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되찾는 노력, 수련20
하녀가 양손으로 공손히 떠받치고 있는 것은 잉어 모양의 금괴 하나였다. 주먹으로 쥐면 완전히 감쌀 수 있을만큼 작았다. 하지만 그게 말 한 필 값이다.
“갓 기사가 되셨기에 무구를 구입하려면 지출이 상당하실거라며 작지만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고 전하셨습니다.”
버나드는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달라며 주저없이 금괴를 받았다.
솔직히 금괴 선물은 고마웠다.
음식이나 물건을 사서 주는 것보다 차라리 돈으로 주는게 나았다. 현재 버나드는 기사임에도 칠푼이 기사다. 기사인데 기사스럽지 못했다. 버젓한 갑옷도 없고 데리고 다니는 종자도 없다.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전마와 칼 한자루 뿐이었다.
아킨테군에서 기사에게 지급해주는 장비는 없다. 모든 장비는 개인이 스스로 마련해야했다. 전마는 미셸이 기사 작위 수여식때 준것이고 칼은 얼마전 라인형제에게 암살당할뻔한 미셸을 도와준 보답으로 아킨테 강철로 만든 칼을 공짜로 받은 것이다.
아무튼 기사답게 무장을 하는데 집 한 채 값이 나가는데, 사만다가 준 금괴 덕분에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이걸로 가슴을 가릴만한 흉갑부터 사야겠어……”
손바닥에 놓인 금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금괴 하나면 질 좋은 흉갑은 못구하더라도 그럭저럭 저가의 가슴가리개 정도는 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철흉갑이 아닌 구리가 듬성듬성 들어간 가죽흉갑 정도로……
***
윙블 영지를 떠난지 아흐레째 되는 날.
마침내 저 멀리 바들레인 성이 보였다.
바들레인 성은 중규모의 도시로 미셸의 외가쪽 사촌 언니인 페티야가 남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아킨테군은 바들레인 성으로부터 3km 떨어진 평원에 야영터를 정했다.
앞으로 나흘간 이곳에 머물 계획이었고, 하인과 기사들이 야영지를 세우는 동안 미셸과 고위 가신들은 화려하게 차려입으며 성에 들어갈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빨리 가서 만나고 싶군. 해줄 얘기들이 많아.”
미셸은 오랜만에 반가운 사촌언니를 볼 생각에 들떠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처리해둘 일이 있었다. 최근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는 버나드를 신경쓰는 일이다. 그녀는 막사로 버나드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가까이 와보거라.”
버나드가 의아해 하며 코앞까지 다가오자 미셸은 그의 차림새를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쭉 훑어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옷을 맞춰두길 잘했어. 여전히 너저분한 옷만 입고 다닐줄이야.”
“네?”
맞춰둔 옷이라……
버나드의 머릿속에 며칠 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킨테 가문에 잠입해 있던 첩자를 찾아낸 기념으로 미셸이 재단사를 불러 옷을 맞춰줬던게 생각난다.
“옷이 완성됐단다. 옷맵시가 어떤지 직접 볼 생각에 내가 갖고 있었어. 한번 입어보거라.”
그녀가 깔끔한 새 옷 한 벌을 건넸다.
버나드는 두 손으로 받아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서 갈아 입을까요?”
“안에 들어가서 입어.”
미셸의 호의로 그녀의 침실에 들어갔다.
풀다만 짐들이 여기 저기 널려있는 텅빈 침실. 피에르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버나드는 아무 거리낌없이 자신을 침실에 들이는 미셸에게 살짝 놀랐다.
“내가 어려 보여서 그런가…… 어쩌면 날 믿고 있다는 뜻일지도.”
빠르게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호오……!”
하얀 바탕에 단정하면서도 화려한 느낌을 주는 귀족옷을 입은 버나드의 모습을 본 미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지어졌다.
“옷을 바꿔 입으니 멋진 신사가 됐구나. 음. 음. 그래야지. 소년티가 나질 않고 듬직한 청년 같아보여. 재단사가 아주 멋지게 만들어줬구나. 딱 맞아, 잘 어울려.”
“감사합니다.”
옷이 날개라더니 오랜만에 멋스러운 옷을 차려입은 버나드도 내심 속으로 즐거웠다.
이제야 좀 귀족다워진 느낌에 그동안 움츠려있던 귀족으로서의 몸가짐과 자긍심이 스멀스멀 되살아났다.
“밖에 나가거든 내 전속 미용사한테 가서 머리 손질을 받거라. 미리 말해놨으니 알아서 잘 해줄거야.”
그 말을 듣고 버나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전속 미용사까지 빌려주는건 좀 과하고 부담스러운 면이 있었다.
“미셸님. 어떤 연유로 제 복장을 신경써주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 내가 말 안했던가?”
“네.”
그녀가 밝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와 함께 바들레인성에 들어갈거란다. 네게 샤를의 호위를 맡길거야.”
“네?”
버나드는 뜻밖의 이야기라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제 실력이 모자라 샤를리나님의 호위는 당분간 맡기 어렵다고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안다. 그래서 네가 매일 같이 피나는 훈련을 하고 있잖느냐. 그럼에도 네게 호위를 맡기려는 이유는 이 기회에 잠시나마 감이라도 잡아보라는 뜻에서다. 언젠가 정식으로 샤를의 호위를 맡게 될텐데 미리 경험해보라는 얘기지.”
그녀가 편히 생각하라며 말을 이었다.
“바들레인 가문 사람들은 모두 나와 친분이 깊은 사람들이야. 그러니 그쪽에서도 우리를 환대해주며 꼼꼼이 살펴봐줄 것이고, 샤를에게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테니 네가 호위를 체험해보기에 딱 안성맞춤인 곳이란다. 게다가 그곳에 샤를의 친구들인 영애도 많아. 전부 믿음직한 호위기사들을 데리고 있어서 네가 그들을 보고 얻는게 있을지도 모른단다.”
잠깐 말없이 곰곰이 생각해보던 버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미셸님께서 바라신다면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기로 바들레인 가문 사람들은, 영주 저지, 영부인 페티야, 장녀 올가, 차녀 로지나 이렇게 네 식구다. 문득, 이전 직업병이 도졌다. 영주 저지의 최근 몸 상태가 어떤지, 그리고 영부인 페티야는 사촌동생인 미셸과의 친분이 여전히 돈독한지 등등 이전에 알고 있던 정보를 갱신하기 위해 정보 수집 목적으로 바들레인 가문을 한번 들여다 보고 싶었다.
“그럼 그런줄 알고 샤를에게 말해놓으마. 머리 손질하고 준비가 되는 즉시 샤를을 찾아가도록 해.”
“네.”
“어라? 손님이 오셨단 소리는 못들었는데 어디서 오신분이세요?”
불쑥 등뒤에서 사만다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입구를 가린 천막을 젖히고 그녀가 안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뭐야, 너 버나드니?”
사만다가 깜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버나드는 그녀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보인 후 다시 미셸에게 눈을 돌렸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샤를의 호위를 잘 부탁한다.”
“맡겨주십시오.”
뒤돌아서 입구쪽으로 향하는데 안으로 들어오던 사만다가 길을 막았다.
어쩔 수 없이 강제로 설 수밖에 없었다.
“이야, 멋있는데?”
잘 차려입은 자신을 위아래로 쭉 훑어보는 그녀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미셸이 흐뭇하게 웃었다.
“바들레인 성에 들어가려면 그 정도는 차려 입어야지.”
“미셸님이 주신 옷이에요?”
“응.”
“정말 멋진 옷을 주셨네요. 버나드와 잘 어울려요.”
새삼 달라진 모습의 버나드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를 뚫어지라 쳐다보며 그녀가 막았던 길을 비켜선다. 별말 없이 비켜줘서 버나드는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긴 일렀다. 사만다는 어깨를 부딪히고 스쳐지나가면서 슬쩍 손을 뻗어 버나드의 성기를 가볍게 움켜쥐었다.
“반했어.”
라고 귓가에 속삭이며 아무일도 없었다는듯이 곧장 그를 지나쳤다.
버나드는 그대로 막사를 빠져나와 입구 앞에서 걸음을 멈춰섰다.
“행동 하나 하나가 마치 서큐버스 같군.”
남자의 양기를 빨아먹는 서큐버스.
자신을 유혹하는 사만다의 손짓 몸짓 말투 그 모든게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하반신에 달린 물건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키클롭스의 심장을 먹어야겠어. 혈기왕성한 몸이라서 그런지 손길만 스쳐도 서버리니 원.”
사만다의 공격이야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성기가 너무 건강해서 탈이다.
***
“절대 싫어!”
샤를이 짜증난 얼굴로 드레스를 벗어던졌다. 그녀는 속옷을 입은 채로 실내를 쿵쿵 걸어다니며 클레어에게 화를 냈다.
“내가 분명히 싫다고 했잖아! 어머니가 시킨다고 고개를 끄덕이면 어떡해! 네가 안된다고 말했어야지!”
“제 주제에 어찌 감히 미셸님께서 시키신 일을 거부하나요?”
“그래도 안된다고 했어야지! 난 그녀석이 호위하는거 죽어도 싫어! 내 근처에 절대 오지말라고 해! 닭살이 돋아서 냅다 머리를 들이박을지도 모르니까!”
클레어 또한 잘났기 그지 없는 버나드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건 마찬가지였지만, 그와 함께 일하는 게 싫지는 않았다. 버나드는 버나드고 클레어는 클레어니까. 서로 제 할일만 잘하면 그 뿐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까지 그를 싫어하죠? 서로 얘기를 나눠 본적도 없잖아요.”
샤를이 더욱 이맛살을 찌푸렸다.
“모르겠어 나도! 그냥 그 녀석! 내가 아는 사람을 닮은 것 같아서 짜증나고! 싫고! 미워! 왜 그런 생김새를 갖고 태어났는지 재수없어!”
“미셸님의 명령이라 그를 제외할 수가 없어요.”
“그럼 나도 안나갈거야! 하루종일 막사에만 처박혀있을거야!”
“올가 님과 로지나 님이 보고 싶지 않으세요?”
“보, 보고 싶지만…!”
샤를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답답하다는듯 베개에 머리를 처박았다.
“아휴, 짜증나!”
“정 그러면 같이 경호 하되, 버나드 경에게 샤를님 근처에는 다가가지 말라고 제가 주의를 주겠습니다. 멀찌감치 서있게 하면 될까요?”
샤를은 그것조차도 싫은 모양인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한동안 푹 들어간 베개에 머리를 박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좋은 생각이 났어!”
“어떤 생각이요?”
“내가 왜 그 녀석 때문에 괴로워 해야해? 그 녀석이 나 때문에 괴로워 해야하는거 아니야?”
“그래서요?”
샤를이 씨익 웃었다.
“그 녀석을 가까이에 두고 죽도록 갈구는거야. 작은 거 하나하나 일일이 트집을 잡아서 그 녀석의 귀에 피가 나도록 꾸짖으면 결국 지쳐서 나가떨어지겠지? 그 녀석이 허겁지겁 어머니한테 달려가서 제발 샤를님의 호위에서 빼달라고 간절히 비는 모습을 떠올려봐! 어때? 재밌겠지!”
“……”
클레어는 속으로 유치한 장난이라고 생각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샤를을 달래는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좋은 방법이네요.”
“그렇지?”
샤를이 아주 신이난듯 말했다.
“잘 들어 클레어! 우리의 작전은 이거야! 넌 절대 내 곁으로 오지마!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면서 무슨 일이든 전부 그 녀석만 시키도록 해! 그래야 내가 갈굴 일이 많아지지 않겠어? 알았지?”
클레어는 어쩔 수 없이 동의는 했으나 너무 심한 괴롭힘이 아닌지 조금 걱정이 들었다.
“버나드 경은 귀족 예절부터 해서 영애를 대할때의 몸가짐과 말투, 행동거지, 그리고 샤를님의 시중을 드는 방법이라든지, 샤를님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들을 전혀 모를텐데 괜찮을까요? 처음이니까 제가 옆에서 알려줘야할 것 같은데……”
“하지마! 절대 알려주면 안돼!”
샤를이 싱글벙글 웃으며 오늘 입고 나갈 드레스를 집어들었다.
“허둥지둥거리면서 어리바리 대는걸 갈궈야 묘미라고!”
***
야영지, 마크네 텐트.
“버나드, 정말 괜찮겠냐? 안떨려?”
샤를의 호위를 맡게 되었다니까 마크가 염려하는 얼굴로 버나드를 쳐다봤다.
“예전에 술마시다 얼핏 주워 듣기로는 아킨테 영애의 성격이 엄청 드세대. 짜증을 무쟈게 잘낸대지 뭐냐. 이런데 너도 괜히 실수라도 했다간 기사 작위 도로 내놓으라고 성질 부리는거 아니냐?”
허리에 칼을 차는 것을 마지막으로 출발 준비를 끝마친 버나드가 거울을 보며 옷 매무새를 점검하고 있었다. 얼굴 크기만한 거울을 앞에서 데보라가 두 손으로 들어주는 중이었다.
“걱정하지마. 샤를에 관한 것이라면 그녀가 여태껏 앓아왔던 병까지 술술 나열할 정도로 훤히 꿰뚫고 있으니까.”
마크를 돌아보며 자신감 있게 웃어보였다.
“세상에 나보다 그녀의 기분을 잘 맞춰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