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되찾는 노력, 수련14
“꼬마애가 방구석에서 달달 외운거 씨부리는 것 갖고 호들갑들 떨지마.”
르건이 말을 몰며 버나드와 사만다 사이를 지나쳐갔다. 르건은 선발대에서 사만다 다음으로 목소리가 큰 기사였으며 ‘황소 르건’이라고 불렸다. 그는 황소 같은 덩치에 걸맞게 싸우는 것을 좋아하고 성격도 거칠었다.
“꼬마야, 책에 나온 것과 실제로 해보는 것은 다르단다. 책에 나온 그대로 따라했다간 낭패를 볼 가능성이 크지. 진짜 중요한건 응용이야. 주어진 환경에 맞게 상황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가 중요하지. 그런 의미에서 나처럼 실력 좋고 머리가 뛰어난 인간들은 책 따위 필요없어. 굳이 배우지 않더라도 어떤 일이든 동물적인 감각으로 능히 수행하거든.”
그가 자랑스럽게 내뱉는 그 말이 엄청 우스웠는지 뒤에서 따라오던 기사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 중에 한 명인 젠더웬이 말했다.
“이봐, 사만다. 르건이 언제부터 머리가 좋았지? 난 저 녀석 머리가 자갈로 가득찬줄 알았어.”
젠더웬은 사만다의 사촌이자 고기를 여자보다 더 사랑하는 사내였다. 그래서 ‘고기에 미친 젠더웬’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사만다가 돌연 화를 냈다.
“나한테 물어보지마 개자식아.”
“별말 안했는데 왜 화를 내는거야?”
“몰라서 물어? 내가 르건의 부모야? 저 녀석에 관한걸 왜 나한테 물어봐?”
“그야 뭐… 가깝게 지냈으니까 몇 마디 해줄줄 알았지.”
“눈치 없는 새끼.”
사만다가 젠더웬을 향해 성질을 부리는 와중에 버나드 옆으로 어떤 여기사가 말을 몰고 다가왔다.
“사만다와 르건은 얼마전까지 사귀다 헤어진 사이야. 그래서 저렇게 화를 내는거란다.”
여기사의 이름은 밀라르네였다. 밀라르네는 상냥한 누나 같은 여자였다. 하지만 가슴이 매우 작아 동료 기사들에게 ‘위태로운 절벽의 밀라르네’라고 불렸다.
“사만다 앞에서 웬만하면 르건 얘기는 안하는게 좋아.”
“그렇군요.”
선발대가 출발한 첫날, 점심식사를 거르고 하루종일 말을 타고 걷기만했다. 사만다가 말하길 선발대는 하루 두 끼면 충분하다고 했다. 그렇게 해가 저물때까지 걷기만 하다가 어느 이름 없는 산기슭에서 야영을 했고, 모닥불에 둘러앉아 늦은 저녁 식사를 하며 서로 잡담을 나누었다. 기사들은 선발대의 새 얼굴인 버나드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들은 귀찮을 정도로 잡다한 질문을 해왔다. 그럴때마다 버나드는 단답형으로 짧게 대답하며 대충 둘러댔고, 점점 그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사만다는 식사를 마친 후 자신이 타고온 말의 안장을 풀고 말에게 풀을 먹였다. 그러고 나서 버나드가 있는 곳으로 가서 그와 나란히 앉았다. 버나드는 멍하니 모닥불만 바라보고 있었다.
“샤를의 호위기사가 되고 싶니?”
그녀가 물었다.
“미셸님은 그럴 마음인 것 같던데. 네가 영애의 호위기사가 될만한 실력이라고 생각해?”
그녀가 조롱하듯 웃었다.
버나드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할 수 있으면 하겠는데, 지금은 힘들듯 합니다.”
“욕심은 나는데 실력이 안된다?”
“그런셈이죠.”
“네가 샤를을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녀는 갑자기 얼굴을 들이대며 버나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미셸님은 대체 네 어디가 마음에 든 것일까. 내가 보기엔 평범해보이는데……”
그때 르건이 다가왔다.
“사만다, 꼬마랑 잡담할 시간이 어딨냐. 전서구는?”
“조금 이따 날릴 참이었어.”
“이것도 같이 보내. 오늘 우리가 지나쳐온 길을 좀 더 자세히 정리했다.”
“줘봐.”
사만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르건과 함께 사라졌다.
“버나드.”
은빛 갑옷을 입은 밀라르네가 다가왔다. 모닥불의 불빛이 그녀의 갑옷에 비춰 일렁거리고 있었다.
“네가 제일 먼저 불침번을 설거야. 불침번은 서봤니?”
“네.”
“그럼 요령을 가르칠 필요는 없겠구나. 젠더웬과 같이 한 조야.”
근처에서 훈제 고기를 뜯고 있던 젠더웬이 웃으며 외쳤다.
“꼬마야! 이 아저씨랑 서게 된걸 영광으로 알아라! 야한 얘기 잔뜩해줄게!”
“버나드를 잠 못자게 할 생각이야?”
밀라르네가 핀잔을 줬다.
“저 녀석 말은 듣지마. 전부 망상으로 지어낸 얘기들 뿐이니까. 여자도 별로 못만나본 놈이 야한 얘기만 잔뜩 안다니까.”
사만다는 야영지에서 조금 벗어나 키 큰 참나무 밑에서 전서구를 날렸다. 르건이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 할일 끝.”
저 멀리 비둘기가 푸드득 거리며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미소지었다.
“이제 자는 일만 남았군. 새벽에 일어나려면 얼른 자야겠어. 피곤하다.”
“그 전에 해야할 일이 있지.”
르건이 좀 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사만다의 정면에 섰다.
그의 생각을 읽은 사만다가 미간을 좁혔다.
“꺼져.”
그녀가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정신차려, 우린 헤어졌어.”
“헤어졌다고 끝난게 아니야. 마음은 멀어졌어도 몸은 아직 연결되어 있잖아.”
그는 도망치는 사만다의 어깨를 잡아 세우고는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을 하려고 했다.
사만다가 강하게 저항하며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꺼지라고 개자식아. 계속 이딴식으로 굴면 소리지를거야.”
“소리낼 수 없잖아.”
르건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넌 날 원하고 있어.”
르건은 단숨에 그녀를 끌어안으며 거칠게 입맞춤을 했다. 사만다는 입술을 꾹 다문 채 허벅지에 걸린 단검을 뽑으려고 했지만 르건의 손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녀를 나무 기둥으로 밀치더니, 키스를 하면서 튜닉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젖가슴을 마구 주물럭댔다.
그의 키스가 맛있어 사만다는 점점 저항할 의지를 잃어갔다. 르건이 그녀의 몸을 뒤돌린 다음 바지를 끌어내리자 그녀는 세상에 엉덩이를 드러내며 스스로 가랑이를 벌렸다.
르건이 바지춤을 풀고 단단해진 성기를 꺼냈다.
“거봐 너도 좋아하잖아.”
“빨리 싸고 끝내 쓰레기야.”
사만다는 서두르라는듯이 한층더 엉덩이를 뒤로 빼며 가랑이를 벌렸다.
“좆같은 새끼.”
르건이 그녀의 허리를 잡고 성기를 밀어넣었다. 사만다의 입에서는 연신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지만 속마음은 그게 아니라는걸 그녀의 몸이 증명하고 있었다. 그녀의 질안은 본 게임을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부터 홍수가 난 것처럼 흠뻑 젖어있었다. 르건의 성기가 몸속 깊숙이 파고 들어오자 그녀는 움찔하는 것과 동시에 쾌감으로 울부짖었다.
“흐윽!”
“하아, 따뜻하군. 간다.”
르건이 허리를 흔들기 시작하자 사만다의 엉덩이살도 덩달아 출렁거리길 반복했다.
“오늘이 정말 마지막이다 쓰레기 새끼야. 이 개 같은 놈. 하윽, 으윽! 제기랄…! 흐응!”
사실 르건이 싫어서 헤어진 것이 아니었다. 르건이 다른 기사 계집과 바람만 피우지 않았어도 계속 사겼을 것이다. 밉지만 싫지 않은 그가 몸안을 지배하자 그녀의 자존심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사만다의 입에서는 계속 비명처럼 교성이 터져나왔고, 르건은 그녀의 육체를 마음껏 탐닉하며 허기진 욕망을 채워나갔다.
“뭔 소리지?”
그 시간에 버나드와 함께 불침번을 서고 있던 젠더웬은 문득 어디선가 들려오는 여자의 신음소리를 듣고 주변을 살피며 돌아다녔다. 곧 그의 두 눈에 사촌인 사만다가 참나무 아래서 르건과 정사를 나누는 광경이 들어왔다. 눈을 깜빡거리며 멍하니 보던 그는 이내 벙찐 표정을 지었다.
“언제는 헤어졌다고 말도 꺼내지 말라더니 잡년.”
다음날도 첫날과 비슷했다. 말을 타고 목적지로 향하면서 약도를 그리고, 특이점이나 보충 설명할 것이 있으면 지도에 주석을 달았다. 그리고 점심 시간이 되자 사만다 일행은 식사 대신 커다란 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었다가기로 했다.
“하, 덥다 더워.”
사만다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앉아서 쉬고 있는데 오직 버나드만 주변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괜스레 호기심이 생긴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뭐하니?”
버나드는 나뭇가지를 주워들고 쪼그리고 앉아서 땅을 파고 있었다. 몇 번 파보더니 별것 없는지 금세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째서인지 그의 눈길이 심상치 않다.
“이상해요.”
“뭐가?”
“여기 괴물들이 지나다니는 길목 같아요.”
사만다가 뭔 엉뚱한 소리냐는듯이 피식 거렸다.
“인적 없는 숲길이니 당연히 짐승과 괴물들이 마음껏 활보하고 다니겠지. 주로 밤에 돌아다닐테고.”
“그렇겠죠?”
버나드가 말하려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확신을 할 수가 없어 대충 대화를 얼버무렸다.
이후에도 그는 계속 혼자서 주변을 돌아다녔다.
‘놈들이 표식을 해놓은게 있을거야. 분명.’
버나드는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때 바닥에 떨어져 있던 오크의 머리카락 한 올을 우연히 발견했다. 천만다행으로 정말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다. 오크의 머리카락은 검은색에 모발이 멧돼지의 털처럼 거칠고 두꺼웠다. 버나드는 머리카락 한올만 만져보고 그것이 오크의 것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평소 같으면 오크가 지나가다 흘린 것일뿐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겠지만, 지금 이 순간 자신과 일행들이 서 있는 이 장소가 전부터 예사롭지 않은 장소였던만큼 가벼이 넘기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여긴 오크의 서식지도 아니다.
“오크로드……”
버나드의 기억에 의하면, 오래전 이 근방에서 야영을 했던 영주와 300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단 하룻밤만에 잔혹하게 몰살당하는 일이 벌어졌었다. 남자들은 전원 목이 잘리고 내장이 파헤쳐진 채 숨져 있었고, 여자들은 한명도 남김없이 모두 실종되었다. 당시 왕실에서는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급히 조사단을 파견하였지만, 결국 사람이 행한 일이 아니라는 것만 밝혀 내고는 사건은 영원히 미궁에 빠졌다.
이후 조사단의 뒤를 이어 해당 사건을 조사하게 된 것은 밤의 늑대들이었다.
그때 버나드는 여러 종족을 오가며 들은 정보를 토대로 마침내 그날밤 일어난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프레드릭왕에게 보고했다.
“바들레인 지방은 옛부터 오크로드가 행차하는 길로 이용되어 왔었다고 합니다. 오크로드는 10년에 한번씩 대륙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이동하며 다양한 오크 종족들에게 세를 과시하는 의식을 치르는데 이를 아쉬르 기간이라고 한답니다.”
“그 많은 오크가 우리 왕국을 가로질러가는데 여태껏 목격한 이가 아무도 없다고?”
“바들레인 지방은 대지의 힘이 강해 기가 센 땅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땅의 성질이 워낙 드세 마법을 통해 모습을 감췄던 오크들의 마력이 약해지면서 그곳을 지날때만 잠깐 모습을 드러내는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갑자기 솟구친 우려는 그래서였다.
바들레인 땅에서 오크의 머리카락이 발견됐다는건 혹시 아쉬르 기간이 시작된게 아닐까 하고.
그도 그럴것이 올해가 바로 병사들이 실종되거나 떼죽음을 당한 사건으로부터 정확히 10년째 되는 해다.
“음……”
만약 아쉬르 기간이 시작됐다면 버나드의 짐작으로는 자신이 발견한 오크의 머리카락이 길잡이의 것이고, 뒤따라 오는 오크로드의 본대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먼저 앞장서 달리며 길을 안내하기 위한 표식 같은 것을 남겼으리라 추측했다.
하지만 현재 장소에서는 그 어떠한 표식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여긴 길목이 아닌가…”
얼마 뒤 휴식을 끝마친 사만다 일행과 함께 다시 길을 나섰고, 시간이 흘러 저녁이 되자 선발대 일행은 걷는 것을 멈추고 계곡 근처에서 야영을 했다.
저녁 식사 후 다른 사람들이 각자 제 할일을 하며 쉬는 동안 버나드는 주변을 유심히 살피며 돌아다녔다.
그러다 마침내 의심이 확신이 되는 중요한 증거물을 발견했다. 오크 언어로 간단히 ‘행로’라고 쓰여진 부적이 바위 밑에 끼워져 있었다. 그리고 부적을 발견한 발견장소에서부터 쭉 길을 따라가면서 그 주변에서 몇 개를 더 찾았다.
“맙소사.”
버나드는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겨우 선발대의 인원으로 오크로드의 대군과 맞선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다. 오래전 그때처럼 자신들도 학살 당할게 불보듯 뻔했다.
“오늘밤 여기서 야영을 하면 안돼!”
그는 다급히 사만다에게 뛰어갔다.
자신이 아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그녀에게 상세히 설명하자 뜻밖에도 그녀는 난색을 표했다.
“미셸님께 돌아가자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오크때문에 겁먹고 복귀하란 소리야? 우린 선발대야. 앞으로 나아갈지언정 뒤로 물러설수는 없어.”
또한 같이 있던 르건 마저 버나드를 한심하게 바라봤다.
“꼬마야, 그런 미신 따위를 믿으니까 네가 꼬마란거다.”
그가 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