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되찾는 노력, 수련30
그러나 바로 찾으러가지 않았다.
저 멀리 바들레인성을 앞두고 일단 세레딕과 헤어지는게 먼저였다.
세레딕은 너무 거슬릴 정도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만약 겁쟁이 클리프의 군대가 주변에 있는 것 같다고 얘기하면 또 다시 그가 자신의 출신배경을 수상히 여길 것이고, 집중적으로 파고들까봐 우려되었다.
“먼저 성에 들어가십시오. 저는 여기서 3km 정도 떨어진 아킨테군의 야영지에 잠시 들렸다가겠습니다.”
“알겠네, 조심해서 가게. 나도 바들레인 성에 들어가거든 곧바로 떠날 채비를 해야해서 아마 다시 만나긴 힘들게야.”
“네, 그라나딘 왕국의 영웅을 만나서 영광이었습니다. 모쪼록 안전한 여행되십시오.”
“아아, 잠깐.”
세레딕은 말을 몰고 가까이 다가오더니, 뒤에서 버나드를 끌어안은 채 태평하게 졸고 있는 데보라를 한번 쳐다보고는 버나드를 향해 조용히 미소지었다.
“내가 한 말 잊지말게. 조만간 또 보자고.”
“……”
버나드는 말없이 살짝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면서 속으로 세레딕과 다시 만날 일이 없을거라고 단정했다.
“그럼 잘 가게!”
“조심히 가십시오!”
버나드는 말을 몰며 떠나는 세레딕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머리를 돌렸다.
갑자기 옆구리를 꼬집는 느낌이 들었다.
“버나드? 누나는 다 들었단다?”
뒤에서 데보라의 살벌한 목소리가 들렸다.
흠칫하며 뒤를 쳐다보자 그녀가 싸늘하게 웃고 있었다.
“안잤어……?”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니? 어젯밤에 저 능구렁이 같은 영감탱이랑 무슨 말을 주고 받았는지 누나는 무척 궁금하구나? 사실대로 말해주겠니?”
협박 아닌 협박을 하는 그녀.
옆구리를 꼬집는 손가락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버나드는 통증에 절로 인상을 찡그리며 별수없이 사실을 얘기했다. 어차피 중요하게 생각하던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라나딘 왕국의 여자를 소개시켜준다고 하더라고.”
“아, 그래?”
데보라는 방긋 웃어보였으나 전혀 웃고 있는게 아니었다.
평소 그녀답지 않게 말투가 험악하고 살기를 술술 풍겼다.
“저 영감탱이는 내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나 보지?”
버나드의 머릿속에 어제 데보라가 자신있게 외치던 말이 짧게 스쳐지나갔다.
‘연인 사이란거죠!’
“그래서 넌 뭐라고 대답했니? ‘헤헤, 좋아요.’ 하면서 쪼갰어?”
“안그랬어.”
버나드는 옆구리의 통증을 꾹 참고 말을 몰며 대답했다.
“여자한테 관심없다고 대답했어. 그랬더니 계속 소개시켜준다고 고집을 피우더군. 상대하기 귀찮아서 그냥 놔뒀어. 그것뿐이야.”
“정말이야? 또 거짓말하는거 아니니? 아까 물어봤을때 세레딕이 아무말도 안했다고 했었잖아. 그런데 했어.”
“난 레아한테도 관심없던 인간이었어. 날 위해 희생한 여자한테도 차가웠던 내가 중매 얘기에 관심이 있을 것 같아? 난 여자를 밝히는 인간이 아니야. 그리고 한가하게 연애나 하고 살 운명이 아니란걸 데보라도 잘 알잖아.”
왠지 구슬퍼 보이는 그 말에 살기등등했던 데보라의 표정이 순식간에 거짓말처럼 풀어지면서 꼬집던 옆구리를 놔줬다.
“내가 오해했나봐.”
그녀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큰 가슴으로 버나드의 등을 짓누르고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버나드의 상황이 어떤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제멋대로 굴어서 미안해. 용서해줘.”
나지막이 속삭이며 그녀가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대로 말을 몰고 있는 버나드의 바지속으로 손을 넣어 그의 물건을 부드럽게 움켜잡았다.
“사과의 의미로 기분좋게 해줄게.”
그녀의 달콤한 말과 따스한 손길이 버나드를 흥분케했다.
데보라가 살살 문질러주자 움츠러 들었던 성기가 금세 빳빳하게 부풀어올랐다.
“기분좋아, 데보라……”
버나드는 그녀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뒤로 고개를 돌려 그녀의 목덜미와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데보라와 키스를 하기는 처음이었다.
양볼을 붉히는 그녀에게서 입술을 떼며 미소를 짓고 말했다.
“데보라의 가슴을 빨고 싶어.”
“여기서?”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꺼내줄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버나드는 고개를 저었다.
“일이 끝난 다음에.”
그는 즉시 말에 박차를 가했다.
속력을 늦추지 않고 빠르게 달리다가 적당한 장소에 말을 숨겨놓고 급히 산을 올랐다. 높은 곳에 올라가 주변을 살펴볼 요량이었다. 데보라는 치마를 걷어올리고 야무지게 잘도 따라왔다. 사실 지금의 버나드보다 그녀가 더 키가 크고 덩치도 좋았기에 힘이 세고 체력도 좋았다.
어쨌든 한 시간 정도 찾아다닌 끝에 수목이 우거진 작은 골짜기에 주둔중인 겁쟁이 클리프군을 마침내 발견할 수 있었다.
야영지 인원은 대략 이백여명의 규모에, 플랫폼을 운영하지도 않았으며 오로지 가신들만 주둔하고 있었다.
일부는 갑옷을 착용하지 않고 두건을 쓴 자객복을 입고 돌아다니고 있었으며, 야영지 한 가운데에 놓인 사각 철창에는 황소보다 덩치가 더 큰 시커먼 괴물이 갇혀 있는게 보였다. 온몸이 칠흑처럼 어두운 네발 괴물의 얼굴에는 눈이 수십개나 달려있었는데, 저마다 따로 놀며 정신없이 깜빡거렸다.
“키메라인가…”
버나드는 산의 경사면에서 그들을 몰래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근데 왜 여기에 있는거지?”
어째서 겁쟁이 클리프가 왕도를 벗어나 이곳에 있는 것일까?
현재로선 이해가 불가능했다.
겁쟁이 클리프는 프레드릭왕에게 개무시를 당하며 왕위계승자 자격마저 박탈당한 상태였다. 왕의 남동생이지만 방탕하고 무능한데다 겁이 많아 왕국을 이끌어갈 능력이 없다는게 이유였고, 모든 대신들과 대주교까지 동의하며 정당한 절차를 거쳐 그의 왕위계승자 자격을 없애버렸다.
따라서 걷는 사자 전쟁에 참가할 이유가 없을지언데 왜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 와있는 것일까?
“음……”
그렇다면 드는 생각은 하나뿐이다.
왕의 자식중 한 명과 동맹을 결성했거나 아니면 그에 버금가는 일을 벌였을 것이라고.
버나드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일단 돌아가자.”
“다 봤어?”
근처에서 천진난만하게 산나물을 캐고 있던 데보라가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버나드는 그녀의 손을 잡고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빨리 가서 미셸님께 알려야겠어.”
“위험한 사람들이야?”
“저들의 목적이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어. 하지만 경계해서 나쁠건 없으니까 일단 말해둬야지.”
빠르게 걷다가 돌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버나드가 우뚝 멈춰섰다. 데보라가 멀뚱히 쳐다봤다.
“왜 그래?”
“아니야, 가만.”
버나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며칠전 아킨테 가문의 가신들과 논쟁을 벌이던 일이 떠올랐다.
당시 가신들은 하나같이 평화라는 안일한 생각에 빠져 걷는 사자 전쟁을 피하자고 주장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 영지에 전란이 닥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오직 평화만 추구할뿐입니다!’
‘맞습니다! 저 역시 똑같은 생각입니다!’
‘미셸님! 우리 아킨테는 걷는 사자 전쟁에서 빠지겠다는 입장을 빨리 왕의 자식들에게 알려주십시오!’
‘니가 뭘 알아! 나이도 열몇살 밖에 안처먹은 놈이 정치가 뭔줄 알기나 해? 하다못해 말발굽 가는 법은 아냐? 지금 네가 할 일은 기사님들 심부름밖에 없다 꼬마야.’
어쩌면 지금 겁쟁이 클리프의 등장은……
깊은 고민에 잠겨있던 버나드가 눈을 크게 떴다.
“이건 행운이야.”
버나드는 곧이곧대로 보고하고 대놓고 싸우는 것을 즐기는 스타일이 아닌 그늘에 숨어 공작을 통해 여론을 흔들고 그로인해 불안해하는 귀족들을 이용하는 것을 즐겼으며, 만약 판이 불리하면 그 판을 왕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왜곡, 조작, 납치, 살인 등 그 어떤짓도 서슴지 않는 집단의 수장 출신이다.
과거에는 오로지 왕과 왕국을 위해 온갖 공작을 벌여왔다면, 그는 긴 고민 끝에 인생 최초로 자신을 위해 일을 꾸미기로 결심했다.
“그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줄 좋은 기회가 왔어.”
버나드는 겁쟁이 클리프군이 인근에서 위협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미셸에게 알리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한번 당해보라고. 한번 당해봐야 그들도 걷는 사자 전쟁에 참가할 결심이 설 것이라고.
겁쟁이 클리프 군에게 당한 피해가 많을수록 아킨테군은 분노와 복수심, 야망이 활활 불타오를 것이고, 그것은 곧 그들로 하여금 아케르니아 제국으로 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줄 것이다.
아킨테군이 왕좌에 욕심을 부린다면 그것만큼 좋은게 없다.
그것이 바로 버나드가 원하는 것이니까.
“겁쟁이 클리프. 정말이지 적절한 때에 나타나주었군.”
솔직히 버나드는 아킨테 가문에 애정이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레아의 시체를 되찾는 것과 복수 뿐, 굳게 믿었던 주군에게 크게 배신당한 적이 있는 그는 미셸을 열렬히 존경하지도, 죽을때까지 모시고 싶은 애착도 없었다. 목적만 달성하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카드였다.
‘나는 탁란하는 뻐꾸기다. 나와 궤를 달리하는 모든 알과 새끼를 밀어내고 둥지를 차지한뒤, 어미인 미셸에게서 먹이를 받아 먹고 쭉쭉 자라날거야.’
덧붙여 그의 머릿속에 있는 군주란 단어는, 군주라 쓰고 자신을 버린 배신자라고 읽는다.
“버나드!”
데보라가 갑자기 어깨를 흔들며 먼 곳을 가리켰다.
“저 사람들 나갈려고 하나봐. 우리랑 마주치면 어떡해?”
그녀가 가리킨 곳을 보니 무장을한 수십명의 자객들이 가지런히 대열을 갖추며 어디론가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철창 안에 갇혀있던 키메라도 밖으로 꺼내져 조련사로 보이는 자가 그 앞에서 노란 연기를 내뿜는 향을 들고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치는 중이었다.
“무언가를 습격하려는게 분명해.”
버나드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겁쟁이 클리프군의 움직임으로 보아 무언가를 기습적으로 공격하려는게 틀림없었다.
저 정도 인원에 괴물을 쓸 정도면, 저들이 노리는 목표의 규모가 상당히 크다는 것.
제발 미셸이기를 바랐다.
“가자. 빨리 가서 할게 있어.”
버나드는 데보라의 손을 잡고 재빨리 산을 내려갔다.
두 사람은 숨겨두었던 말을 타고 즉시 아킨테군의 야영지로 향했다.
버나드는 가면서 데보라에게 모든 사정을 이야기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마크와 멜라니아의 안전을 그녀에게 맡겨야 했기 때문이다.
“만약 저들의 목적이 버나드가 생각하는게 아니면 어떡해?”
“그럼 어쩔 수 없고. 평화롭게 흘러가는거지.”
버나드는 실제로 겁쟁이 클리프가 아킨테의 미셸을 공격할 것이라고 100% 확신하지는 못했다.
그의 예감으로는 미셸이 공격받을 가능성이 100중에 70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확신에 찬듯이 움직이는 이유는, 그는 늘 감과 본능에 따라 움직였고 그것은 언제나 그에게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
이윽고 아킨테군의 야영지에 도착한 버나드는, 그 즉시 말을 잘 타는 사람을 현장에서 구한뒤 마크와 멜라니아를 말에 태우고 데보라와 함께 바들레인성으로 들어갔다.
겁쟁이 클리프가 미치지 않은 이상 성은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란 생각으로, 데보라와 마크, 멜라니아를 미리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놓았다. 클리프군의 습격 시점은 작별인사를 끝마친 미셸 일행이 바들레인성을 빠져나와 야영지로 이동할때라는게 그의 예상이었다.
“세레딕 경은 아까 도착했는데 넌 어디갔다 이제 나타났느냐?”
모든 준비를 끝마친뒤 미셸에게 자신이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러 갔더니, 때마침 마차에 오르던 그녀가 궁금해하는 얼굴로 물었다.
버나드가 여기저기 분주히 뛰어다닌 사이에 아킨테 가문 사람들은 벌써 성을 떠날 생각에 말과 마차에 오르며 바들레인 가문 사람들과의 작별인사도 끝나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성밖을 나가는 일뿐이었다.
“놓고 온 물건이 있어 잠시 우리 야영지에 다녀왔습니다.”
“지금 돌아가는 길인데 괜히 헛걸음을 했구나. 아무튼 자세한 얘기는 야영지에 가서 하자. 세레딕 경에게 얘기 들었단다. 네가 튀사라 가문 사람들을 도와주었다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네 입으로 직접 듣고 싶구나. 야영지에 가거든 내 막사로 오거라.”
미셀이 기특하게 쳐다보며 미소지었다.
“네, 알겠습니다.”
이내 마차의 문이 닫히며 그녀가 탄 마차가 출발했다.
그 뒤를 이어 샤를이 탄 마차도 지나갔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민 샤를이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갑자기 흥! 하고 시선을 돌리며 창문의 커튼을 쳐버렸다.
버나드는 점점 멀어지는 그녀의 마차를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곧 습격이 있을겁니다. 하지만 걱정마세요 샤를님. 당신만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지키겠습니다. 당신은 절 프레드릭에게 데려다줄 소중한 안내자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