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되찾는 노력, 수련41
“그 녀석은 왜 며칠째 소식이 없는거지?”
샤를이 바로 변명하듯 덧붙였다.
“오해하지마. 호위기사란 녀석이 제 주인을 안지키고 농땡이를 쳐서 그런거니까. 그 녀석한테 전혀 관심없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샤를은 수시로 버나드의 행방을 물으면서 며칠을 지냈다.
“돌아오면 아주 혼쭐을 내줄거야.”
버나드가 언제부터 자신의 호위기사였다고, 하루종일 그를 향해 짜증을 부리다가 가끔씩 클레어가 ‘그가 보고 싶으신가요?’ 하고 물으면 무척 황당해하면서 똑같은 답변만 되풀이했다.
“걷는 사자 전쟁에 일절 관심도 없었는데 그 녀석 때문에 제국 수도까지 가게 생겼으니까 책임져야지!”
그녀의 말도 맞다.
샤를은 미셸의 명령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다시피 제국 수도로 향하게 되었고, 그 부분에 있어 가장 큰 공헌을 한 버나드를 향해 온갖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다. 쓸데없이 생고생만 하게 생겼으니까 말이다.
“난 정치에 관심없어! 그리고 아직 어리다구! 왜 그딴 일에 일일이 신경쓰지 않으면 안되는데?! 뭐하러 그 먼 곳까지 가야하냐고!”
매일 안락하고 포근한 곳에서만 지내다가 돌연 낯선 길에 들어선 그녀는 얼마전 미셸이 떠난직후부터 계속 불안한 상태였다.
그 불안감은 때로는 히스테리를 일으켰고 또 때로는 눈물을 가져왔다.
샤를은 가끔씩 축 처진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가기 싫어……”
그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면서 클레어는 며칠전 버나드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겁쟁이 클리프를 처치한 그날 밤이었다.
늦은밤, 숙소로 돌아와 부어오른 손목을 찬물에 담그고 있는데 버나드가 찾아왔다.
“회복이 늦는거 같아서 봐줄려고 왔어. 손 줘봐.”
그는 거리낌없이 클레어의 숙소로 들어와 그녀의 손을 잡고 연신 주물럭 거렸다.
마나의 흐름에 대한 지식이 있는듯 그가 계속 만져주니까 붓기가 가라앉고 통증도 줄어들어 괜찮았으나, 문득 현 상황이 아이러니했다.
왜냐하면 한밤중 남자와 단 둘이 숙소에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손을 만져주고 있다. 친하지도 않은 남자가 계속 손을 만지니 왠지 모를 반감이 생겨 거북했다.
버나드의 모습은 자신보다 키 작은 소년이었기에 가벼이 넘길 수도 있었지만, 지금껏 그가 보여온 행보 때문인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른처럼 보였고 그래서일까 클레어는 버나드의 따스한 손길에 자기도 모르게 양볼이 붉어졌다.
“좀 괜찮아졌지?”
“응……”
“주무를땐 여기랑 여기를 집중적으로 꾹꾹 눌러줘야해.”
“응……”
“아침이고 점심이고 저녁때고 수시로 만져줘. 그래야 빨리 가라앉으니까.”
“응……”
“그리고 여기도 여기지만 더 빨리 나으려면 여기도 주물러주면 좋아.”
심지어 버나드의 행동은 더욱 과감해져서, 그녀의 손목을 주무르던 그의 손이 갑자기 클레어의 오른팔을 들어올리더니 겨드랑이 밑을 꽈악 움켜잡았다.
클레어는 반사적으로 움찔하며 신음을 질렀다.
“꺄아!”
“놀라지마. 여길 주물러야 손목의 붓기가 빨리 가라앉아.”
“으, 응……”
너무나 자연스럽게 말하기에 클레어는 무심코 그가 하는대로 내버려뒀다.
버나드는 태연하게 계속 그녀의 오른팔 겨드랑이 밑을 꾹꾹 주물렀고, 그러는 동안 클레어는 간지러운 것도 간지러운 것이지만 묘한 흥분이 피어오르며 야릇한 쾌감이 몸안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그로인해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어쩔 줄 몰라했으나 일정 시간이 흐르자 그의 말대로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야릇한 흥분감이 진통제 역할이라도 한 것인지 신기하게도 퉁퉁 부은 손목의 통증이 미미할 정도로 사그라들며 많이 편안해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너무 나른하고 좋은 나머지 어느 순간부터는 밤새도록 그에게 겨드랑이 마사지를 받고 싶은 기분까지 들었다.
삼십분정도 지나자 마침내 버나드의 손길이 멈췄다.
그가 흐뭇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도 시간있으면 봐줄게.”
그의 손길이 겨드랑이라는 은밀한 곳까지 닿고, 또 자신을 도와줘서 그런지 클레어는 그의 미소에서 인간적인 호감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수줍고 민망한 기분도 들었기에 그녀는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응……”
밤 분위기에 취한 탓인지 낮에 봐오던 그보다 밤에 보는 그가 더 인간적으로 가깝게 느껴졌다.
오늘밤 그와 보낸 시간이 왠지 감미롭고 달콤했다.
내일도 또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솟구쳤다.
“내, 내일도…… 꼭 부탁해.”
버나드가 상큼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
그대로 나가려던 그가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듯 뒤돌아섰다.
“샤를리나님 있잖아.”
“응.”
“샤를리나님을 아케르니아 제국의 수도로 데려가는게 샤를리나님을 살리는 길이야. 그 분의 미래를 위해서 클레어도 날 도와줬으면 좋겠어.”
그의 목소리는 묘하게 엄숙했다.
클레어는 홀린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버나드의 말이라면 신뢰가 가. 질투나지만.’
아무튼 샤를의 숙소에서 클레어가 멍하니 버나드를 떠올리고 있을때, 밖에서 갑자기 어떤 시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샤를리나님! 버나드 경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순간 클레어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버나드?”
2주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던 그가 나타났다고 하자 샤를 또한 뒹굴던 침대에서 벌떡 일어서며 눈을 크게 떴다.
“그 녀석이 돌아왔다고?”
“예! 지금 야영지 입구에서 백검대 기사들과 얘기하는 중이래요! 근데 들리는 말로는 왠지 싸울듯한 분위기라고 합니다!”
“클레어! 어서 가보자!”
샤를은 허겁지겁 옷을 챙겨입고 클레어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잠시도 지체할 수 없다는듯 버나드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고, 이윽고 야영지 입구에 도착하자 열명 가량되는 백검대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남자와 두 여자가 보였다.
“어?”
먼 발치에서 그들을 둘러보던 샤를이 고개를 갸웃했다.
“없는데?”
버나드는 분명 데보라 및 멜라니아와 함께 사라졌었는데, 현재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건장한 체격의 미남 청년 한 명과 섹시한 로브를 입은 성숙한 여자, 그리고 데보라뿐이었다.
“버나드의 종자 밖에 없는데? 그렇지 클레어?”
클레어도 눈을 크게 뜨고 먼 곳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녀의 눈에도 버나드의 종자인 데보라 밖에 보이지 않았다. 키 작던 소년인 버나드와 노파 멜라니아가 안보였다.
“두 사람이 키가 작아 갑옷을 입은 기사들한테 가려진게 아닐까요?”
“더 가까이 가볼까?”
“네.”
한편, 버나드가 도착했다는 소식은 백검대장 멜리사에게도 전해졌다.
“미리 말씀드린대로 우리 단원들이 싸울 분위기를 조성중입니다.”
“소년을 상대로 심하게 굴지는 마. 적당히 기만 죽이고 끝내.”
“예, 맘(mom). 앞으로 말을 잘 듣게끔 눈물만 살짝 빼주고 멈추겠습니다. 함께 구경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부관의 제안에 책상에 앉아있던 멜리사가 피식 웃었다.
“미셸님께서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셨는데 안 볼수야 없지. 그 아이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눈으로 보고 싶군. 가자.”
멜리사는 순백의 갑옷에 흰 망토를 걸친 채 막사를 빠져나와 버나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녀가 밖으로 나오자 여러 기사들이 뒤따르며 그녀와 동행했다.
“맡겨주십시오 멜리사님. 그 녀석의 기를 확실히 죽여놓겠습니다.”
일찍이 백검대는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때 미셸에게서 여러 명령을 하달 받았었다.
대부분 샤를의 호위와 안전을 위한것이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백검대 전원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게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무슨 일이든 버나드 경과 잘 상의해서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버나드 경이 누구입니까?”
멜리사는 명문가 출신으로 자부심이 대단했고 그런 그녀가 무명의 기사와 머리를 맞대고 상의를 해야한다는 것에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게다가 백검대는 자신의 부대다.
자신이 이끄는 방향대로 흘러가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참견하는 사람이 있어봐야 일을 이루기 어렵게 하고 귀찮게할 뿐이라는 생각 밖에 안들었다.
“어느 가문 출신의 기사입니까?”
“출신성분으로 그가 내세울만한건 없어. 고아로 자라났고 이제 갓 십대중반의 소년일뿐이야.”
“예?!”
멜리사는 기가 막혔다.
겨우 소년 따위와 일을 상의하라니?
“미셸님, 이런 말씀을 드려 대단히 송구스럽습니다. 샤를님을 제국까지 안전하게 호위하는 일은 전적으로 저와 제 단원들이 맡겠습니다.”
그러자 미셸이 고개를 저으며 잘라말했다.
“그건 안돼. 이 계획의 최초 입안자는 버나드 경이야. 그의 구상대로 흘러가도록 협력해주렴. 머릿속에 생각해놓은게 있는 것 같으니까.”
“종기사 수준의 하급기사의 말을 귀담아 들으란 말씀이십니까? 제 부하들이 저를 비웃을 겁니다. 우리 백검대는 아킨테군의 핵심이자 자랑이란걸 아시잖습니까. 전투 경험도 없을듯한 그 아이가 뭘 안다고요.”
“그는 나이에 비해 아는게 많고 실력도 출중해. 또한 위기상황을 돌파하는 능력도 뛰어나지. 이 점은 니콜라스 경도 인정했어. 니콜라스 경은 버나드를 향해 이렇게 말했지.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지는 괴물이라고. 나도 공감해.”
미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멜리사. 너도 그 아이를 보게되면 내 말을 이해하게 될거야.”
다시 현재.
버나드가 있다는 곳으로 향하던 멜리사는 그때의 대화를 떠올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죄송합니다, 미셸님. 전 제 주관대로 샤를님을 제국까지 모셔다 드릴겁니다. 고작 나이 어린 무명 기사 따위에게 백검대의 운명을 맡길 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