살일이 있었습니까?”
“말을 그렇게 하면 안되죠.”
“왜요?”
“내가 무슨 속좁은 소인배 같잖아요.”
“그럼 어떻게 물어볼까요?”
“물어보고 자시고도 없어요. 내가 이끌테니 당신은 가만히 따라오기만 하세요.”
“왜 그래야 하죠?”

멜리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백검대가 무언가를 하길 원한다면 간섭하지 말고 우리가 하고 싶은대로 내버려두세요.”
“우린 서로 도와야합니다.”
“밤의 늑대들은 모두가 다 그렇게 질척대나요?”

그녀가 조롱하듯 웃어보였다. 그리고 놀렸다.

“누군가 당신을 보고 꼬리 잘린 늑대라더군요.”

 말을 남기고 그녀가 회의장을 떠났다.

“내가 밤의 늑대들 출신이라 경계하는건가……”

버나드가 앉은 채 중얼거렸다.
미셸이 밤의 늑대들을 보고 감탄해서 만든 것이 백검대다.
백검대 탄생 이유를 멜리사도 알고 있는 것인가……?
만약 밤의 늑대들에게 열등감을 갖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아류의 행동이다.
아류가 되지 않으려면 그녀는 질투심을 지워야한다.

“대장님이 화난 이유를 알려줄까?”

밖으로 나오자 베네피카의 쌍둥이 자매가 미소를 짓고 서있었다.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녀들의 검은색 가죽옷이 반들반들 윤기가 흘렀다.
각자 허리에 찬 윈드쇼텔도 눈에 들어왔다.

“그리아와 카샤라고 했던가? 말해주면 고맙겠군.”

왼쪽 얼굴에 문신을 한 그리아가 입을 열었다.

“도머 가문.”

오른쪽 얼굴에 문신을 한 카샤가 이어 말했다.

“저베이스 공.”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그의 배신을 사전에 감지하지 못해 미셸님께 질책을 들었지.”

저베이스라면 아킨테 군영에서 간첩 활동을 벌이다 버나드의 제보로 붙잡혀 처형당한자다.

“당신이 그녀에게 모욕을 안겼어.”

카샤가 장난스런 눈빛을 보내며 혀로 입술을 핥았고 그리아는 나란히 서있던 카샤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자존심이 강해.”
“미셸님에게 혼나는걸 제일로 싫어하지.”

고양이처럼 요염한 그녀들의 몸짓이 눈에 조금 거슬렸으나 버나드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줘서 고마워.”

그가 물었다.

“근데 내게 알려주는 이유는 호의인가 아니면 나대지 말라는건가?”

그리아가 가까이 다가와 붉은 입술로 귓가에 속삭였다.

“카샤가 당신이 마음에 든대. 백검대 기사들을 쓰러뜨리는 모습에 반했나봐.”

 순간 버나드의 안면근육이 움찔거렸다.
그리아가 그의 귓볼을 진하게 핥아 올렸기 때문이다.
그녀의 혀가 떨어지면서 침으로 젖은 귀가 공기에 닿아 시원했다.

“영광이군.”

버나드가 카샤를 바라봤다.
그녀가 자신을 흥미로운 눈길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카샤의 관심에 찬물을 끼얹었다.

“하지만 난 연인이 있어.”

***


다음날 기상은 빨랐다.
새벽시간에 식사를 마치고 출발했다.
제국까지의 이동 경로는 멜리사가 그녀의 참모진들과 직접 짰고, 버나드는 초기 경로가 그의 생각과 같았기에 일단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의아했는지 먼저 다가온 것은 멜리사였다.

“어제 한번쯤은 날 찾아와서 항의할줄 알았어요. 밤 늦게까지 갑옷을 입고 대기했지만 오지 않더군요. 승복한건가요?”
“승복했다면 당신을 찾아가서 머리를 조아렸겠죠. 승복하지 않았으니까 안갔던겁니다. 당분간 당신의 지휘 능력을 지켜볼까 해요.”
“날 감시하겠다고요?”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겠다고요.”

멜리사가 코웃음을 쳤다.

“왠지 기분 나쁘군요.”

백검대의 인원은 칠십명의 기사와 백명의 종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개개인의 장비와 방어구는 종자들까지 모두 최상품으로, 이 정도면 소영지나 요새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함락시킬 수 있는 전력이었다.

버나드는 그런 백검대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았으나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제국까지 무난한 여행을 바란다면 소규모 플랫폼이라도 운영했으면 하는게 그의 바람이었다.

일행이 전부 군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면 적들에게 공격을 받을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반면에 여행객이나 귀족 같은 평범한 민간인이 섞여 있다면 공격 받을 확률은 급격히 낮아진다.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그 가문의 위상이 땅으로 추락하는 것과 동시에 백성의 원망을 사게될게 불보듯 뻔하니 함부로 기습이나 전면전을 감행하기가 어렵다.

‘제 2차 걷는 사자 전쟁’은 농노들까지 싸그리 끌어모아 총력전을 벌이는 영지전이나 국가전 같은게 아니다.
왕의 자식들간의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모험의 여정’일뿐, 엄밀히 말하면 샤를의 이복형제자매들은 모두 다 여행자다.

같은 핏줄을 물려받은 무리끼리의 여행중에 벌어지는 싸움이거늘, 그런 와중에 다른 영지의 민간인을 다치게한다면 과연 왕이 될 자격이 있는 자일까? 백성들은 의구심을 품을 것이다.
따라서 샤를의 이복형제자매들이 제정신이라면 민간인이 섞여 있는 본진을 함부로 칠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다. 진짜 전쟁이 아니니까.

 점을 노리고 외부인들을 방패막이로 삼았으면 좋겠는데 어째서인지 멜리사는 그럴 의도가 없어 보였다.
버나드는 그 점이 아쉬웠다.

“부대 휴식!”

멜리사의 명령으로 모두 걸음을 멈췄다.
북서쪽으로 향한지 반나절이 지나 잠시 쉬었다 가려는 참이었다.

말에서 내리던 버나드는 문득 무언가를 감지하고 반사적으로 뒷덜미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순간적으로 오한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때 주변의 산 어딘가에서 영혼을 찢는듯한 커다란 비명이 귀청을 때렸다.

-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

그 직후 발밑으로 지진이 일어났고, 귀를 막고 있던 사람들이 말위에서 굴러 떨어지거나 돌부리에 걸려 바닥에 넘어졌다.

“으아악!”
“무, 무슨 일이야!”

지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지만, 갑자기  수 없는 일이 벌어지자 사람들 사이에 두려움이 번져나갔다.
그런 와중에 멜라니아가 다가와서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운이 나빴구나. 산이 우리를 공격할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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