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되찾는 노력, 수련31
***
겁쟁이 클리프의 주둔지.
아킨테군이 바들레인성을 떠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찰병이 달려와 클리프에게 보고 했다.
“미셸이 성을 떠났습니다!”
의자에 앉아있던 클리프가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좋은 소식이군요. 어서 공격을 시작하세요. 속전속결로 처리합시다.”
“예!”
기사가 막사를 떠난뒤 클리프는 옆에 앉아있던 마가렛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오 나의 사랑스런 부인이여. 드디어 복수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고풍스러운 검정 드레스를 입은 마가렛의 눈빛은 흐릿했고 멍한 얼굴로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영혼없는 인형 같았다.
“두고 보세요, 부인. 미셸은 나의 무서움에 놀라 겁을 집어먹을 것입니다. 그리고…”
클리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만세하듯 양팔을 쭉 뻗었다.
“살려달라며 내 발앞에 머리를 조아릴 것입니다! 하하하! 음…?”
주르륵.
돌연 코피가 흘러내렸다.
클리프는 피식 웃으며 손등으로 코를 닦았다.
“이런 이런 점잖은 신사인 내가 또 코피군요. 미셸이 겁에 질린 모습을 상상하니까 매우 기쁜 나머지 나도 모르게 흥분했었나 봅니다. 자제를 해야겠어요.”
다시 자리에 앉으며 피묻은 손등으로 마가렛의 머릿결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부인도 기대되지요? 부인에게도 미셸의 머리를 짓밟을 기회를 주겠습니다. 하하, 좋다고요? 조금만 기다려봐요.”
클리프는 눈부신 햇살이 비치는 막사 입구를 돌아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여기 가만히 앉아있다보면 곧 나의 전처 키미라가 미셸을 잡아올겁니다. 물어서 죽이지만 않았으면 좋겠군요.”
***
순조롭게 야영지로 향하는 도중에 누군가 갑자기 소리쳤다.
“괴, 괴물이다! 앞에서 괴물이 달려오고 있다!”
마차안에 있던 미셸이 깜짝 놀라며 커튼을 열어젖히고 밖을 내다봤다.
“무슨 일이냐?”
말에 타고 있던 기사들이 너나할 것 없이 소리쳤다.
“괴물입니다! 시커먼 괴물이 나타났습니다!”
“뭐?!”
황급히 고개를 내밀어 전방을 바라보니 덩치가 산만한 괴물이 무서운 속도로 질주해오며 말에 탄 기사들을 날려버리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광경이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양쪽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습격이다! 복면을 쓴 자객들이 나타났다!”
“뭐라고!?”
미셸은 또 한번 놀라며 주위를 급히 훑었다.
숲속에서 복면을 쓴 자객들이 튀어나와 본진을 어지럽히는 광경이 보였다.
“이게 어찌된 일이야…! 저들이 누구길래 우리를 노린단 말인가…!”
난데없이 기습을 당해 한순간 당황했으나 멍청하게 놀라고만 있을 입장이 아니다.
그녀는 군주다.
다급히 니콜라스를 찾았다.
“니콜라스 경! 모두 힘을 모아 맞서 싸우세요!”
“예! 맡겨주십시오!”
니콜라스는 주위에 있는 기사들을 진정시키며 침착하게 명령을 내렸다.
“원형진을 펼쳐라!”
아킨테군은 갑작스레 기습을 당했다고 해서 그대로 무너질 정도로 형편없는 전력을 가진 군대가 아니다.
니콜라스부터 하급 기사까지 모두가 걸친 장비가 훌륭하고 저마다 실력도 좋은 자들이다.
“미셸님의 마차를 전력으로 지켜야 한다! 뚫리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죽을 각오를 하고 자리를 지켜라!”
애당초 미셸만을 위해 구성된 최정예 부대다.
그들은 방패병을 앞세워 미셸의 마차를 둥글게 에워싸며 꽁꽁 뭉쳤다.
그렇게 앞에서는 괴물이 공격하고 양쪽에서는 자객들이 달려드는 혼란스러운 와중에, 버나드는 제일 먼저 샤를의 마차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샤를리나님 밖으로 나오십시오.”
“그게 무슨 소리야! 밖은 위험하다고!”
마차 주위에서 정신없이 싸우는 사람들을 보며 샤를은 겁에 질려있었다. 클레어 마저 다친 손으로 칼을 쥐고 근처에서 자객들과 맞서 싸우는 중이었다.
버나드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심하십시오. 저는 이러한 상황에 익숙한 전문가입니다. 샤를리나님을 안전한 장소로 모셔다 드릴테니 부디 저를 믿고 밖으로 나와주십시오.”
그때 칼을 쥔 자객이 버나드에게 달려들었다.
“죽어!”
버나드는 상대가 휘두른 칼을 잽싸게 피하며 겨드랑이에 적의 팔을 끼우고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했다.
퍽!
“크윽!”
이어서 연달아 목을 가격하자 상대는 목을 쥐고 고통스러워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워 그의 심장에 꽂고 다시 마차안을 들여다보았다.
“어서 나오십시오.”
버나드가 상대를 가뿐히 제압하는 모습을 보고 샤를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얼결에 시키는대로 고분고분 따랐다.
마차밖으로 나오자 사방은 완전히 아수라장이었고, 숨을 곳이 없어 보였다.
“어, 어쩌려고?”
“잠시만요.”
버나드는 담담히 대답하더니 근처에서 싸우고 있던 클레어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상대를 순식간에 제압한뒤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너도 따라와. 다친 손으로 개미 한마리도 못죽일거야.”
“……”
클레어는 그의 말에 절로 인상을 구겼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버나드가 나타나기 전까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적 한 명만 붙잡고 끙끙대는 중이었으니까. 칼을 쥐고 있었던 오른쪽 손목만 크게 부어올라 통증만 더 심해졌다.
속상했지만 어쩔 수 없이 버나드를 따라갔다.
버나드는 샤를에게 다가가 다시 한번 말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저만 믿고 따라오십시오. 최선을 다해 샤를리나님을 구해드리겠습니다.”
샤를은 그 믿음직스러운 모습에 다소 얼떨떨했다. 그저 말뿐이 아니었다. 버나드의 눈빛에서 자신을 꼭 지키고 말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이 녀석을 믿지는 않지만, 날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왠지…… 마음에 들어.’
버나드는 샤를과 클레어를 데리고 길을 뚫기 시작했다.
덤벼드는 자객 두 명을 연달아 때려눕히고 이어서 또다른 자객이 덤벼들자 곧바로 칼을 휘둘러 자객의 목을 벴다.
그러면서 샤를의 안전 또한 섬세하게 신경썼다.
그는 단순히 적만 물리치는 것이 아닌 호위 대상인 샤를의 정신의 안정까지 확실히 책임졌다. 자객을 쓰러뜨릴때마다 간간이 뒤를 돌아보며 샤를을 향해 계속해서 안심이 되는 말을 건넸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전 당신의 호위기사 입니다. 제가 있는한 아무도 당신의 몸에 손을 댈 수 없습니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겠습니다.”
멋진 기사님 같은 태도에 샤를은 가슴이 철렁했다.
‘저 눈빛 뭐야. 왜 저리 멋있어……?’
버나드는 일부러 노리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요인을 경호할때의 메뉴얼대로 침착하게 행동하고 있을뿐이었다.
위기의 상황에 요인이 겁을 집어먹고 멘탈이 붕괴되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곤란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오줌을 지리고 주저앉으면 그걸 부축하기란 한없이 벅차다.
따라서 샤를의 심리를 안정시키기 위해 그녀를 지속적으로 챙겼다.
“당신을 지킬 수 없는 호위기사는 당신의 총애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당신의 총애를 받을 수 있는 호위기사라는 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증명해보이겠습니다.”
버나드의 완벽한 경호 태도는 샤를을 크게 오해하게 만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그의 말들이 마치 멋진 왕자님이 내뱉는 대사처럼 그녀를 마구 흔들어놨다.
‘누, 누가 그런 멋있는 말을 하래?’
샤를은 가슴이 두근두근 했다.
눈앞에서 멋진 활약을 보이며 그에 걸맞는 멋진 말을 시도때도 없이 내뱉는데 가슴이 떨려 미칠 것만 같았다. 동시에 자객들의 습격으로 인해 무섭고 두려웠던 그녀의 기분은 어느 순간 안정되고 평안해졌다.
“당신의 검이 되어 당신을 해치려는 것들을 모조리 처단하겠습니다. 저는 반드시 이 위기에서 샤를리나님을 구해낼 것입니다. 마음 편히 놓으십시오.”
버나드는 보란듯이 샤를의 눈앞에서 그녀의 어머니인 미셸의 큰 기대를 받았던 이유를 똑똑히 증명해 나아갔다.
샤를의 몸에 상처 하나 없이 그녀를 안전하게 지켜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에 더해서 부상자인 클레어까지 완벽히 지켜냈으며, 그로인해 샤를과 마찬가지로 클레어의 마음 또한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앞장서서 길을 뚫어가는 버나드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심금을 울렸기 때문이다.
“뭐하는거야 넌 다쳤잖아.”
버나드가 혼자 고군분투 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가 없었던 클레어가 아픈 손으로 칼을 들고 나서자, 버나드가 재빨리 다가와서는 차갑게 칼을 뺏더니 금세 다정한 말을 뱉는다.
“남한테 보호 받는다고 해서 창피해하지마. 오늘은 내가 네 호위기사다. 지켜줄테니까 얌전히 따라와.”
클레어는 생전 처음 듣는 소리에 정신이 멍해졌다. 그의 말이 어처구니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단숨에 휘어잡으며 그가 시키는대로 행동하게 하는 마력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방금 가슴이 찌릿…… 했어…… 뭐지……’
그녀는 샤를을 신경쓰면서 얌전히 버나드를 따라다녔다.
버나드가 종종 말을 걸어왔다.
“놀고 있다고 낙심하지마. 앞으로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저녁에 시간되면 내가 손목 좀 봐줄게. 너한테만 맡겨놨더니 회복이 너무 늦는 것 같아.”
“알았어……”
클레어는 무언가에 홀린듯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운데, 그의 말을 듣게 돼……’
버나드는 능숙하게 위기를 돌파해 나아갔다. 클레어는 그 모습을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면서 자신보다 나이 어린 소년이 아니라 왠지 연상에다가 존경스러운 선배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울러 그에게서 남성적인 향취도 맡았다. 자신과 샤를을 노련하게 잘 이끌어주는 모습이 너무나 듬직하고 씩씩해보였다. 마음이 콩콩거릴 정도로.
‘버나드에게 배울점이 많아보여……’
그래서인지 그에게 묘하게 끌렸다.
좌우지간 버나드는 번개처럼 칼을 휘두르며 길을 뚫다가 한순간 숨통이 트이자 빠르게 말을 잡아 타고 샤를과 클레어를 뒤에 태웠다. 그녀들은 둘 다 몸이 가녀리고 가벼워서 뒷자리가 충분했고, 그대로 말을 몰아 바들레인성으로 내달렸다.
모든 것이 그의 계획대로였다.
샤를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는 시간동안 아킨테군은 점점 분노를 쌓아갈 것이다. 죽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죽는 사람의 신분이 높을수록, 그들은 더욱 투지에 불타 걷는 사자 전쟁에 악을 쓰고 참가하려들겠지.
“버나드!”
“여기야 여기!”
이윽고 바들레인성 앞에 다다르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데보라와 마크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 두 사람에게 샤를과 클레어를 맡기고 버나드는 다시 말 위에 몸을 실었다.
때마침 습격 소식을 전해들은 바들레인 가문의 기사들이 다급히 말을 몰아 성을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버나드는 샤를을 돌아보며 가볍게 묵례했다.
“가서 미셸님을 구하겠습니다. 안심하십시오.”
그는 즉시 말머리를 돌려 고삐를 내려쳤다.
“으랴!”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샤를은 연신 눈을 껌뻑거렸다.
자객들의 습격부터 버나드의 멋진 말투와 경호까지, 모든 일이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정신이 없었으나 이내 뛰는 가슴을 진정시킨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저 녀석이야말로 내 호위기사가 될 자격이 있어. 뭐 하나 빠지는게 없는 사람이야.’
흡족했다.
***
난장판이 된 장소로 다시 돌아온 버나드는 곧바로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조용히 언덕으로 올라가 전장을 내려다봤다.
아킨테군의 절반이 사망했다. 그 중에 고위직도 있었다.
더불어 자객들의 숫자도 눈에 띄게 줄었다.
그러나 자객들이 여전히 불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는, 아직도 키메라 괴물이 버티고 있어서다.
아킨테군이 자랑하는 니콜라스와 사만다가 동시에 나서서 괴물을 상대하고 있었으나 딱 보기에도 싸움이 쉽지 않아보였다.
심지어 니콜라스는 부상을 당한듯 다리를 절고 있었고 사만다는……
“꺄악!”
“사만다 경!”
동료를 구한답시고 잠시 방심한 틈을 타 키메라가 전력으로 질주해서 사정없이 들이받아 버리자 사만다의 갑옷이 산산이 조각나며 그녀가 멀리 나가떨어졌다.
바닥에 쓰러진 그녀는 그대로 죽은건지 기절한건지 일어날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큰일났다! 위험해!”
“안돼! 아아악!”
자신을 막아서던 장애물이 사라지자 괴물은 더욱 미쳐날뛰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닥치는대로 들이받다가 돌연 미셸이 탄 마차를 노려보며 콧김을 내뿜더니 갑자기 그쪽으로 맹렬하게 돌진했다.
“피, 피해!”
“벽을 만들어서 막아!”
“미, 미셸님을 지켜라!”
니콜라스가 절뚝거리며 고래고래 소리쳤으나 소용없었다.
겁에 질린 기사들은 괴물을 보고 냅다 도망치거나 그나마 용기 있게 막아선 자조차 쉽게 돌파 당하며 무력하게 길을 내주었다.
앞만 보고 맹렬히 질주하는 괴물의 기세는 산조차 두동강을 낼 정도의 파괴력과 날카로움이 가득했다.
미셸이 탄 마차와 충돌하는 순간 마차가 개박살이나며 그녀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음?”
문득 버나드의 시야에 바닥에 떨어진 길다란 창이 눈에 들어왔다.
허리를 숙여 무심코 창을 줍자 그 순간 레아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며 빠르게 스며들었다.
“아, 그때 그렇게 잡았었지……”
레아를 처음 만났을때 그녀가 마물처럼 강력한 곰을 가뿐히 처리하던 모습이 버나드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한번 해볼까.”
버나드는 창을 꼬나쥐고 곧장 언덕을 뛰어내렸다.
그리고 괴물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달렸다.
거리를 한달음에 좁힌 그는 주저없이 땅을 박차며 높이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