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되찾는 노력, 수련33
모든 상황이 마무리된뒤 아킨테군은 야영지로 복귀했다.
미셸은 야영지에 도착하자 즉시 명령했다.
“모든 사제를 동원해 부상자의 치료에 전념하도록 하고 기사들은 죽은 전우들을 양지 바른 땅에 묻어주는 것과 동시에 잡아온 죄인들을 심문하라!”
그런 와중에 괴물과 정통으로 부딪히면서 심각한 부상을 당한 사만다는 중태에 빠져있었다.
사제들이 전원 달려들어 신성력을 퍼붓다시피해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깨어나길 기다리는 수 밖에 없을듯 싶습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가?”
“글쎄요, 기약이 없습니다. 영영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미셸은 병석에 드러누운 사만다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사만다는 어렸을때부터 함께한 친구이자 가장 아끼는 가신이었다.
왕궁에서 지낼때 그녀는 미셸의 호위기사였고, 지금은 둘도 없는 인생의 동반자였다.
사만다기 있었기에 마음이 안정되고 무슨 일이든 과감히 추진할 수 있었다. 그녀가 든든하게 뒷받침해줬으니까.
그러나 사만다가 병석에 누워있는 지금, 미셸은 무기력해지며 삶의 의욕을 잃은 기분이었다.
“꼭 살아야해 사만다……”
미셸은 곧바로 중신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 버나드도 참가했다.
“우리의 미래를 결정해야할때가 왔습니다. 나는, 걷는 사자 전쟁에 참전할지에 대한 문제를 오늘 확실히 정하려고 합니다.”
여러 가신들 앞에서 미셸은 작심한듯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 우리는 뜻하지 않은 참사를 겪었습니다. 그 원인은 프레드릭 전하가 꾸민 걷는 사자 전쟁에 심취해 야욕을 품은 겁쟁이 클리프 공에 의한 것이었고, 이에 대해 나는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라는 생각입니다. 우리를 공격하고자 하는 이들은 비단 클리프 공만이 아닐 것입니다. 샤를의 이복형제자매들 중 그 누군가가 다시 우리를 공격해올 수 있습니다. 그 시점은 오늘이 될 수도 있고, 내일이 될 수도 있고, 한달 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평생 공격을 받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 아킨테 가문이 멸망할때까지 말이지요.”
가신들이 웅성거렸다.
“대영주님께서는 왕의 수작에 놀아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걷는 사자 전쟁에 참전하고 싶으신지요?”
침묵이 흐르며 전원 미셸의 입술에 주목했다.
그녀가 진중하게 말했다.
“샤를을 아케르니아 제국으로 보낼 생각입니다.”
가신들이 소란스러워졌다.
“오오, 이런 전쟁인가!”
“안돼!”
“영지에 화를 불러올 것입니다!”
펄쩍 뛰며 미셸의 생각에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으나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었다.
기존에는 가신들의 의견이 하나로 통일되었다면 지금은 달랐다.
걷는 사자 전쟁에 참전하는 것을 반대하는 가신들을 향해 욕설을 뱉는이들이 상당수였다. 그들 모두 이번 클리프의 공격으로 소중한 가족 또는 친구, 전우, 하인, 부하를 잃은 자들이거나, 언제 또 공격당할지 모른다며 우리가 먼저 공세적으로 나서야할때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고, 아예 이참에 샤를의 이복형제자매들을 전부 죽이고 왕좌를 차지하자고 욕심을 내는 자도 더러 있었다.
“당신들은 또 멍청하게 있다가 공격받고 싶으신겁니까!”
“우린 그동안 너무 안일하게 대응해왔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주장한다고 해서 남들도 똑같이 평화를 원한다고 여긴 생각부터가 틀려먹은 것이었지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앞서 나가야합니다!”
그 뒤 가신들끼리 치열한 설전이 오갔다.
말싸움이 번져 주먹다짐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의견은 하나로 정리됐다.
미셸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무리를 지었다.
“좋습니다. 샤를의 이복형제자매들 중 평화를 원하는 자들에게는 평화를, 전쟁을 원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의 뜻대로 칼로 맞서주며, 샤를이 무사히 아케르니아 제국에 도착할 수 있도록 다방면의 지원을 아끼지 맙시다.”
이로써 아킨테 가문도 걷는 사자 전쟁에 참가하기로 결정이 났다.
의논을 마친뒤 잠깐 휴식 시간을 갖고 다음 논의가 이어졌다.
샤를을 어떤식으로 아케르니아 제국으로 보낼지에 관한 세세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완벽한 경호가 우선이었다.
그 다음, 빠른 시간 내에 아케르니아 제국에 도착하는게 관건이었다.
이대로 아킨테 영지에 들렸다가 출발하면 늦는다.
그랬다간 다른 이복형제자매들이 먼저 아케르니아 제국에 도착할 확률이 높았다. 먼저 도착한 자는 제국과 유물 반환 협상을 시작할테고, 만약 협상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왕좌는 그들의 것이 된다.
하지만 현재 아킨테군은 걷는 사자 전쟁에 적합한 부대가 아니었다.
왕도로 여정을 떠나는 미셸을 보좌하기 위해 따라온 일종의 사절단 형태를 띤 집단이었다. 그렇기에 야영지 내에 외부인들을 받아가며 플랫폼까지 운영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임무 수행 능력이 없는 부대로 전투나 호위에 적합하지 않다는 얘기다.
여기에 더해서 오랜 여정으로 인한 피로감도 있었다. 아킨테 영지에서 왕도, 그리고 다시 왕도에서 영지로 귀환하는 길에 다시 멀디 먼 아케르니아 제국까지 간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상당히 힘든일이었다. 당장은 버틸 수 있어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향수병, 피로누적 등에 시달리다가 적을 만나는 순간 단숨에 무너져 버릴 것이다.
따라서 미셸은 아킨테 영지에 주둔하고 있는 ‘그들을’ 떠올렸다.
“백검대를 부릅시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이 상황에 가장 필요한 사람들이 아닐까 싶군요.”
백검대는 미셸이 밤의 늑대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고 모방해 만든 비밀 기사단이다.
아킨테 가문의 최정예 부대이자 미셸의 자랑거리였으며, 군주가 오랜기간 영지를 비우면 수시로 반란이 일어나는 세상이었기에 혹여나 발생할지도 모를 반란에 신속히 대응하기 위해 영지에 남겨두고 왔었다.
“백검대가 도착하면, 샤를을 그들과 함께 아케르니아 제국으로 보냅시다. 어서 연락을 취하세요.”
“예, 신속히 비둘기를 보내겠습니다.”
그렇게 결론지어졌다.
미셸이 이끄는 지금의 아킨테군은 원래 목적 그대로 아킨테 영지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영지를 지켜야하는 미셸이 나중에 샤를의 여정에 다시 합류할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가장 신임하는 총장 사만다가 중태에 빠진 이상 당분간 영지를 직접 도맡을 수 밖에 없었다.
아무튼 걷는 사자 전쟁의 참전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버나드 역시 백검대와 동행하는 것으로 얘기가 됐다.
회의가 끝나자 버나드는 안도한 표정으로 회의막사를 나섰다.
어느새 날이 저물어 있었다.
여러 일이 있었고 참으로 힘든 하루였다.
버나드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레아, 늦었지만 드디어 시작됐어. 기다려줘, 곧 갈게.’
아킨테 가문이 뜻대로 움직여줘서 기분이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앞날에 대한 걱정도 컸다.
앞으로 어떤 난관이 자신과 샤를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긴 몰라도 하나같이 강대한 적들을 만나게 될 것임은 분명했다.
샤를의 이복형제들은 몇몇을 빼고 대부분 귀족들이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가진 힘을 동원해 샤를의 앞길을 막으려 할 것이 틀림없었다.
따라서 그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해놔야 할터, 아킨테 가문이 자랑하는 백검대만으로는 샤를을 호위함에 있어서 부족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버나드는 더욱 확실한 자들을 불러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루로키나의 거지 3남매를 고용해야겠어.”
한때 비밀 조직의 수장이었던만큼 전국 각지에 개인적인 인맥이 없는게 말이 안된다.
버나드는 아는 자들이 많았다.
그 중 하나인 루로키나 거지 3남매는 버나드가 밤의 늑대들 수장이던 시절 종종 고용해서 일을 시켰던 적이 있다.
현재 운명이 바뀐 그가 굳이 정체를 노출하면서까지 그들을 고용하려는 이유는, 과거 어떤 사건을 계기로 서로 끈끈한 유대감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라면 신뢰할 수 있었다.
“돈은 충분해. 아직까지는.”
버나드는 여태까지 여러 가문을 도와주면서 받은 사례금 덕분에 어느 정도 돈을 모아놓고 있었다.
원래는 그 돈으로 자신의 갑옷을 살 생각이었으나, 뜻밖에도 미셸은 영지로 돌아간다고 하니 우선 샤를을 호위하는 사람의 머릿수를 늘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으로 플랫폼 내의 시장골목을 찾아갔다.
이 세계에서 평민이 먼 곳에 사는 지인에게 편지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총 네가지였다.
첫째로 정처없이 떠도는 유랑인들의 손을 통해서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시일이 무척 오래걸린다. 유랑인들은 여기저기 머무르는 것을 좋아하고 게으르기 때문이다.
둘째로 신전을 통해서다. 신전은 같은 신을 모시는 신전끼리 연락을 주고 받을 일이 자주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전국적인 우편망을 가지게 되었다.
셋째로 학교를 통해서다. 이 역시 신전과 비슷한 경우로 전국에 퍼진 학교끼리 우편망을 형성하게 되었다.
넷째로 길드를 통해서다. 아예 편지 배달을 전문적으로 해주는 길드가 있었다. 이를 전령단이라고 일컬었다.
버나드는 전령단을 찾아갔다.
유랑인이든 신전전령이든 학교전령이든 전령단이든, 모두가 여행길의 안전을 위해 자주 플랫폼을 이용했기에 플랫폼에서 그들을 찾기란 식은 죽 먹기였다.
전령단은 시장 골목 한편에 노점을 열어놓고 접수를 받고 있었다.
“뭐어? 루로키나로 보내달라고?”
접수를 하던 사내가 깜짝 놀란다.
“꼬마야, 거긴 무지 위험한 동네잖냐. 아무도 안가려들거다.”
“웃돈이 필요하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 동네, 전령단은 웬만하면 안건들겁니다. 본인들도 편지를 쓰니까요. 연애 편지든, 효도 편지든, 사업 편지든, 뭐든.”
사내가 피식 거렸다.
“그 지역 사정이야 너보다 우리가 더 잘알거다. 꼭 보내고 싶거든 원래 가격의 세 배를내라. 그럼 편지를 받아주지.”
“배달은 확실해야합니다.”
“우리 길드를 못믿는거냐? 우편 배달로 먹고 사는 길드다. 배달질을 개떡같이 하면 뭘로 먹고 살라고?”
이윽고 사내는 접수를 마친뒤 물었다.
“근데 너 같은 꼬마가 그 무서운 곳에 사는 사람을 어찌 아는거냐? 혹시 부모님이 거기 계셔?”
버나드는 아무생각없이 대답했다.
“예, 살아요.”
“허이구, 이거 루로키나 출신을 몰라봤구만. 거기 출신이라면 다들 겁부터 먹잖냐. 아무튼 부모님한테 전한다니 내 최선을 다해 배달해주마. 걱정마라.”
“감사합니다.”
그대로 전령단을 떠나려는데 피에르가 헥헥 거리며 뛰어왔다.
“버나드!”
잽싸게 달려와 멈춰서며 잠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한참 찾아다녔잖아! 헉! 헉!”
“무슨 일로?”
“미셸님께서 찾고 계셔!”
“왜?”
“나도 몰라! 암튼 빨리 가자!”
버나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회의는 끝났고, 저녁 시간이라 모두 쉬고 있는 이때 어떤 일로 찾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피에르와 함께 미셸의 막사로 향했다.
나란히 걸어가는 와중에 호흡을 겨우 진정시킨 피에르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야.”
버나드는 즉시 딱밤으로 피에르의 이마를 때렸다.
“아얏! 왜 때려?”
“나 기사야 인마. 어디서 천한 것이 함부로 야야거려.”
“……”
피에르는 인상을 바득 구겼다.
“버, 버나드 경……”
“뭐.”
“부, 부탁이 있습니다.”
“뭔데.”
“저, 저기… 그러니까……”
피에르는 입을 달싹이며 망설였다.
자꾸 뜸을 들이기에 버나드가 다시 딱밤을 때렸다.
“아얏! 왜 자꾸 때려!”
“빨리 말해.”
그러자 피에르가 아픈 기운을 빌어 속시원하게 말을 뱉었다.
“마, 만약 삽입하면 10초만에 싸줘!”
“뭐?”
버나드가 어처구니 없는 웃음을 지었다.
“무슨 소리야? 삽입이라니?”
“미셸님이 부르는 이유가 왠지 그 목적일 것 같고, 나 이 생활 오래하고 싶다. 그러니까 제발 넣자마자 바로 싸달란 말이야. 응?”
피에르가 울상을 지으며 매달렸다.
“시, 십초! 아, 아니! 1초! 1초만에 싸버리면 네가 별로구나 생각하시고 다음부터 안찾을거 아냐? 그렇게만 해주면 앞으로 내가 맛있는 음식들 몰래 빼돌려서 갖다줄게! 저, 정말이야!”
그의 말이 너무 어이없어서 버나드는 걷던걸 멈추고 그 자리에서 배꼽을 잡고 자지러졌다.
“너, 듣기로는 잠자리 시중을 들기 싫다고 했다던데?”
“누가 그래? 어 맞아. 근데 이 생활을 그만두면 지금처럼 돈을 못 벌것 같아. 내 소비 습관도 사치스러워져서 그걸 감당하려면 결국 미셸님의 시중을 드는 수 밖에 없어. 어쩔 수 없이 해야한다고.”
피에르의 옷이며 향수며 신발이며 장신구며 죄다 값비싼 명품이었다.
“난 음유시인이 직업이었어. 노래도 잘불렀다고. 하지만 미셸님을 만나면서부터 그만두었지. 돈 때문에…… 솔직히 말하면 다시 음유시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
“해. 하면 되잖아.”
버나드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피에르가 얼른 뒤따라왔다.
“말이야 쉽지. 방금 말했잖아. 난 사치에 찌들어 있다고. 거렁뱅이 음유시인의 수입으로는 감당 못해.”
“다 왔다.”
버나드가 발걸음을 멈추며 앞을 쳐다봤다.
미셸의 막사가 보였다.
“이, 일초다! 알았지? 넣자마자 일초! 찍! 조루 마냥 찍 싸버려!”
몹시 긴장한듯한 피에르의 행동이 너무 웃긴 나머지 버나드의 입에서 실없는 웃음이 계속 흘러나왔다.
속으로는 미셸이 그런 이유로 부른게 아니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일부러 장난을 쳤다.
“일초만에 싸줄테니까 앞으로 나한테 음식 갖다 바쳐. 약속?”
“알, 알았어!”
“알았어?”
“매, 맹세합니다, 버나드 경!”
“잘했어.”
버나드는 피에르의 어깨를 토닥이며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막상 안으로 들어서니 평소와 확연히 다른 공기에 버나드의 입가에 그려져 있던 웃음이 사그라들었다.
“버나드입니다.”
“내실로 들어오너라.”
“예.”
내실로 걸어들어갈수록 실내에 한가득 물결치는 매혹적인 향기가 더욱 진하게 풍겨왔다.
‘설마, 아니겠지.’
버나드가 침실로 들어사자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미셸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지었다.
“왔니?”
“예,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침실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미셸을 보며 피에르가 왜 그리 난리쳤는지 비로소 이해가 됐다.
일 때문이 아닌 유희 삼아 부른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