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되찾는 노력, 수련21
데보라도 덩달아 활짝 웃었다.
“버나드는 무엇이든 잘해낼거예요 오라버니.”
잠시 후 버나드가 떠나려고 하니 그녀도 서둘러 거울을 내려놓고 따라왔다. 방금전에 버나드는 무엇이든 잘할거라고 말하더니 정작 그녀야말로 노파심이 들어 따라오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누나도 옆에서 도와주고 싶어. 남자들은 요리나 청소 같은거 하기 싫어하잖아? 허드렛일은 전부 누나한테 맡겨주렴?”
“호위는 요리랑 청소 같은거 안해.”
“안한다고…? 흐음, 그러면 있지. 뒤에서 따라다니기만할테니까 여자들이 할만한 일이 있으면 뭐든 시켜줘. 사소한 심부름도 괜찮아.”
“음……”
버나드는 턱을 어루만지면서 잠깐 고민했다.
“그러고 보니 내 잔심부름을 맡아줄 종자가 필요했는데……”
귀족생활을 영위할때 평소 어디를 가든 하인이나 종자 서너명을 거느리고 다니던 버나드였으니, 있다 없으니까 허전하고 불편한 일이 많았다. 그렇기에 잡다한 일들을 데보라에게 시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버나드의 머릿속에는 친하게 지내는 누나니까 편의를 봐주고 깍듯이 대접해야한다는 그런 생각 따위는 없고, 자신이 귀족 출신이기에 별볼일 없는 배경을 가진 데보라와 마크를 아랫사람으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버나드의 의식 저편에는 지독한 선민의식이 깔려있다. 데보라를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못하는게 성격탓이라기 보다는 본능적으로 그렇게 나오는 것 뿐이었다. 평민들과 같이 지낸다고 하루아침에 고쳐질 일이 아니었다.
“종자가 생길때까지 당분간 데보라를 쓰는편이 좋겠군.”
그녀를 향해 환하게 웃어보였다.
“같이 가자.”
***
샤를의 숙소에 도착하자 입구 앞에 화려한 삼두마차가 대기중이었다.
샤를은 아직도 준비중인지 하녀들이 치장에 필요한 도구들을 들고 숙소를 바쁘게 들락날락 거리고 있었다.
버나드는 안으로 들어가려던 한 하녀를 붙잡고 자신이 도착했다는 것을 알렸다. 그 후, 하녀가 들어간지 20분 정도 지나서야 마침내 샤를이 아름다운 드레스 차림으로 걸어나왔다. 그 뒤에 클레어도 있었다.
“이제 오다니 정말 별꼴이야.”
향수 냄새를 진하게 풍기던 샤를은 버나드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고 힐끗 흘겨만 보고는 먼 곳을 쳐다보며 쏘아붙였다.
“왜 이리 늦은거죠?”
양쪽이 첫인사라고 할 수 있는 자리에서 그녀가 대뜸 짜증섞인 반응을 보이자 버나드는 의아했지만 가볍게 묵례하며 대답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 말투는 매우 기품있고 정중했다.
샤를은 못 배웠을게 명백한 버나드의 말투와 몸가짐이 뜻밖에도 빈틈이 없자 속으로 놀라는 한편, 더욱 짜증이 났다.
“늦어서 죄송합니다가 다예요?”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앞으로? 앞으로도 내 호위기사를 할 수 있을거라고 장담하나 보죠? 아, 오만해라.”
샤를이 비웃으면서 빈정대자 뒤에서 가만히 듣고있던 데보라가 그새를 못 참고 발끈했다.
“아가씨! 버나드는 20분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0분전? 지금 그걸 일찍 왔다고 자랑하는 거예요? 참나, 어이없어. 최소 한 시간 전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클레어 경을 보세요. 클레어 경은 두 시간전부터 여기서 대기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버나드는 아가씨의 호위를 맡을지 모르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가 뒤늦게 명령을 받고 부랴부랴 서두른거예요!”
“아니 그런데… 당신은 누구길래 나한테 자꾸 말대꾸를 하는거죠? 건방지게.”
“죄송합니다, 제 종자입니다. 쫓아내겠습니다.”
버나드가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부를때까지 멀리 떨어져 있어.”
“하지만 버나드! 억울……!”
검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틀어막으며 말을 잘랐다.
“쉿. 나랑 같이 다니고 싶으면 그렇게 해. 그게 종자가 할 일이야.”
“알았어……”
버나드의 개인짐을 등에 메고 있던 데보라는 말고삐를 손에 쥔 채 시무룩한 얼굴로 말을 데리고 멀찌감치 떨어졌다.
“종자도 스승을 닮아 버릇없고 무례하군요. 끼리끼리 어울린다더니 역시나.”
샤를은 코웃음을 치고 근처에 대기중인 마차쪽으로 향했다. 버나드는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라가면서 클레어와 조용히 시선을 맞췄다.
“손목은 괜찮아졌어?”
“응……”
“아직 완전히 낫지는 않았지? 내가 알려준대로 하고 있어?”
“매일 하고 있어. 통증이 많이 줄었어……”
“잘했어.”
버나드는 미소를 짓더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얌전히 샤를을 뒤따라갔다. 클레어는 뒤늦게 당황했다. 자신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온 그가 뭐랄까, 어이가 없었다. 우리가 언제부터 친했다고 거리낌 없이 말을 거는지. 그러나 더 어이없던 것은 그의 물음에 순순히 대답해준 자신이었다. 정말 바보 같았다. 분명 그녀는 버나드의 실력을 질투하고 그가 미운데, 그는 눈 깜짝할 새에 그녀의 경계심을 넘어서,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 틈엔가 그의 질문에 착실히 대답하는 자신이 있었다.
‘바보같이 방심하고 말았어. 검술 실력처럼 순식간에 치고들어오는 기술이 대단한 아이야. 앞으로 조심해야지……’
마차에 다다르자 샤를은 기다렸다는듯이 또다시 성질을 부렸다.
“여기 바닥에 발판은 어디갔죠? 설마 나보고 다리를 찢고 올라가라는 건가요? 숙녀에게? 이런건 호위기사가 미리 준비해놨어야죠!”
사실 마차에 올라탈때 쓰는 발판을 샤를이 하인을 시켜 미리 치워둔 것이었다. 버나드를 한번이라도 더 갈구기 위한 잔꾀였다.
‘후후, 허둥지둥 대면서 발판을 찾으러 뛰어다니겠지?’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버나드는,
“제 손을 쓰십시오.”
“네? 손이요?”
버나드는 흙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두 손바닥을 겹쳐서 내밀었다.
“제 손을 밟고 올라가십시오.”
“뭐라고요?”
‘어떻게 이런 근사한 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지?’
샤를은 그 모습에 살짝 감탄하고 말았다.
멋지게 차려입은 호위기사가 한 치의 흔들림이나 군더더기 없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샤를이 마차에 오를 수 있도록 정중히 무릎꿇고 있는 모습이 마치 그에게 대접 받는 기분이 들고 오로지 자신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의지가 보여 썩 나쁘지는 않았다.
샤를은 가슴에 손을 올리며 헛기침을 했다.
“뭐, 뭐…… 크흠, 좋아요. 그렇게 하죠.”
샤를이 도도한 표정을 짓고 흰 구두를 신은 발을 내밀자 버나드는 자신의 손바닥으로 힘껏 그녀의 발을 받쳤다.
그런식으로 그녀를 무사히 마차에 태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차에 들어가 앉은 샤를은 갑자기 호기심이 솟구쳤다.
‘저 녀석… 천한 신분일줄 알았건만 하는 행동을 보니 어느 배운 집안의 도련님 같은데, 아버지의 이름이 뭐지?’
한번 물어볼까…?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니야. 괜히 물으면 자신한테 관심있는줄 알고 우쭐할게 뻔해.’
그녀는 다시금 전의를 불태웠다.
‘두고봐,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괴롭혀줄테니까.’
하지만 샤를은 뒤이어 벌어진 버나드의 행동에 본인이야말로 속수무책으로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버나드는 마차의 문을 닫기전 뜬금없이 샤를에게 푹신한 베개를 선물했다.
“이걸 왜 주죠? 나보고 자면서 가라고요?”
샤를이 어이없다며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버나드는 진지한 얼굴로,
“바들레인성까지 가는 길에 험준한 구간이 있습니다. 마차가 크게 덜컹거릴테니 천장에 머리를 부딪히지 않도록 잠시만 정수리에 올려놓고 있으십시오. 험준한 구간이 나오면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이 길을 어떻게 알아요?”
“전에 와봐서 압니다. 그럼, 이만 문을 닫겠습니다.”
버나드는 인사를 올린 후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샤를은 손에 쥐고 있는 베개를 내려다보면서 주군의 작은 불편함도 놓치지 않는 버나드의 세심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그가 예상외로 강적임을 깨달았다.
힘든 싸움이 될 것 같다며 그녀는 재차 투지를 불태웠다.
“흥, 지금부터 시작이야. 지옥에 온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겠어.”
곧 미셸의 마차에 이어서 샤를의 마차가 출발하는 순간부터 그녀의 집요한 공격이 시작됐다.
별일 아닌 일에도 말을 타고 뒤따라오는 버나드를 불러 귀찮게 하고,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화를 내기도 했다.
바들레인 성에 도착할때까지 같은 일이 반복됐다.
하지만 결과는……
샤를의 완패였다.
버나드는 마치 누구도 뚫을 수 없는 인간방패 같았다. 그녀가 화를 내면 뜻밖의 말을 하거나 물건을 내밀어서 그녀를 당황케하거나 기세를 떨어뜨렸고, 그녀가 하찮은 잔심부름 같은 것을 시키면 일절 인상을 구기지 않고 완벽히 수행해냈다. 게다가 시키는 것만 달랑하지 않고 샤를이 왜 시키는지 숨은뜻까지 헤아려서 일을 매우 훌륭하게 처리해냈다.
“얄미워 죽겠어!”
달리는 마차에 앉아있던 샤를은 분한 마음을 사과주로 달랬다.
오랜만에 친척들을 만나는게 긴장된 나머지 막사에 두고온 사과주를 버나드에게 가져오랬더니, 얼마뒤 말을 타고 돌아온 그가 사과주와 함께 긴장이 풀어지는데 도움이 된다며 알약을 내밀었다. 아킨테군이 평소에 가지고 다니던 비상약을 받아왔단다. 샤를은 그런 약이 있는줄도 몰랐다.
“저 오만불손한 녀석은 왜 모르는게 없는거야.”
일을 잘하는 그가 더욱 얄미워졌다.
시키면 뭐든지 뚝딱 해낸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을 잘하는거 보면 실은 괜찮은 녀석이 아닐까? 말솜씨도 좋은듯 하고 매너도 있고……’
그러나 샤를은 이내 머리를 흔들며 그 생각을 부정했다.
“원래 잘난척하는 녀석들이 일만 잘해.”
그러고 나서 그녀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어느새 바들레인성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
“잘 오셨습니다!”
바들레인 가문 사람들이 모두 내성 밖까지 마중을 나와 미셸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한때 왕비이기도 했기에 전국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아킨테의 미셸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귀족들도 많았다.
“오오, 저분이 바로 아킨테의 미셸님이란 말인가! 미모가 대단하시군!”
그와 더불어 미셸을 맞이해주는 영주 저지와 영부인 페티야의 시선에는 따스함이 묻어났다.
“이게 얼마만인가요, 미셸.”
“보고 싶었어요, 페티야.”
“자자,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 미셸님을 환영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놨지요. 기대하셔도 좋을겁니다!”
다른 한편에선 기사단장 니콜라스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노기사 세레딕과 가벼운 포옹을 나누며 반가움을 표하고 있었다.
“오랜만일세.”
“자네도 잘지냈는가?”
양집안이 서로 인사를 주고받은 후, 하인들이 말과 마차를 마구간으로 옮기는 동안 미셸 일행은 저마다 방을 배정받았다.
버나드는 곧장 샤를을 따라나섰다. 그녀의 방은 3층에 있었고 미셸의 옆방이었다.
“당신은 들어오지마요. 클레어만 들어와.”
부득이하게 남자라는 이유로 샤를에게 쫓겨난 버나드는 복도에 가만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데보라는 아까 버나드가 배정받은 방을 정리하러 떠난 상태였다. 버나드는 윗사람을 모시는 호위기사지만, 그래도 엄연히 아킨테 가문의 가신이기에 다행히도 방을 하나 배정 받을 수 있었다.
방은 작고 초라한데다 마구간 옆에 위치해 있었으나,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쉴 공간이 있어 버나드는 그저 좋았다. 그리고 데보라와 방을 같이 쓰기로 했다. 데보라는 종자였기에 방을 배정 받을 수 없었고, 하인들과 같이 자야하는 것을 버나드의 배려로 같이 쓰게 되었다.
“언제 나오려나……”
미셸 일행을 환영하는 저녁 만찬을 앞두고 대략 두 시간 정도 문앞에서 지루하게 대기하고 있을때쯤, 마침내 샤를이 드레스를 바꿔 입고 밖으로 나왔다. 낮에 입었던 것보다 더욱 화사한 느낌이나는 연회용 드레스였다. 그녀는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버나드를 발견하자 못마땅한 눈길로 바라봤다.
“다른데 안가고 여기서 뭐해요? 계속 기다린건가요?”
“네, 샤를리나님께서 나오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아, 정말.”
그녀가 팔짱을 끼며 한숨을 푹 쉬었다.
“만찬장은 따라오지 마세요. 오늘 만찬장에 초대된 영애들이 각자 자기들의 호위기사를 데리고 올텐데 그 사람들한테 당신을 보여주기 창피하네요. 호위기사들이 전부 검술 실력이 좋고 집안 배경도 훌륭한 사람들 뿐이거든요. 그러니 당신보다 실력 및 출신성분이 훨씬 나은 클레어를 데려가겠어요. 버나드 경은 이 복도에서 계속 대기 하고 있으세요. 내 방이나 철저히 지키고 있으란 말입니다. 알겠어요?”
샤를은 하고 싶은 말을 아끼지 않고 다 했더니 그제야 속이 좀 후련했다. 마차를 타고올때 있었던 일들을 제대로 복수하는 기분이었다.
“자, 대답은?”
“……”
“대답은 어따 팔아먹었어요? 빨리 대답 안해요?”
“……”
버나드가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전 샤를리나님의 명령을 따를 수 없습니다.”
“뭐라고요?”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전 샤를리나님께 충성을 맹세한 정식 호위기사가 아닙니다. 미셸님의 명령으로 샤를리나님을 잠시 지키고 있는 것 뿐입니다. 간단히 말씀드려서 제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미셸님 뿐입니다. 따라서 만찬장에서도 계속 호위를 이어나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