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되찾는 노력, 수련32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자신도 레아처럼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 믿음은 곧 의지, 꼭 잡고 말겠다는 집념이 되었다.
버나드는 또 자신이 믿는 유일한 신에게 기도하는 것도 잊지않았다.
‘힘을 줘 레아!’
마치 버나드의 외침에 응하는 것처럼 별볼일 없는 창에 갑자기 검붉은 마나가 창날을 휘감았다.
지지직!
“이, 이럴수가!”
높이 날아오른 버나드를 넋놓고 바라보고 있던 니콜라스는 눈을 휘둥그레뜨며 깜짝 놀랐다.
“저, 저것은 영걸의 기운이 아닌가!?”
창을 휘감은 검붉은 빛은 이내 태양을 압도할만큼 강력한 빛을 내뿜었다.
너무나 눈이 부셔 누구 하나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손으로 눈을 가리거나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
눈이 아플정도로 따가운 빛에 천사가 강림했다고 저도 모르게 외치는 이도 있었다.
주변이 시끄럽거나 말거나, 버나드는 괴물의 대가리 위로 떨어지면서 정수리를 향해 창을 정확하게 찔러넣었다.
푹!
창날은 막힘없이 쑥 들어갔다.
적당히 박히고 나서도 버나드는 괴물의 대가리 위에 매달린 채 못질을 하듯 한번 더 세게 쑤셔넣었다.
“흐읍!”
푸욱!
피가 튀기며 버나드의 얼굴을 적셨다.
맹렬하게 질주하던 괴물의 얼굴에 달린 수십개의 눈알이 일제히 빙글 돌면서 뒤집어지더니 떼구르르 몸밖으로 떨어져나갔다.
눈알이 빠진 여러 구멍들속에서 검붉은 빛이 새어나왔다. 콧구멍과 입안에서도 밝게 솟구쳤다.
이윽고 빛이 수그러들었을때 괴물은 땅바닥에 코를 박고 쓰러져서는 짧게 경련을 하다 그대로 죽어버렸다.
“후…”
달리던 괴물이 나자빠질때 함께 바닥을 뒹굴렀던 버나드가 몸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이 너무 조용해 고개를 갸웃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근처에 퍼져있던 기사들이 믿겨지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러다 누군가 외쳤다.
“잡았다!”
그것을 시작으로 기사들이 앞다투어 무기를 들고 환호했다.
“괴물을 잡았어!”
“버나드 경이 해냈다!”
기뻐하는 소리가 마차안까지 크게 울려퍼졌다.
그때까지 바짝 긴장하고 있던 미셸이 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괴물을 잡았다고?”
“미셸님!”
시녀가 뛰어와 커튼 밖에서 기쁜 목소리로 고했다.
“버나드 경이 괴물을 죽였습니다!”
“버나드 경이?”
미셸은 얼른 커튼을 젖히고 밖을 내다봤다.
쓰러진 괴물과 그 근처에 서 있는 한 소년의 듬직한 뒷모습.
그 순간, 그녀는 불현듯 10년전 자객들의 습격으로부터 자신을 굳건히 지켜줬던 한 사람의 널따란 등이 떠올랐다.
“마스터울프……?”
단순히 그렇게 느끼는게 아니라 버나드의 체형 자체가 마스터울프의 뒷모습과 언뜻 닮아있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미쳤어.”
미셸은 머리를 흔들며 뜬금없이 떠오른 잡념을 금세 떨쳐냈다.
버나드에게서 본 마스터울프의 모습은 단지 착각일뿐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미셸님.”
혼자 주접을 떠는 사이 어느새 버나드가 얼굴에 피칠갑을 하고 마차에 다가와 있었다.
딴생각을 하느라 다른곳을 보고 있던 미셸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놀랐으나 금세 밝게 웃었다.
“네가 괴물을 잡았다고 들었다. 장하구나.”
버나드는 침착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한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보거라.”
“몇 시간 전에 세레딕 경과 바들레인성으로 귀환하는 도중 숲에서 수상한 무리를 발견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를 습격한 자들과 연관이 있는듯 싶은데, 이곳을 진압하는 즉시 모든 병력을 이끌고 그곳에 가보는게 어떠신지요? 어쩌면 그 근처에 진을 치고 있는 우두머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미셸은 그의 말을 듣고 조금의 고민도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지금 이 장소에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사람은 괴물을 쓰러뜨린 버나드였다.
죽다 살아난 미셸은 고분고분하게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여길 청소하는 즉시 네가 앞장서거라.”
이후 아킨테 가문을 도와주러 달려온 바들레인 가문까지 가세하자 몇 없던 자객들은 겁을 집어먹고 혼비백산 달아나버렸다.
거기에 더해서 아킨테군의 야영지에서 급히 파견한 부대까지 합류했다.
애당초 바들레인성을 방문한 아킨테 가문 사람들은 90여명, 야영지에 주둔하고 있던 아킨테 가문 사람들은 대략 200명이었다.
습격으로 죽거나 다친 사람들은 전부 바들레인성을 방문했던 사람들이었고 총 사상자는 67명이었다.
야영지에 상당수의 병력이 남아있었던만큼 아킨테군의 힘은 아직 건재했다.
어쨌든 두 가문이 힘을 합치자 몇 십명이었던 병력이 금세 불어났다.
미셸은 버나드의 안내를 받아 즉시 우두머리를 찾아나섰다.
“이쪽으로 가면 뭔가 나올듯 싶습니다.”
“네 감이더냐?”
“예, 감입니다.”
버나드는 미셸의 물음에 능청스럽게 대답하며 모든 병력을 겁쟁이 클리프의 주둔지로 안내했고, 잠시 후 그곳에 당도한 미셸은 그제야 자신을 습격한게 겁쟁이 클리프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날 공격한게 왕의 동생이었다니! 가만 두지 않겠어! 여봐라! 다 쓸어버리거라!”
“예!”
분노에 찬 종자와 기사들이 일제히 겁쟁이 클리프의 주둔지를 덮쳤다.
복수심이 가득한 그들의 칼질에 자비란 없었다.
아까 이루어진 기습 때문에 가뜩이나 병력이 부족했던 클리프군은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다.
이윽고 적들이 모두 쓰러지자 남은 것은 클리프의 처단뿐이었다.
“안을 지키고 있던 자들은 모두 처리 했습니다. 클리프 공과 그의 새 아내라는 여자만 남겨뒀습니다.”
“수고했습니다.”
미셸은 차분히 막사 입구를 응시했다.
클리프는 전투가 치러지는 내내 자신의 막사에서 단 한발짝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겁쟁이라는 그의 부끄러운 호칭답게, 전투를 지휘하지 않고 그저 숨어있기만 했다.
“클리프, 당신이 어떤 연유로 날 공격했는지 모르겠군요……”
왕궁에서 지내던 시절 그녀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클리프는 형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이었다.
그를 동정하며 가끔 위로의 말도 건넸었는데 어쩌다 원한을 사게 된 것인지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했다.
“들어갑시다.”
목에 힘을 주며 앞장 서는 그녀를 뒤따라 버나드를 포함 주요 가신들이 안으로 들어갔다.
촛불이 켜진 어두운 실내에는 퀘퀘한 냄새가 났으며, 검정 드레스를 입은 금발의 소녀가 클리프와 나란히 앉아있었다.
“하하하, 오랜만이군요 미셸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있던 클리프가 자포자기한 사람처럼 웃으며 반겨주자 미셸도 지지않겠다는듯이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대꾸했다.
“이런식으로 재회하게 돼서 무척 안타깝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더 좋은 자리에서 만났어야 했는데, 그쵸?”
“당신이 날 공격할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미셸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클리프가 거만하게 손가락을 휘저었다.
“이런 이런 앞뒤 순서가 틀렸군요. 내가 당신을 공격한게 문제가 아닙니다. 현재 가장 중요한건 나에 대한 처분입니다.”
그기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감히 왕의 남동생을 구속하진 않으실테죠?”
사실 왕의 핏줄이건 말건 그 이전에, 높은 신분을 가진 귀족은 함부로 죽이지 못했다.
심각한 죄를 저질렀더라도 재판을 받게 한뒤 유배를 보내는 일이 있을지언정 그 목에 칼을 대기가 어려웠다.
그래서인지 클리프는 아주 자신에 차있었다.
“날 왕도로 보내주시오! 우리 왕립재판소에서 시시비비를 가립시다!”
“어처구니가 없군.”
미셸이 콧방귀를 뀌며 웃었다.
“이봐요, 클리프. 당신이 저지른……”
미셸이 그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녀의 뒤에 서있던 버나드는 클리프의 옆자리에 앉아있는 소녀를 유심히 살폈다.
순수하고 착해보이는 외모를 가진 소녀였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안색이 창백하고 입술이 새파랗게 말라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불길한 분위기를 풍겼다.
고개는 힘없이 옆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그녀의 눈빛은 죽어있었다.
‘저 아이……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나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한 번 본듯한 얼굴이다.
‘누구였더라……’
“본부인인 키미라는 어디가고 옆에 앉아있는 소녀는 누구죠?”
“아, 내가 새로 맞이한 아내입니다. 근데 키미라는 당신이 죽였잖습니까?”
“뭐라고요?”
미셸과 클리프의 대화가 오가는 동안 버나드는 계속 기억을 떠올리려 애를 썼다.
그리고 마침내 눈앞이 번쩍하며 떠올랐다.
‘아!’
그것은 바야흐로 1년전 일이었다.
당시 버나드는 프레드릭왕의 사생아들을 관리하고자 레아와 함께 그들이 사는 지역을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동향과 비위를 파악하는 일에 힘쓰고 있었다.
그러다 만났다.
저 소녀를. 아니, 친부로부터 가문의 성조차 물려받지 못한 가여운 마가렛을.
젊은시절 왕의 시녀일을 했던 그녀의 어머니는 전신화상을 입고 궁에서 쫓겨난 후에 가난한 마을로 들어갔다.
화상의 고통은 평생 갈 정도로 끔찍했고 어머니가 결국 병석에 드러눕자 어린 마가렛은 어려워진 집안 형편 때문에 돈을 벌고자 시체닦이 일을 시작했다.
얼마되지 않는 수입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던 마가렛은 어느날, 전염병에 걸린 시체의 몸을 닦다가 그만 자신도 몹쓸 전염병에 감염되고 말았다.
그런 까닭에 버나드와 레아가 마가렛을 찾았을 당시 그녀는 매일같이 피를 토하며 괴로운 나날을 보내는중이었다.
“오래 살지 못할거예요.”
레아가 집 주변에 빨래를 널고 있는 마가렛을 멀리서 지켜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 옆에 서 있던 버나드는 잠시 마가렛을 바라보다가 별말없이 돌아섰다.
“이로써 사생아 마가렛에 관한 정보수집은 완료됐다. 돌아가자.”
냉정한 그와 달리 레아는 발걸음을 쉽게 떼지못했다.
“돈이라도 좀 주고 올까요?”
“쓸데없는 짓 그만둬. 저들에게 우리의 정체를 알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마라.”
“돈 주머니만 몰래 던지고 올게요.”
“하지마.”
버나드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사생아들이 빨리 죽는게 전하께 도움되는 일이다.”
그러자 레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인상을 찡그렸다.
그를 지나치며 차갑게 내뱉었다.
“그놈의 전하. 맨날 전하만 찾지 말고 당신이 느끼는 감정을 말해요. 왕의 분신도 아니고 뭔가요.”
버나드는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서둘러 미셸의 손을 붙잡았다.
“여기서 얼른 나가셔야 합니다!”
클리프와 대화하느라 정신이 팔려있던 미셸은 버나드가 갑자기 뒤에서 손을 붙잡고 소리치자 움찔하며 뒤를 돌아봤다.
“왜 그러니?”
다른 가신들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버나드를 쳐다보았다.
버나드가 다급하게 말했다.
“저 소녀가 클리프 공의 아내라면 클리프 공은 전염병에 걸렸을게 분명합니다! 여기 계속 있다가는 우리도 위험합니다!”
“뭐?”
뜻밖의 말에 당황한 미셸이 눈을 크게 떴다.
가신들도 웅성거렸다.
니콜라스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전염병이라니?”
“하하하! 저 꼬마는 대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인답니까! 전염병? 나처럼 고귀한 신분이 전염병에 걸리다니요? 저 꼬마가 미쳤나 보군요!”
상태를 보아하니 클리프 본인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버나드는 즉시 손을 뻗어 인형처럼 앉아있던 마가렛을 가리켰다.
“저 소녀는 죽었습니다!”
그가 다시 외쳤다.
“전염병으로 이미 죽었단 말입니다!”
“뭐라고!?”
“정말인가?”
“그, 그러고 보니 처음봤을때부터 생기가 없었어!”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며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내 아내가 죽었다니 웃기지마라! 엄연히 살아있다고! 그렇지 여보?”
클리프가 마가렛의 어깨를 살짝 흔들자, 그녀의 몸이 옆으로 기울어지며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사람들이 입을 벌리며 비명을 질렀다. 누가 봐도 죽은게 분명했다.
“아악! 지, 진짜 죽었어!”
“아, 아니! 자기 새 아내가 죽었는데도 몰랐단 말이야?”
“우리가 못본새에 클리프 공의 머리가 어떻게 됐나보지!”
“미친게 확실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의자에 앉아있던 클리프의 코에서 갑자기 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제길, 또 코피인가!”
그 광경을 목격한 버나드가 미간을 좁혔다.
“저것 보십시오! 클리프 공도 감염됐습니다!”
사람들이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미셸이 덜컥 긴장하며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천벌을 받았군요 클리프! 조카를 겁탈하면서까지 무리하게 왕좌를 욕심낸 대가입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황급히 등을 돌려 막사를 뛰쳐나갔다.
“안돼! 가지마! 내가 전염병이라니! 내가 빌어먹을 전염병에 걸렸다니!”
클리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도 사실 알고 있었다.
며칠전 마가렛이 침대에 누워 숨져 있는걸 발견한게 본인이었다. 사유는 이름모를 전염병이었다.
하지만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었다.
“난 왕이 되어야 했다고! 으아아아악!”
클리프가 괴성을 지르며 이쪽으로 뛰어오려는 찰나, 버나드가 민첩하게 나서서 어떤 기사가 쥐고 있던 창을 빼앗아 그에게 잽싸게 던졌다.
휘이익!
푹!
“끄아악!”
창이 클리프의 가슴을 관통하며 의자 등받이에 꽂혔다.
“살려줘어어!”
의자에 꼼짝없이 붙어버린 그가 발버둥치며 비명을 내지르는 사이 버나드는 또다시 다른 기사의 창을 던져 그의 몸을 관통시켰다.
“깨애애액!”
“나갑시다!”
일사불란하게 모두 막사를 빠져나온뒤 미셸은 즉시 사람들을 시켜 막사에 불을 질렀다.
클리프의 비명과 함께 활활 타오르는 막사를 보며 미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날뻔했군.”
미소를 지으며 옆에 서 있던 버나드를 돌아봤다.
“버나드.”
“네.”
“네가 있어서 정말 기쁘단다.”
그렇게 말하면서 버나드를 와락 끌어안았다.
평소 같으면 하지 않을 행동이었으나 버나드 덕분에 오늘 두 번이나 살았더니 그가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널 가문에 받길 잘했어.”
“감사합니다.”
버나드는 그녀의 따뜻한 품에 폭 안겼다. 그녀에게서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그 냄새를 즐기며 버나드가 말했다.
“송구스럽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 저는 또 한번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말이냐?”
다정하게 묻는 그녀의 물음에 버나드가 칼같이 대답했다.
“하루빨리 샤를리나님을 아케르니아 제국으로 보내야한다는 것을요.”
미셸에게서 떨어지며 다시 한번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미셸님, 간곡히 청합니다. 저를 믿고 걷는 사자 전쟁에 참가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