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되찾는 노력, 수련28
당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빼앗긴 치아를 되찾아오면 그에 맞는 사례를 해주십시오.”
“사례라면 당연하지!”
당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의 이빨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뭐든 다 해주겠어!”
***
정오가 지났을 무렵, 조용했던 마을에 큰 소란이 일어났다.
마을에서 힘 있기로 소문난 튀사라 가가 그에 못지 않은 에이드 가에게 내기를 신청했고, 에이드 가가 그것을 수락하면서 양가문의 대결을 위해 마을 한복판에 무대가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양가문의 일가친척이 총출동한 것은 물론이고 마을 주민들도 너나할 것 없이 전부 모여들었다.
사방이 시끄럽고 발 비빌 틈 없이 인파가 붐빈 가운데, 버나드는 에이드 가의 장남이자 내기 상대인 보니파시오와 커다란 지도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두 사람의 등뒤에는 양가문의 종들과 일가친척들이 병풍처럼 좌우로 늘어서 있었는데, 버나드와 보니파시오의 내기와는 별개로 자기들끼리 상대 가문을 향해 맹렬한 적의를 드러내며 당장 패싸움이라도 벌일듯이 서로를 흉흉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아킨테의 미셸이 인정한 오크를 두려워하지 않는 기사 버나드 경이라고? 그런 이름은 들어본적도 없다! 앞으로도 들을 일이 없을거야!”
보니파시오의 외침에 그의 일가친척과 종들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버나드 경, 그대는 무슨 의리로 튀사라 가를 도와주려 하는가? 본인의 이빨이 뽑힐게 뻔한데 정말 궁금허이다.”
“제 시간이 없어 그러니 잡담은 그만 두고 어서 내기를 시작합시다.”
“꼬마라서 멋모르고 달려드는거 아니야? 어른들이 너보고 나가라고 등 떠밀었니? 어머, 튀사라 가 인간들은 다들 겁쟁이들뿐인가 보네.”
보니파시오의 뒤에 서있던 어떤 여자의 말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재차 웃음을 터뜨렸고, 그에 튀사라 가 사람들이 발끈하며 그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장내가 크게 소란스러워졌다.
“자자, 그만하시오!”
세레딕이 나서서 양쪽을 조용히 시켰다. 왕국은 달랐지만 태풍의 기사로 불린 세레딕의 명성은 레온 왕국에서도 자자했기 때문에 양가문 사람들은 일찍이 그에게 경의를 표하며 내기의 심판을 맡겼다.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지자 세레딕이 말을 시작했다.
“공정하고 공평하신 유르샤티아 신께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시니, 나 기사 세레딕이 묻는다. 보니파시오 공과 버나드 경은 한 치의 거짓됨이 없이 깨끗하고 정당한 승부를 벌이겠다고 신께 맹세하겠는가?”
“예, 물론입니다. 애를 상대로 무슨 짓을 하겠습니까.”
보니파시오의 도발에 아랑곳하지 않고 버나드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정당한 승부를 벌이겠다고 맹세합니다.”
“이로써 두 사람은 깨끗하고 정당한 승부를 벌이겠다고 신께 맹세하였으니, 만일 상대를 속이거나 비겁한 행위가 보이거든 유르샤티아 신을 대신하여 본인이 처분을 맡겠다. 두 사람 모두 받아들이겠는가?”
“그렇게 하시죠.”
“받아들이겠습니다.”
“좋다. 지금부터 두 사람의 내기를 시작하겠다! 선공은 튀사라 가의 도전을 받아들인 에이드 가의 보니파시오 공부터다!”
레온 왕국의 지형이 그려진 직사각형 모양의 커다란 지도판을 사이에 두고, 보니파시오가 버나드를 보며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일단은 쉬운거부터 해볼까?”
보니파시오는 지휘봉을 들고 바들레인성 근처의 산 하나를 가리켰다.
탁!
“버나드 경? 이곳의 지명이 뭘까요?”
버나드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즉각 대답했다.
“요르트나 산.”
“오~”
주변에서 작은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버나드의 등뒤에서 기뻐하는 이들도 있었다.
“잘한다!”
“그대로만 해!”
그 사람들 속에 껴있던 데보라는 깍지를 끼고 버나드를 간절히 응원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버나드의 옆에 있고 싶었으나 내기의 규칙상 참가자의 곁으로 그 누구도 가까이 다가가서는 아니되었다.
보니파시오가 코웃음을 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뭐 그리 대단한걸 맞췄다고. 이 지방에 사는 사람중에 요르트나 산을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모르면 간첩이지.”
“자, 버나드 경. 자네 차례네.”
세레딕의 말에 버나드는 근처에 놓여있던 자신의 지휘봉을 집었다.
그 지휘봉의 끝이 쭈욱 밑으로 내려가더니 왕국 남부에서 아주 끝자락에 있는 해변을 가리켰다.
탁.
“여기 지명을 말씀해보십시오.”
“……!?”
보니파시오의 얼굴에 순간 당혹감이 스쳐지나갔다. 버나드를 꼬마라고 우습게 봤더니 초장부터 아주 세게 나왔다.
“거, 거기는……!”
버나드가 가리킨 곳은 너무 구석에 붙어있어 평소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지역이었고, 예전에 알았으나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한 곳이었다.
그런 그의 심정도 모르고 등뒤에 서있던 일가친척들이 큰소리로 외쳐댔다.
“시원하게 맞춰버려!”
“봐주지 말라고!”
하지만 당황한 보니파시오의 입이 한동안 떨어지질 않자 구경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거야?”
“설마 모, 모르는거야?”
그들의 목소리가 보니파시오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고, 그는 마지못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일라그란데 해안……?”
“자, 버나드 경. 보니파시오 공은 일라그란데 해안이라 답하였소. 이제 그대가 알고 있는 지명을 말하시오.”
문제를 낸 출제자 역시 지명을 확실히 알고 있어야 했다. 규칙상 본인이 아는 곳만 문제를 낼 수 있었다.
세레딕의 요구에 따라 버나드가 즉각 대답했다.
“나드로민 해안 입니다. 1차 걷는 사자 전쟁 당시 끝까지 저항하던 이튜어트 가문이 레온 왕가에게 진압된 장소였죠.”
“오오, 그런 일이 있었던가.”
세레딕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그러다 정색을 하며 주위를 에워싼 구경꾼들을 둘러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버나드 경은 나드로민 해안이라 말했고, 보니파시오 공은 일라그란데 해안이라 대답하였소! 둘의 대답이 상반되니 지금부터 누구의 말이 맞는지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겠소!”
세레딕은 양가문에 속하지 않은 참관인 두 명과 함께, 에이드 가에게 제공받은 전국지도를 펼쳐놓고 지명을 확인했다.
잠시 후 그가 허공에 대고 크게 외쳤다.
“버나드 경의 말이 맞았고 보니파시오 공이 틀렸소! 정답은 나드로민 해안이었소이다!”
“우와아아!”
튀사라 가 사람들이 서로 얼싸안고 크게 기뻐했다. 반면에 에이드 가 사람들은 탄식을 내뱉으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금세 활기를 되찾았다.
“이제 시작입니다! 힘내십시오 보니파시오님!”
“겨우 한 문제 갖고 뭘 그래. 지금부터 봐주지마!”
“자, 보니파시오 공. 두 번째 문제를 내주길 바라오.”
보니파시오는 이를 갈았다. 그는 기다렸다는듯이 지휘봉을 빠르게 움직여 왕국 동쪽의 어느 협곡을 가리켰다.
“여길 말씀해보오 버나드 경.”
이번에는 작정하고 문제를 냈다는듯 그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모든 사람들이 버나드의 입술만 바라보며 숨죽인 가운데, 버나드는 담담한 표정으로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로이잘 협곡입니다. 오래전 왕족 이블린이 프레드릭왕의 추격을 피해 은거하고 있던 곳이었죠.”
“그, 그걸 어떻게!?”
보니파시오의 얼굴에 순간 당혹과 놀라움이 깃들었다.
“보니파시오공, 그대가 생각하는 지명을 말해보시오.”
세레딕이 형식상 물었으나, 그는 이미 보니파시오의 표정을 보고 버나드가 정답을 맞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니파시오공?”
보니파시오는 고개를 떨구며 한숨을 내쉬었다.
“로, 로이잘 협곡이 맞습니다……”
“좋소. 버나드 경이 맞췄으니 바로 다음으로 진행하겠소. 버나드 경, 문제를 내주시오.”
버나드는 묵묵히 지휘봉을 움직여 북쪽의 삼림지대를 가리켰다.
“이 숲에 있는 조그만 시냇물의 이름을 말씀해주십시오.”
“아니 거길 어떻게 알아!”
보니파시오가 갑자기 길길이 날뛰었다.
“세상 천지에 이름없는 시냇물이 수천, 수만개나 될텐데 그 조그마한 시냇물 하나에 이름 따위가 어딨겠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저 시냇물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거짓말! 처음 들어봤소이다!”
“보니파시오공, 진정하고 일단 답을 말하시오.”
세레딕의 엄숙한 요구에 보니파시오는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쥐어짜내다가 숲의 이름을 붙여 겨우 말했다.
“타르니스그마 천(川)으로 대답하겠습니다.”
“버나드 경, 그대 차례요.”
세레딕이 버나드를 돌아보자 그가 바로 대답했다.
“프레드리크의 젖줄입니다. 적의 독화살에 맞아 죽어가던 프레드릭왕이 우연히 타르니스그마 숲을 흐르는 조그마한 냇물을 마시고 완쾌된 일이 있었는데, 그 후 왕은 시냇물에 금가루를 뿌리며 자신의 이름을 붙였지요.”
“오호, 놀라운 일화로구만.”
세레딕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명의 참관인을 불렀다.
“두 사람의 주장이 상반되니 이번에도 확인 절차를 거치겠소!”
잠시 후 전국지도를 확인한 세레딕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프레드리크의 젖줄이라 분명히 적혀있소이다!”
“오오오!”
숨 죽여 결과를 기다리던 사람들 사이에서 환성이 터져나왔다.
보니파시오는 똥 씹은 표정이 되었고, 그의 가문 사람들은 실망을 금치 못하며 누구 하나 입을 벌리는 사람 없이 침울한 분위기속에 긴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이, 이제 겨우 두 판 했을뿐이외다! 각오하시오 버나드 경!”
화가 치밀어오른 보니파시오는 주먹을 불끈 쥐며 전의를 불태웠다.
내기는 계속 되었다. 마치 주먹을 치고 받는 것처럼 보니파시오가 이를 악물며 달려들었고, 버나드는 여유있게 막아내며 반격하는 모양새가 줄곧 이어졌다.
세레딕의 입에서는 쉴새없이 버나드가 이겼다는 말만 연달아 흘러나왔다.
“버나드 경의 말이 맞았고 보니파시오 공이 틀렸소! 정답은 미흐러잔 산맥이었소이다!”
“버나드 경의 답변이 정확하오! 정답은 엘레브세리아 강이었소이다!”
“버나드 경이 또 맞췄소! 정답은……!”
“버나드 경이 제대로 말했소! 정답은……!”
“버나드 경이 이번에도 정답을 맞췄소.”
이윽고 내기가 끝나자, 내리 10연패를 당한 보니파시오는 정신이 너덜너덜해진 나머지 충격을 금치 못하고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 내기의 승자는 아킨테의 미셸이 인정한 오크를 두려워하지 않는 기사 버나드 경이오!”
세레딕의 선언을 듣는 순간 구경꾼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버나드를 향해 일제히 박수갈채를 보냈다.
에이드 가문 사람들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고, 보니파시오는 눈을 크게 뜬 채 믿기지 않는 결과에 절망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져, 졌다고? 왕실 과학원에 입성을 앞둔 내가 졌어…?”
곧 그의 눈앞에 이빨 뽑는 연장을 든 사내들이 히죽거리며 나타났다.
“약속은 약속이니 아 하고 입을 벌려보시오 보니파시오 공.”
***
“버나드 경을 극진히 모셔라!”
튀사라 가의 당주는 버나드의 승리에 기뻐하며 성대한 식사를 대접했다. 빼앗겼던 테로의 치아 4개도 되찾고 사제들이 신성력으로 빠르게 치아를 복원시켜주었다. 거기에 세레딕이 그동안 갖고만 있던 류발 가문이 보낸 혼담 서신과 미래의 며느리 얼굴이 그려진 초상화를 식탁 위에 펼쳐놓자 분위기는 더없이 즐겁고 화기애애해졌다.
“흐흑, 빨리 만나고 싶어!”
당주의 아들인 테로는 약혼자가 보낸 편지를 읽고는 행복한지 그 자리에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 세레딕은 이번 중매가 잘 진행되어서 다행이라며 버나드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버나드에게 짙은 호기심을 품었다.
“왕국 지리는 대체 어디서 배운겐가? 그리고 왕의 일화나 전쟁사 같은건 또 어디에서 배웠고?”
좌우지간 뜻하지 않게 만찬을 즐기다 보니 바들레인 성으로 돌아가야할 시간이 예정보다 많이 늦어졌다.
식사가 끝나자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버나드와 데보라, 세레딕, 세 사람은 즉시 말위에 올라탔다.
떠나는 순간에도 튀사라 가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성대한 환송을 해주었다.
“나중에 꼭 들리시오 버나드 경! 언제든 환영하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