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되찾는 노력, 수련42
야영지 입구에 도착하자 역시나 소란스럽다.
기사 여러명이 남녀 세 사람을 둘러싼채 위압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한쪽에는 샤를과 더불어 그녀의 호위기사 클레어가 보였다.
“영애님은 언제 나오셨지.”
잠시 입구쪽을 둘러보던 멜리사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버나드 경은 어디에 있지?”
때마침 먼저와 있던 기사 한명이 멜리사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버나드 경은 어디 있나?”
“저기 저 자입니다.”
기사는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훤칠한 청년을 가리켰다.
“저 사람이 버나드 경이라고? 내가 알기로는 아이라고 들었는데?”
“본인 맞다는데요?”
“그럴리가.”
뭐가 어떻게 된건지.
잠시 생각하던 멜리사는 어쩌면 버나드 경이 맞을수도 있겠다 싶었다.
미셸의 말로는 십대 중반의 소년이라 했는데, 십대 소년중에 유난히 성장이 빨라 또래보다 체격이 큰 아이들이 더러 있다.
그런 부류가 아닌가 여겨졌다.
좌우지간 멀찌감치 떨어져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
기사들은 통과시켜주지 않겠다는듯이 앞길을 막고 서 있었다.
“버나드 경, 당신을 기다리느라 우리 일정이 이틀이나 지체되었단 말이오.”
말을 한 이는 건장하고 우락부락한 덩치를 가진 기사였다.
그의 표정이 매우 도발적이고 험상궂다.
“낭비한 시간을 어떻게 보상할거요?”
순간 버나드는 이들이 일부러 시비를 걸려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예전에 부대 생활을 경험하면서 자주 겪어본 장면이다.
‘으레 거치는 시험이 찾아왔군.’
그런데 머릿속에 작은 의문이 솟구쳤다.
일부 기사 무리와의 단순 기싸움인가 아니면 상관의 명령으로 전체가 단합하여 자신을 길들이려는 속셈인가.
뭐 어느쪽이든 좋다고 생각했다.
마침 자신도 향상된 기량을 시험해볼 상대를 찾고 있던 중이었으니까.
이들의 도발에 응해주기로 결심했다.
데보라가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말 한마리를 세 사람이 타고 오느라 늦었답니다. 좀 봐주세요.”
우락부락한 사내가 데보라의 가슴을 힐끗 보고는 히죽대며 말했다.
“가슴이 정말 크군요 레이디. 제게 당신과 데이트할 영광을 주신다면 눈감아 드리지요.”
“그리고 다음 데이트 상대는 접니다.”
우락부락한 사내 옆에 나란히 서있던 철제 투구를 쓴 기사가 낄낄 거리며 끼어들더니 덧붙였다.
“밤도 같이 보낸다고 맹세하면 버나드 경을 순순히 안으로 들여보내주겠습니다.”
“하하하.”
버나드 일행을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 다음은 내 차례야!”
“돌려먹자고!”
“진짜 탐나는 여자야!”
“가슴 만지면서 따먹으면 죽이겠다!”
기사들 중 절반은 멜라니아를 가리켰다.
“난 이 여자가 좋아!”
“나도 그 여자로 할래!”
“꽉 조이게 생긴거봐라!”
멜라니아는 기사들이 떠드는 소리가 나쁘지 않은지 조용히 미소만 머금고 서있었다.
반면에 데보라는 표정은 웃고 있었으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아킨테군에서 가장 강한 분들이라더니 이제보니 쓰레기들만 모여 있었군요?”
“뭐? 뭐 이 계집아?”
우락부락한 사내가 데보라를 노려보자 버나드는 즉시 칼을 빼들어 칼날로 그의 눈앞을 가렸다.
“볼일은 내게 있을텐데? 엉뚱한 곳에 화풀이하지 말라고.”
그의 말에 웃고 있던 기사들의 입가에 걸려있던 미소가 단숨에 사그라들었다.
모두가 굳은 표정으로 버나드를 주시했다.
기사들 간에 먼저 칼을 꺼내들었다는 것은 대단한 도발이다.
싸움을 신청한 것과 다름없었다.
“여자들은 건들지 말고 할 말이 있으면 내게 하라고.”
철제 투구를 쓴 사내가 씩 웃었다.
“널 상대하는 것보다 저 젖탱이 큰 여자랑 노는게 더 재밌다고.”
“이러면 내게 흥미가 생기려나?”
버나드가 그를 향해 차가운 미소를 보냈다.
그 직후, 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이던 칼날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쏜살같이 휘둘러졌다.
푹!
철제 투구를 쓴 사내가 비명을 질렀다.
버나드가 어깨보호대 아래의 이음새를 찔렀던 칼을 뽑아내자 사내가 어깨를 부여잡으며 반사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기사들이 욕설을 뱉으며 일제히 칼을 뽑아들었다.
“돌았군!”
“작살을 내주마!”
멀리서 지켜보던 멜리사가 담담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시작됐군.”
그녀와 마찬가지로 다른쪽에서 구경하고 있던 샤를과 클레어도 한마디씩 주고 받았다.
“암만 봐도 저 녀석 버나드를 닮은것 같단 말이야. 안그래 클레어? 신께서 머리랑 발을 잡고 위아래로 잡아땡겨서 몸을 늘려주신게 아닐까?”
“버나드 경의 몸은 밀가루 반죽이 아니에요. 그냥 저 사람은…… 버나드의 형이 아닐까요?”
“그 녀석 형제도 있었어?”
“들어본적은 없어요. 근데 너무 닮아서……”
기사들의 분위기가 살벌해진 가운데, 버나드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양손을 펼쳐보였다.
“설마 나 한명을 상대로 한꺼번에 덤빌 생각들인가? 자네들은 기사의 명예도 없는건가? 한명을 상대로 열명이 달려들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아주 가관이겠군. 기사가 아니라 동네 양아치들이라며 세상이 비웃을거야.”
“저, 저 자식이……!”
말귀를 알아들었는지 기사들이 함부로 달려들진 않았다.
“모두 물러나있어! 내가 상대한다!”
철제 투구를 쓴 기사가 이를 악물고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왼쪽 어깨에서 흘러나온 핏방울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가 버나드를 죽일듯이 노려봤다.
“너 이 자식. 가만 안둘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들었다.
“좋아, 받아주지.”
버나드는 뒤를 돌아보며 데보라와 멜라니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멀리 떨어져 있어.”
“버나드, 피곤하지 않아? 종일 말타서 힘들텐데.”
“걱정마.”
걱정하는 데보라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멜라니아를 바라보자 그녀가 킥킥 기분 나쁘게 웃어댔다.
“네놈이 발리는 꼴을 보고 싶다. 오늘밤 잠이 잘 올것 같아.”
“그딴 말 지껄이면 6개월 뒤에 처녀혈이랑 키클롭스의 정액을 구해주지 않는 수가 있어. 그때가서 애걸복걸 하지마. 우는 얼굴을 발로 차버릴테니까.”
“흥, 싸가지 없는 놈.”
두 사람이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자 버나드는 다시 철제 투구를 쓴 사내를 돌아보았다.
“먼저 통성명이나 하지. 난 미셸님께 인정받은 오크를 두려워하지 않는 기사 버나드. 그대는?”
“나는 오우거 사냥의 선봉장 바라트의 아들 소르건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케센의 소르건이지. 오늘 네 녀석의 머리통을 두쪽으로 쪼개주마.”
소르건은 보란듯이 양손을 써가며 칼을 붕붕 돌리는 진귀한 묘기를 선보였다.
척 봐도 칼을 많이 다뤄본 솜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버나드는 더욱 이 싸움이 기대가 됐다.
분지에서 갈고 닦은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도록 만만찮은 상대가 나와주길 바랐으니까.
“내 어깨를 찔렀으니 넌 그 이상의 대가를 치러야 할거다. 각오해라 버나드!”
소르건이 발을 박차며 빠른속도로 달려들었다. 확실히 입만 산 자는 아닌게 분명했다.
돌진해오는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 어디가서 방귀 정도는 시원하게 뀌고 다닐만한 실력과 속도였다.
하지만 버나드는 눈 한번 깜빡하지 않았다.
‘왼쪽 어깨의 부상이 마음에 걸리나보군. 움직임이 둔해.’
버나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 와중에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는 누구나 소르건의 우세를 점쳤다.
혹은 비등비등한 싸움이 된다할지라도 결국엔 소르건이 이기리라 믿었다.
왜냐하면 그는 아킨테의 자랑스러운 부대이자 최강 정예인 백검대 소속이니까.
아울러 그가 아킨테 지역에서만큼은 내로라할 정도로 명성 높은 가문 출신이었으니까.
혈통 좋은 그가 무명의 기사에게 당한다는 것은 동료들의 머릿속에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설마 하는 자그마한 의심조차도 없었다.
무조건 이기는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들은 곧 깨달았다.
잘난 출신 배경이 결코 실력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값비싼 갑옷을 몸에 걸치고 있어봐야 강자 앞에선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크악!”
버나드를 향해 기세 좋게 달려들던 소르건은 이내 거대한 장벽에 부딪힌듯 허무하게 튕겨져 나갔다.
몇 번의 칼질을 주고 받았을 뿐인데, 끝내 데굴데굴 바닥을 구르다 나자빠진 그의 모습을 보며 동료 기사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무리 부상을 당했다지만 뭐, 뭐가 이리 쉽게 끝나?”
“우리가 뭘 본거야……?”
다들 충격에 빠져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버나드가 칼을 높이들며 외쳤다.
“내가 늦게와서 불만인 분들 계시면 계속해서 앞으로 나오십시오. 얼마든지 상대해드리겠습니다!”
버나드는 내심 소르건한테 실망했다.
아직 검기조차 안썼건만 너무 싱거운 상대였다.
그래서 더 강한 상대를 원했다.
있을것 아닌가.
아킨테가 자랑하는 백검대라며.
“다음 또 없습니까? 없으면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