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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화 〉되찾는 노력, 수련36 (69/200)



〈 69화 〉되찾는 노력, 수련36

계단을 올라 단장 집무실에 도착했을때 누군가 안으로 들어간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블라쉬가 몇주째 자리를 비운 동안 먼지가 쌓였던 바닥에 발자국이 남겨져 있었다.
최소  명이다.

“……”

줄리안은 녹슨 철고리를 잡아당겼다.
나무문에 달린 경첩이 삐거덕 소리를 내면서 달그닥 열렸다.

“누가 내 허락도 없이 방에 들어온거야?”

능청스럽게 말하며 안으로 들어가자 예상대로 세 사람이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갑옷을 차려입은 남자 둘과 여자 하나, 모두 아는 얼굴들이다.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줄리안 단장님. 오늘부로 나이트섀도우에 배치를 명령 받은 로잘리나 입니다.”
“저는 리비오 입니다.”
“함께 일을 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저는 락 입니다.”

줄리안은  사람을 둘러본뒤 허탈하게 웃었다.

“안소니 후작님의 따님에, 후작님의 밑에서 일하던 두 기사분들까지, 안소니 후작님께서 날 철석같이 믿으시길래 웬일인가 했더니 대놓고 자기 사람을 쓰라는구만. 감시하겠다는거야 뭐야.”

로잘리나가 오해라는 얼굴로 앞으로 나섰다.

“저희는 어떠한 명령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저 줄리안 단장님을 열심히 도우라는 말씀 밖에 없으셨습니다.”
“갓 부임하신 나이트섀도우에서 기반을 다지시려면 저희의 힘이 필요하실 것입니다.”
“저희는 줄리안님을 돕기위해 온 것입니다.”
“그렇다고 믿어줄게. 아무튼 반가워 다들.”

줄리안은 책상에 앉아 블라쉬가 쓰던 물건들을 하나씩 쓰레기통에 버리기 시작했다.
잠시 그러다  사람을 쳐다보았다.

“뭐해? 인사 끝났으면 나가보지 않고.  할말 있어?”
“명령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사람은 나가고 로잘리나만 남았다.
줄리안이 그녀를 멀뚱히 쳐다봤다.
로잘리나는 얼굴이 조그맣고 둥글둥글하게 생긴 미인이었다. 약간 볼살이 찐  같았으나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아 나이에 맞게 앳되고 순진한 맛이 있었다. 그 곱상한 얼굴은 전형적인 귀족 가의 여식 답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풍족하게 자란 숙녀의 모습보다는 패기있고 씩씩한 인상이 더욱 강했다.
그녀는 누가 뭐래도 고생스러운 생활을 경험한 당당한 기사다.

“왜 남아있지?”
“단장님께 말씀드리고 싶은게 있습니다.”

줄리안은 미소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며 갑자기 쌍스러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유두는 분홍색을 띠는게 품지 않아도 처녀인게 확실했다네~♪ 그 밑에 달린 아랫입술은  말 할  없이~”

로잘리나가 인상을 썼다.

“뭐하시는거죠?”
“널 보니 노래가 떠올라서 한번 불러본거야.”
“저는 너가 아니라 로잘리나 경입니다. 꼭 그렇게 불러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알았어, 꼿꼿한 자세를 가진 로잘리나 경. 난 예쁜 여자를 보면 절로 흥이 올라 야한 노래를 부르곤 한다네. 자네 아버지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곱게 키운 딸을 나처럼 천박한 인간에게 보냈을까? 뭘 배울게 있다고? 혹시 야한 노래?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저를 의심하시는군요.”
“자네 포함 아까 걔들까지.”

줄리안은 거의 눕다시피 의자에 삐딱 하게 앉은 채 히죽 웃었다.

“전부 기분 나빠.”

로잘리나는 다소 충격을 받은듯 했다.

“저희 아버지께 충성을 맹세하지 않으셨나요?”
“했지.”
“그러면서  불신하는거죠?”
“걱정마. 요즘 예민해서 그런것 뿐이니까. 후작님에 대한 충성심은 변하지 않았어.”

줄리안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옛상관은 기분이 들쑥날쑥하는, 감정기복이 심한 날  달래주었지. 근데 지금은 날 다그쳐줄 사람이 없어. 개줄이 풀린 기분이야.”
“마스터울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지마.”

줄리안이 미소를 지은 채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로잘리나는 살짝 두려움이 솟구쳤다. 자신을 노려보는  같기도 하고 그냥 쳐다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살기가 깃든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의 눈빛을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코앞까지 다가와서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씀드릴거라는건?”
“……”

로잘리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전 아버지의 첩자로 온게 아닙니다.”
“응, 그리고?”
“우리 가문을 위해 마스터울프를 잡고자 이곳에 왔습니다. 순전히 개인적인 목적입니다.”
“그리고?”
“남들은 당신들을 몰랐지만  어렸을때부터 마스터울프와 당신의 존재를 알고 있었습니다.”
“놀랍군.”
“어느날 우연히 아버지의 서재에서 뛰어놀다 단장님과 마스터울프에 관한 기록들을 보게됐죠. 그날부터 밤의 늑대들을 알게되었습니다. 왕을 위해 미친 사자를 사냥하는 늑대들을 말이죠.”
“소감은?”
“원망스러웠습니다.”

줄리안이 피식 웃었다.

“어째서?”
“아버지의 일을 방해하는 나쁜자들이었으니까요.”
“마스터울프와 안소니 후작님은 서로 정적이었지.”
“예, 정적…”

말끝을 흐리던 로잘리나의 눈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

“마스터울프는 왕비님과 왕세자님을 시해한 반역자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 그란델 가문에 가장 방해가 되는 존재입니다. 이게 바로 제가 나이트섀도우에  이유입니다. 아버지와 가문의 앞날을 위해 그를 확실히 처리하기 위해서.”
“효녀 났구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줄리안은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면서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마스터울프는 자기도 모르는새에 원한을 사는 재주도 있나보네. 그것도 파릇파릇한 아가씨한테.”
“그러니 믿어주십시오. 전 단장님을 감시하러 온게 아니라 마스터울프를 제거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제 목적은 오직 그것뿐입니다.”

로잘리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줄리안도 그녀의 말이 진심임을 알아차렸다.

“각오와 의지는 잘 알겠다.”
“믿어주시는 겁니까?”
“이미 배치 받았는데 안믿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잖아? 자, 어쨌든 일이나 시작해볼까? 그래야 봉급이 나올 것 아냐.”

그는 로잘리나에게서 떨어지며 몇주전 버나드가 평민 남매와 같이 아킨테 플랫폼으로 향하던 것을 떠올렸다.

“나가서 아킨테의 미셸의 위치를 파악해봐. 파악하는 즉시 내게 보고해.”
“그곳에 마스터울프가 있는겁니까?”

줄리안이 그녀를 돌아봤다.

“마스터울프의 얼굴을 본적이 있나?”
“아뇨, 없어요. 그의 존재는 알고 있었으나 실물을 마주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가 미소지었다.

“경에게 마스터울프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영광을 선사해주지. 빨리 가서 아킨테의 미셸의 위치를 파악해.”


***

다음날 줄리안이 이끄는 나이트섀도우들이 왕도를 떠났다.
일행은 로잘리나, 리비오, 락을 비롯해 그들의 종자들인 종기사들까지 총 스무명이었다.

“단장님, 세븐로얄을 익힌 마스터울프의 힘은 매우 강력하다고 들었습니다. 우리의 힘만으로 그를 잡는게 가능할까요?”

왕도를 떠난지 사흘째에 리비오가 그렇게 물었다.
그에 줄리안은 뜻모를 미소를 지으며 아주 간단히 대답했다.

“충분.”

줄리안 일행은 중간중간 마을에 들르는 일을 최소화하고 빠르게 달리는데 주력했다.
 결과 일주일째에 바들레인 영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겁쟁이 클리프와 막 싸움을 끝낸터라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인 아킨테의 플랫폼을 발견할  있었다.

“아킨테의 미셸에게 발각되면 왕궁과 분쟁이 일어날 수 있으니 조용히 움직여야겠군요.”

나이트섀도우들은 아킨테의 플랫폼에 몰래 잠입하기로 결정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로잘리나가 버나드의 얼굴이 그려진 몽타주를 손에 쥐고 자신있게 나섰다. 뒤이어 리비오와 락도 손을 들었다.

“플랫폼이 넓어 로잘리나 경 혼자서는 찾기 힘들겁니다.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두 사람으로 부족할테니 저도 가겠습니다. 셋이서 찾으면 쉬울겁니다.”

줄리안은 그들이 원하는대로 해주었다.

“전부 갔다와.”

 사람은 각자 종기사 두 명씩을 데리고 아킨테의 플랫폼으로 몰래 잠입했다.
이윽고 한나절이 지나 그들 모두 은신처로 되돌아왔다.
다들 지쳐보였다.
많이 걸어다닌탓에 아픈 다리를 주무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서 저마다 머리위에 물음표를 띄웠다.

“마스터울프가 있는게 확실합니까?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 아킨테의 미셸의 막사가 있는 곳까지 최대한 아슬아슬하게 접근해봤는데 거기서도 마스터울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몽타주가 잘못된건가 아니면 사람이 없는건가. 다른곳으로 뜬거 아닙니까?”

세 사람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으나 줄리안은 느긋했다.
그는 세 사람이 버나드를 못 찾은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색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갔다올게. 처음부터 괜한 수고할 필요없이 얼굴을 아는 내가 직접 갈걸 그랬네.”

로잘리나가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칼이나 갈아놓고들 있어.”

줄리안은 평민으로 위장한뒤 즉시 은신처를 떠났다.

***

날이 저물어갈 무렵, 버나드는 텐트 주변에 모닥불을 지피기 위해 플랫폼 밖에서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다.
데보라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주변에서 나물을 뜯는 중이었다.
장작을  모았을때쯤, 데보라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버나드! 반가운 손님이 오셨어! 저번에 우리를 도와주셨던 그 이웃형님 기사님이야!”
“이웃형님 기사님?”

고개를 갸웃하며 데보라가 있는 곳을 쳐다봤다.
곧게 자란 나무 옆에 데보라와 나란히 서있는 줄리안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버나드의 눈이 커졌다.

“이런……”

오랜만에 만난 줄리안을 향한 반가움보다 곧장 실없는 웃음부터 흘러나왔다.
그가 온 이유를 버나드는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익숙한 풍경이었으니까.
누군가를 암살할때 자신의 모습을 줄리안에게서 엿볼 수 있었다.

“두 분 즐겁게 대화나누세요! 전 저쪽에서 나물 캐고 있을게요!”

데보라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멀어져갔다.
줄리안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오랜만에 만나니 뭉클하네요. 멀리  도망가 있으시지.”

그는 보란듯이 품안에 숨겨두었던 칼을 슬며시 꺼내보이고는 도로 감췄다.
버나드는 태연히 그를 맞이했다.

“얼굴이 좋아보이네. 반갑다.”
“단장님은 여전히 작으시군요. 꼬마네, 꼬마.”

두 사람은 먼 풍경을 바라보며 나란히 풀숲에 앉았다.

“안소니 밑으로 들어간거야?”
“예, 그렇게 됐습니다.”
“블라쉬가 죽어서 널 쓰나보군.”
“어라? 어떻게 아셨어요? 일급비밀인데?”

그는 이내 손뼉을 마주치며 크게 웃었다.

“아하, 예상이 맞았군. 단장님이 죽이셨군요? 블라쉬를?”
“내가 무슨 힘이 있겠어, 도움을  받았지.”
“하긴 그런 몸으로 누굴 죽이겠습니까. 블라쉬한테 처맞기만 할텐데.”

버나드가 피식 웃었다.

“그 방정맞은 입은 여전히 살아있구나.”
“제가 어디가겠습니까.”

줄리안은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제가 왜 왔는지 알고 계시죠?”

버나드의 입가에 해탈한듯한 미소가 그려졌다.

“날 죽이러 온게 하필 너라니 이미 자포자기 했다. 만약 다른 녀석이 왔다면 도망가려고 용을 쓸텐데 네 앞에서 도망치려 해봤자 안될걸 알거든.”
“너무 절망하지 마십시오. 저 하늘에 가서 레아랑 만날지 또 압니까?”
“레아가  욕할거야.”
“큭큭.”

줄리안이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단장님 죽였다고 욕하긴 하겠네요. 아무튼 그건 그거고, 살려달라고 빌기라도 해보시죠? 혹시 모르잖아요. 옛정 때문에 살려줄지.”
“줄리안. 너란 녀석은 남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쾌감을 얻지. 내가 비는 모습을 보며 희희덕 댈게 눈에 선해. 따라서 그런짓 따위는 전혀 할 생각이 없으니 죽일거면 어서 죽여. 다만.”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데보라를 바라봤다.

“저 여자는 조용히 보내줘.”
“소원인가요?”
“명령이다.”
“제 상관도 아니면서.”
“넌 결국 내 말을 들어줄거야.”
“어쭈, 자신만만하시네.”
“나만큼  잘 이해하는 사람도 없지.”
“좀 짜증나는군요. 빨리 죽여야겠어.”

줄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버나드의 뒤로 가서 섰다.
품속으로 손을 넣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머리 내미십시오. 마지막으로 남기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

버나드는 조용히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요르트나란 산이 나온다. 정상에 있는 분지에 키클롭스가 한마리 살고 있지. 네가 데리고 온 애들과 함께 그 녀석을 사냥해줘. 녀석의 심장을 먹으면 본래의 모습으로 조금은 되돌아갈  있다.”
“할말은 그것뿐입니까?”
“지금은 이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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