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되찾는 노력, 수련22
자신의 명령에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는 모습이 무척 얄미웠는지 샤를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대뜸 소리쳤다.
“진짜 별꼴이야!”
그러고는 눈을 흘기며 버나드의 앞을 지나쳐갔다.
“짜증나.”
씩씩거리며 복도를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버나드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어릴때 그 귀엽던 모습은 없군… 그래도 예쁘게 잘 컸어.’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흐뭇한 웃음이 지어지던 와중에 클레어가 묵묵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복도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없이 샤를을 뒤따라갔다.
곧바로 버나드도 발걸음을 옮겼다.
***
“건배!”
시끌벅적한 저녁 만찬자리에는 바들레인 가문 사람들 말고도 소문을 듣고 찾아온 다른 귀족들도 많았다.
특히나 눈에 띄었던 것은 눈부시게 고운 젊은 영애들이다.
현재 샤를의 주변에는 바들레인 집안의 여식들인 장녀 올가, 차녀 로지나 외에 그들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세 명의 영애들이 둘러 앉아있었다. 그녀들 때문에 만찬자리가 더욱 빛나고 화사한 느낌이 들었다. 모두 십대 후반의 파릇파릇한 아가씨들인지라 꺄르르 하는, 옥구슬 같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다들 친한 사이인지 서로 견제하는 분위기도 없었다.
“전 다음달에 일렌 가의 장남과 약혼식을 올리기로 했어요.”
“오, 저런. 벌써요?”
“일렌 가라면 걷는 사자 전쟁 당시 르시아 고지 전투로 유명한 가문 아닌가요?”
“네, 일렌 가의 당주님께서 5 대 1의 전투를 승리로 이끄셨죠. 제 약혼자는 그때 갓난 아기였고요.”
갓난 아기란 단어에 영애들 사이에서 한바탕 꺄르르 웃음보가 터진다.
영애들의 대화주제는 주로 어떤 가문에 대한 소문이라든지 멋진 남자 귀족 또는 옷, 화장, 예술에 대한게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들을 먼 발치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영애들의 호위기사들이었다.
영애들은 저마다 듬직한 호위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다들 젊고 잘 생긴 청년들이었으며 훤칠하게 키가 컸기에 호위기사중에 제일 앳되고 키가 작은 버나드가 누가봐도 막내로 보였다.
‘어려보인다는건 좋지만 지금은 왠지 싫군.’
버나드는 벽을 등지고 우두커니 서 있으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양쪽에 나란히 서있는 다른 호위기사들의 면면을 대충 살펴보았다. 혹시나 아는 인물이 있을까해서다. 하지만 전국적인 명성을 쌓았을만한 나이들이 아니었기에 모두 처음보는 얼굴들이었다. 호위기사라 하면 보통 관록있는 기사를 두기 마련인데, 외모의 매력을 가장 큰 기준으로 하여 영애들의 취향대로 선발한 것인지 20대 후반 이상의 기사는 하나도 없었다. 전부 십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쯤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실력이 나빠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잘생긴데다 실력도 괜찮아 보였다.
먼저 장녀 올가의 호위기사인 리얀데르손은 상체가 큰 근육질 체격에 사나운 인상이 돋보였다. 사납다는게 무식하고 투박한게 아니라 사내답게 멋지게 잘생겼다는 의미다.
차녀 로지나의 호위기사인 도르얀손은 리얀데르손의 남동생이며 형과는 달리 부드러운 분위기가 있었다.
손님으로 온 어떤 영애의 호위기사인 루퍼트는 호리호리하고 선이 고와 중성적인 외모를 가졌다.
마찬가지로 손님으로 온 다른 영애의 호위기사인 라이런스란 자는 과묵하고 딱딱한 분위기를 풍겨댔다.
또 다른 영애의 호위기사인 에녹이란 자는 꽤 사교적이었다. 함께 일하는 호위기사들에게 쓸데없는 잡담을 잘 걸었다. 게다가 클레어에게 관심이 있는듯 그녀와 나란히 서있으면서 종종 말을 걸었으나, 클레어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녀는 필요한 대꾸만 하고 바로 입을 닫아버리는 일이 많았다.
“버나드!”
불쑥 데보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입구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만찬장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중이었다. 사방에 귀족들이 앉아 있음에도 전혀 눌리지 않고 주변을 신기하게 둘러보던 그녀는 가까이 다가와 버나드에게 물었다.
“방 정리는 끝났어. 이제 뭐할까?”
“말 여물은 줬어?”
“응, 버나드가 시킨대로 배부르지 않게 적당히 먹였단다?”
버나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잘했어. 방에 돌아가서 쉬고 있어. 내가 늦는 것 같으면 먼저 자도 돼.”
“언제 끝나니?”
“모르겠어. 샤를님이 주무시러 가야 끝나.”
데보라는 주위를 둘러보며 샤를을 찾더니, 이내 영애들에게 둘러싸인 그녀를 발견하자 못마땅한듯 미간을 좁혔다.
“버나드가 가서 술을 잔뜩 먹이면 안되는거야?”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묻자 버나드가 피식 웃었다.
“어서 돌아가서 쉬어. 일하는 중이라 다른 사람하고 잡담하면 안돼.”
“버나드가 돌아올때까지 안자고 있을거란다? 나중에 봐.”
데보라가 작게 손을 흔들며 만찬장을 떠난뒤 이어서 사만다가 나타났다.
“방금 그 여자가 네 종자라며?”
한 손에 구리술잔을 들고 있던 그녀는 위에서 아래까지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매혹적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누구를 유혹하려는 건지 몹시 잘 어울려서, 특별히 야한 몸짓을 하는 것이 아님에도 버나드는 그녀가 풍기는 색기에 그만 자신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의 주변에 서 있던 다른 호위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조금전까지 잡담을 나누고 있던 그들은, 사만다가 나타나자 즉시 잡담을 멈추고 젖가슴을 반 이상 드러낸 채 동그란 엉덩이를 흔들며 걷는 그녀에게 넋이 나간 채 시선을 떼지 못하는 중이었다.
“기사가 되긴 글렀는데? 가슴이 너무 커. 나보다 큰 여자는 처음 봤네.”
주변 사내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일부러 즐기는 건지, 사만다는 더욱 가슴을 펴고 걸어오더니 버나드에게 말을 걸었다.
“샤를의 호위는 할만해?”
“예, 힘들지 않습니다.”
“다행이네. 힘들다고 울면 어쩌나 했는데.”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마우면 이따가 내 방으로 와. 2층에 있어.”
이 여자는 정말이지 조금만 틈만 주면 훅 들이댄다.
버나드는 짐짓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 생각은 전에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누가 뭐래? 혼자 무슨 생각을 한거야?”
그녀가 뭔 엉뚱한 소리냐며 큭큭 웃는다.
“2차 걷는 사자 전쟁에 관한 얘기를 상의 하자는 거야. 너, 하고 싶잖아, 전쟁.”
“……?”
뜻밖의 소리에 놀란 버나드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프레드릭왕을 정당한 수단으로 왕좌에서 끌어내릴 수 있는 기회를 잡고 싶은 버나드가 간절히 원하던 바다.
“다른 가신들의 주장대로 샤를이 이대로 고향으로 돌아가는게 나을지, 아니면 네 주장대로 즉시 아케르니아 제국의 수도로 향해야할지, 오늘밤에 열심히 나를 설득해봐. 네 의견이 정말 타당하다고 생각되면 앞으로 힘을 실어줄테니까. 그리고…”
그녀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끈적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개인적으로 필요한게 있으면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줄 수도 있어. 물론 그거야 너의 선택에 달렸지만. 이제 막 기사가 돼서 큰 돈이 필요하잖아? 후우ㅡ”
그녀가 입김을 불자 진한 술냄새를 담은 바람이 입술에 살포시 닿았다.
버나드가 담담히 그녀를 응시하며 무언가 말하려던때였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영애들이 모여앉은 자리에서 갑자기 샤를의 언성이 커졌다.
“제 아무리 훌륭한 용병왕 레퍼드의 제자라고 해도 우리 천재 검사 클레어를 이길 수 없어요!”
만찬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영애들에게 쏠렸다.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모여앉은 자리인만큼, 만찬 내내 가뜩이나 주목을 받고 있던 와중에 별안간 소동이 일어나자 모두가 흥미롭게 쳐다봤다.
“좋습니다! 그럼 우리 내기를 하죠! 호위기사들끼리 명예로운 시합을 벌여서, 우승하는 사람에게 우리가 돈을 걷어 멋진 갑옷을 한 벌 해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의 주인에게는 아름다운 고가의 드레스를 한 벌 선물해주고요!”
대충 상황을 보니, 영애들끼리 기분 좋게 술을 마시며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다가 슬슬 술기운이 오르자 서로의 호위기사가 잘났느니 못났느니 하면서 사소한 말다툼이 일어났고, 그런 상황에 도도하고 콧대 높은 샤를이 가만 있을리 없었다. 나도 질 수 없지 하고 나서면서 결국에는 내기로까지 번진 모양이다.
“사만다!”
영주 가족과 함께 상석에 앉아있던 미셸이 버나드와 같이 있던 사만다에게 손짓했다.
사만다는 떠나기전 버나드를 돌아보았다.
“만찬이 끝나면 내 방으로 와. 걷는 사자 전쟁에 관한 이야기만 할테니까.”
그녀는 윙크를 하고 나서 얼른 미셸에게 달려갔다.
“부르셨습니까?”
미셸은 골치 아픈 얼굴로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샤를에게 가서 취했으면 빨리 방에 가서 자라고 해. 아니지, 지금 당장 데리고 나가. 빨리 재워.”
“네,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사만다가 자리를 떠나려는 찰나 옆에서 듣고 있던 영주 저지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미셸님!”
그가 신이난듯 말했다.
“재밌는 볼거리지 않습니까? 연회의 흥을 좀 더 돋우기 위해 이만한 구경거리가 없을듯하니 나는 아킨테 가문의 장녀 샤를리나 양의 제안을 적극 지지합니다!”
순식간에 일이 커졌다.
“어디까지나 연회의 흥을 돋우기 위한 것이니, 가문끼리 서로 승패에 미련을 두지 맙시다. 승자에게는 아름다운 영애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주는 영광스러운 선물을! 패자에게는 격려의 박수를 보냅시다!”
저지 영주가 힘차게 외치니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크게 박수를 치며 환호를 보냈다.
어차피 자기들이 싸울 것도 아니고 기사들의 대결만큼 재밌는 구경거리도 없었다. 마상창시합처럼 돈 주고 사서라도 보는게 기사들의 대결이다.
“자, 그럼 내기에 참가할 사람은 살짝 손만 들어주세요. 우선 난 무조건 참가할 겁니다.”
성의 주인인 저지 영주의 허락과 적극적인 협조를 받은 샤를은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되자 미셸이 나서서 말리기도 어려웠다. 흥을 깰바에 그냥 놔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어쩔 수 없지.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솜씨들 구경이나 해야겠군.”
이후 여섯 영애들은 서로 질 수 없다는듯이 전원 참가를 희망했고, 그리하여 총 다섯가문, 여섯 호위기사들간의 시합이 갑작스럽게 결정된 와중에 버나드는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이 중에 레퍼드의 제자가 있어?’
아까 샤를이 외치는 소리를 듣기로는, 다른 영애들이 데리고온 다섯 명의 호위기사들중 한명이 레퍼드의 제자란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레퍼드가 언제 또 제자를 뒀단 말인가?
자신과 만나기 전에? 설마, 그건 아닌듯 싶다. 그렇다면 제자의 나이는 최소 서른이 넘어갈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젊고 어리다.
‘그렇다면 프레드릭왕을 떠난 이후라는 건데……’
9년 전 왕과 결별했으니 이후에 떠돌아다니며 제자를 하나 둔듯 싶다.
그러나 9년이란 시간은 레퍼드의 제자 소리를 듣기에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그에게 배울게 많으니까.
심지어 레퍼드 밑에 있지 않고 현재 영애의 호위기사를 하고 있다니 그 실력에 더더욱 의문이 갔다.
‘단기간만 배운건가……’
뭐, 어찌되었든 좋다.
레퍼드의 제자라는 자의 실력이 어떤지 눈에 담아둘겸 버나드 역시 호위기사들간의 시합을 반겼다.
잘하면 제자의 검술을 보고 옛생각이 떠오르며 큰 배움도 있을 것이란 생각에 기대도 컸다.
“아, 그러고 보니……”
문득 샤를을 향해 의문이 들었다.
샤를은 분명 자신이 아닌 클레어를 염두해두고 다른 영애들에게 내기를 제안했을지언데, 혹시…… 그녀는 모르는건가?
버나드는 다급히 클레어쪽을 바라봤다.
“클레어, 너 오른손목 다친거 샤를리나님은 모르는거야?”
클레어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응……”
“맙소사. 그럼 왜 그러고 있어? 빨리 가서 말해야지!”
그녀가 시선을 들어 버나드를 지그시 쳐다봤다.
“네가 대신 출전해.”
그러면서 질투섞인 음성으로 새침하게 덧붙였다.
“어차피 네가 나보다 뛰어나잖아.”
“클레어!”
때마침 샤를이 다가왔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채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얘기 들었지? 우리가 꼭 이겨서 지들의 호위기사가 잘났다고 떠들어 대는 영애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버리자!”
이어 버나드를 흘겨 보면서 싸늘하게 뱉었다.
“당신은 왜 여기있어요? 설마 본인이 나가고 싶어하는건 아니겠죠? 클레어랑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구석에 찌그러져 있으세요. 어머니의 첩자!”
그에 버나드는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음… 미워도 절 써야할 겁니다. 클레어 경 대신에 말이죠.”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인데 제정신으로 돌아오게끔 얼굴에 술잔을 던져줄까요?”
“그리 하시면 샤를님은 당신을 위해 싸워줄 호위기사를 모두 잃게 되실겁니다. 저는 술잔에 맞아 기절할테고 클레어 경은 이미 부상을 당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