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되찾는 노력, 수련13
술집에서 소란이 일자 가게 주인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치안대가 들이닥쳤다.
무슨 일이냐며 고함을 치던 치안대장은 버나드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는 영부인님을 구해준 꼬마가 아니더냐?”
버나드는 사실 그대로 모든 것을 설명했다. 전후사정을 알게된 치안대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별 것도 아닌 일이었구만.”
이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그대로 부하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어차피 버나드가 같이 소동을 일으킨 사내들을 전부 줘패버리는 바람에 상황은 종료됐고 그들이 더 이상 뭘 할 것도 없었다. 술집에서 일어난 패싸움따위 길가다 넘어진 것처럼 가볍게 치부하는 세상이었다. 아홉명의 사내들은 하나같이 바닥을 뒹굴며 신음을 흘리는 중이었다.
“얼마 안되지만 가게 수리할때 보태쓰십시오.”
버나드는 도만 영주에게 받은 사례금을 꺼내 술집 주인에게 일부 건네주고 데보라와 함께 길을 나섰다.
***
“왜 왼손으로 받는거야?”
샤를이 이상하게 여기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아침에 사과주를 마시며 하루일과를 시작하는 습관이 있었다. 매일 아침 클레어와 함께 나눠마시고는 했는데, 오늘도 평소처럼 사과주가 담긴 잔을 건네자 오른손잡이였던 클레어가 왼손으로 받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여겼다.
클레어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우리 사이에 예의는 안차려도 돼. 왼손으로 받든 오른손으로 받든 신경 안쓰는데 갑자기 왼손을 쓰니까 이상해서 그래.”
“별 생각없이 받다보니…”
“알았어. 내가 예민했나봐. 왼손으로 받든 오른손으로 받든 뭐가 중요해.”
샤를은 말을 마치고 사과주를 쭉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보고 클레어 또한 사과주를 단숨에 마셨다. 달기는 해도 알콜이 들어간 음료라서, 클레어는 사과주를 삼키는 순간 가슴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양은 적지만 취기가 느껴질 정도로 독했다. 평소 샤를은 오전 한때의 알딸딸한 기분을 즐겼고, 클레어도 어느새 그녀를 본받아 사과주 한잔으로 하루일과를 시작하는 맛에 중독되어 버렸다.
클레어가 빈 잔을 내려놓자 샤를은 금세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어머니 미셸을 찾아가 아침 문안 인사를 올리는게 하루의 시작이었다.
샤를이 여러벌의 드레스를 꺼내 침대 위에 늘어놓았다.
“오늘은 이걸 입을까?”
“그것도 괜찮네요.”
“아냐 다른거 입을래.”
클레어는 샤를의 드레스를 봐주는게 즐거웠지만 가슴 한 구석에 자리잡은 근심을 털어내기란 어려웠다.
그녀는 오른손을 다쳤고,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샤를에게 그 사실을 알리기가 쉽지 않았다. 어린 시절, 엄격했던 아버지가 늘 강조했던 말이 떠올랐다.
‘진정한 기사가 되고 싶거든 아파도 참거라. 힘들고 아파도 견뎌야한다. 특히 훈련을 하다 입은 부상만큼 창피한 것도 없다.’
클레어가 오른손 때문에 깊이 고민하는 사이 샤를이 붉은 드레스를 차려입었다.
“나갈까?”
“네.”
샤를을 따라 밖으로 나와 미셸의 막사로 향하는데 우연히 버나드와 마주쳤다.
밤새 야영지 밖에 나가 있던 버나드는 일행과 함께 이제 막 야영지에 도착한 참이었다.
“흥, 꼴보기 싫어.”
샤를은 그를 흘겨보고는 곧장 미셸의 막사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클레어도 별다른 말없이 버나드를 지나치려는데 갑자기 그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 기다려봐.”
***
마침내 아킨테 야영지에 도착하자 마크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도만 영주에게 그려준 그의 연회장 그림은 호평을 받았고 덕분에 보수도 두둑히 받았다.
“나 먼저 가볼게!”
오랜만에 목돈이 생긴 그는 살게 많다며 시장골목으로 잽싸게 뛰어갔다. 그동안 값싼 그림 도구들만 써왔는데 이번 기회에 전부 좋은 것으로 바꿀 생각이라나.
그리고 급한 것은 데보라도 마찬가지였다. 윙블 마을에서부터 이곳까지 오는 동안 소변이 마려운 것을 꾹 참고 있던 그녀는 얼른 다녀올게란 말을 남기고 화장실로 급히 뛰어갔다.
“미셸님에게 보고부터 하는게 순서겠지.”
뒤에 남게된 버나드는 두 명의 종자들과 같이 선물로 받은 말 세 필을 이끌고 미셸에게 향했고, 잠시 후 미셸의 막사 앞에서 샤를과 함께 있던 클레어와 마주쳤다.
“흥, 꼴보기 싫어.”
언제 원수지간이 됐는지 샤를은 싫은 기색을 팍팍내며 막사 안으로 들어가버렸고, 클레어는 자신을 한번 쳐다보고는 그 어떤 말도 없이 돌아서 막사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던 차에 그녀의 오른손이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음?’
클레어의 가운데 중지손가락이 자연스러운 모양을 하고 있지 않고 약간 바깥쪽으로 꺾여있는걸 알 수 있었다. 버나드는 그 증상에 대해서 매우 잘 알았다. 검기를 익히기 위해 노력하다보면 자주 생기는 부상이었다. 손목쪽 마나의 길이 터졌다는걸 직감한 그는 빠르게 걸어가서 클레어의 팔을 잡아세웠다.
“잠깐 기다려봐.”
클레어는 자신의 몸에 함부로 손댄 것이 싫은지 팔을 빼며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말은 안했으나 그녀의 눈빛이 조금은 싸늘했다.
“왜…?”
“너, 이 손.”
버나드가 그녀의 오른손을 가리켰다.
“다쳤지?”
“……!?”
클레어가 흠칫 놀라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떻게 알았어?”
“이대로 놔두면 안돼. 잘못하면 중지손가락이 평생 휘어질거야.”
버나드는 대뜸 그녀의 오른손을 잡고 만지작거렸다. 막무가내로 만진게 아니라 찢어진 마나의 길이 빨리 회복되도록 손목과 손바닥 등 주요 부위를 꾹꾹 눌러주었다. 클레어는 아픔에 신음 했으나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그가 만져주니까 통증이 줄어들고 한결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매일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번씩 여기하고 여길 눌러줘. 그리고 밤에 자기 전에 찬물에 30분씩 손목을 담그도록 해. 그렇게 꼬박꼬박 일주일만 하면 금방 나을거야. 회복하는 동안 절대 칼은 잡지 말고. 그리고 또 주의할 점은……”
버나드는 놀라울 정도로 자신의 증상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회복에 도움이 되는 음식 및 재활운동 등을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 해주었다. 클레어는 내심 감탄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버나드를 멍하니 쳐다봤다.
“……”
“아픈걸 숨기지마. 남들이 알 수 있도록 붕대를 하고 다니는게 좋아. 그래야 안건들테니까.”
정말이지 상냥했다.
엄격했던 아버지와 달리 그는 무척 섬세하고 자상했다.
“샤를님께서 나가십니다!”
막사 안쪽에서 경비병의 목소리가 들렸다.
버나드에게 푹 빠진 눈빛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클레어가 퍼득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돌렸다. 벌써 문안 인사가 끝났는지 샤를이 밖으로 나오는 중이었다. 클레어는 자신의 손을 정성스레 마사지 해주던 버나드에게서 재빨리 손을 빼며 뒤로 두 발자국 물러섰다.
“클레어, 들어오지 않고 이 사람이랑 뭐하고 있었던거야?”
샤를이 곱지 않은 눈으로 버나드를 쏘아봤다.
“내 호위기사는 절대로 될 수 없을테니까 꿈 깨셔. 가자, 클레어.”
그녀는 클레어의 오른손을 잡고 버나드를 지나쳤다. 통증을 느낀 클레어가 움찔했지만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고 손을 붙잡힌 채 그대로 따라갔다. 그러면서 아쉽다는듯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곤 했다.
“선생님이 다쳤으니 당분간 검술훈련은 글렀나……”
버나드는 혀를 끌어차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곧장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에는 미셸과 총장 사만다가 함께 있었다.
“버나드입니다.”
“어, 왔구나.”
책상에 앉아있는 미셸이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입구에서부터 그녀에게 걸어가는 동안, 책상 옆에 우두커니 서있던 총장 사만다는 꼼꼼이 관찰하는 시선으로 버나드를 바라봤고, 버나드는 그 시선을 모른척하며 당당히 책상 앞에 섰다.
“도만 영주에게서 말 세 마리를 받아왔습니다. 세 마리 모두 병든 것 하나없이 건강하고 튼튼합니다.”
“수고했다. 그리고 마렐 부인에 대한 얘기도 들었어. 그녀의 목숨을 구해 우리 아킨테 가문의 위상을 드높여주다니 네가 정말 자랑스럽구나.”
“그저 운이 좋았을뿐입니다. 마렐 부인이 살 수 있을지 없을지 저도 예측 불가능했습니다.”
“이야, 참으로 겸손한 친구일세.”
사만다가 끼어들며 비꼬듯 웃었다. 그녀는 옆에 내려놓았던 짐을 양손으로 번쩍 들더니 돌연 버나드에게 던졌다.
버나드는 얼결에 양손으로 짐을 받아들며 그녀를 쳐다봤다. 대체 뭐가 담긴건지 짐이 상당히 무거웠다.
“내 말에 실어놔.”
“예?”
마치 하인대하듯 뭐하는거지?
버나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미셸을 돌아보았다. 미셸이 웃으며 말했다.
“버나드, 사만다의 요청으로 너를 선발대에 넣었단다. 사만다를 따라 우리의 다음 목적지인 바들레인에 먼저 가있도록 해.”
“미셸님께서 하도 입이 닳도록 칭찬을 해서 말이야. 얼마나 영특한 녀석인지 궁금해서 내가 잠깐 일 좀 시켜보려고. 계속 데리고 있을거 아니니 오해마.”
사만다가 씨익 웃어보였다.
미셸은 이미 결정한듯 싶었다.
“장차 네가 선발대장을 맡을지 모르니 이번 기회에 선발대 일을 착실히 배워두렴. 사만다가 잘 알려줄거야.”
그녀가 버나드를 보내기로 결정한 이상 버나드는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좋든 싫든 사만다를 따라나서야만 했다.
그런데 워낙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그는 데보라와 마크에게 사정을 설명할 시간도 없었다. 사만다는 이미 짐을 꾸려놓고 버나드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고, 때마침 버나드가 나타나자 그를 납치하듯이 데리고 야영지를 훌쩍 떠났다.
뒤늦게 니콜라스로부터 소식을 전달받은 데보라는 근심에 휩싸였다.
“혼자서 위험할텐데 누나도 데리고 가지…”
마크는 새로 산 그림 도구에 정신이 팔려서 버나드한테 신경도 안썼다.
“바들레인에 먼저 가있는다잖아. 어차피 만나게 될걸 뭔 걱정을 그리 하냐.”
“넌 어차피 죽을거 뭐하러 밥을 처먹냐 이놈아.”
옆에서 파이프 담배를 태우고 있던 멜라니아가 그렇게 타박하며 낄낄 웃었다. 그리고 먼 곳을 바라보며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맘때쯤이면 썬로드에 로드(lord)가 지나갈텐데…… 지금의 늑대 힘으로 괜찮으려나…… 흐음, 재수없으면 마주칠지도 모르겠구만.”
***
선발대의 인원은 버나드 외에 사만다와 10명의 정예 기사들, 그리고 그들의 짐과 시중을 들어줄 종자 2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숫자로만 보면 총 32명이다.
기사들은 고위기사들로만 편성되어 있어 그들이 걸친 갑옷값만 해도 정원이 딸린 대저택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매우 비싸고 방어력도 무척 뛰어났다. 아울러 개개인의 실력도 출중해 웬만한 괴물이나 적들은 감히 습격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겠다 싶을 정도로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웠다.
“선발대는 말이야.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에도 긴장을 늦춰선 안돼. 목적지까지의 거리, 도로의 특성, 지름길, 사잇길, 산과 강 등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빠르게 파악해서 본대에 알려줘야 하지. 보고는 여기 있는 비둘기를 보내면 되고.”
사만다가 자신이 타고 있는 말의 안장에 걸려 있는 새장에 갇힌 비둘기를 가리켰다. 세 마리의 비둘기가 안에서 푸드득 거리고 있었다.
“그렇군요.”
버나드는 나란히 말을 타고 가면서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실 사만다의 강의가 지루했다. 전부 다 아는 내용들이었다. 게다가 사만다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인줄 알고 너무 세세히 가르치려 들어 그만하라고 할 수도 없고 조금은 답답했다.
“바들레인에 도착해서 우리가 첫번째로 할 일은 야영지 자리를 물색하는거야. 좋은 야영지를 물색할때 주의해야할 점이 뭔줄 알니? 틀려도 좋으니 생각나는대로 말해봐.”
사만다의 질문에 버나드는 생각나는대로 술술 대답했다.
“여름에는 물이 범람하지 않는 곳을 찾아 물 근처에 자리잡도록 하고 겨울에는 건초나 목재를 수월하게 구할 수 있는 곳을 야영지로 삼아야합니다. 그리고 야영지의 진입로는 너무 가파르거나 좁아서는 안되며 정문의 위치는 동쪽 아니면 만일의 기습공격을 대비하여 행군로 쪽을 바라보게끔 설치해야합니다. 최우선적으로 유의해야할 점은 대충 이 정도라고 봅니다.”
“오.”
“저 녀석 봐라. 대단한데.”
“잘 아네.”
사만다와 버나드의 대화를 그냥 흥미삼아 들어가며 말을 몰던 기사들이 저마다 감탄을 터뜨렸다.
사만다 역시 놀랐는지, 어쭈 제법이네 하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순순히 인정할 수는 없었다. 버나드는 전쟁광처럼 보이는데다 미셸의 애정을 듬뿍 받는게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놀란 기색을 감추려는듯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퉁명스레 말했다.
“그 나이 되면 야영지를 물색하는 법쯤이야 기본으로 아는게 당연하겠지? 다음 질문이 진짜야. 조금 어려울테니 각오해.”
버나드는 지루한 설명을 듣는 것보다 오히려 그녀가 물어봐주는 것이 편했다.
“네, 뭐든지.”
“뭐든지라? 하하, 꼬마 주제에 잘난척하는거야? 알았어, 그럼. 자, 질문. 야영지에 구축하는 참호의 깊이는 어느 정도가 좋을까?”
버나드가 즉각 대답했다.
“1.5미터 폭에 약 1미터 깊이가 이상적입니다. 하지만 하룻밤 임시로 머물 야영지가 아닌 오래 머물며 요새화 할것이라면 폭을 5미터로 늘리는 것이 정석입니다.”
듣고 있던 기사들이 또다시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리고 버나드를 어린애 보듯하며 무시하던 사만다가 황당하다는듯이 눈을 휘둥그레 뜬다.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물론 성인이 대답했다면 별것 아닌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창 배워야할 나이대인 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소년의 입에서 묻는것마다 물흐르듯 나오니 명석해보이기 그지 없다.
버나드가 차분히 웃으며 대답했다.
“배웠으니까 알죠.”
배우기도 하고, 직접 명령을 내리며 시켜보기도 하고, 다 해봤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