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되찾는 노력, 수련12
모두가 잠든 밤.
클레어는 훈련용 허수아비 앞에 홀로 목검을 쥐고 서 있었다.
“……”
그녀는 훈련용 허수아비의 목을 지그시 주시하며 며칠전 훈련용 허수아비를 검기로 두동강 내던 버나드를 떠올렸다. 동시에 어렸을때부터 검술 천재 소리를 듣고 살았던 자신의 삶을 회상했다. 아버지는 클레어를 일찍부터 검술의 대가로 키우는 게 소원이었다. 그러한 아버지의 욕망 때문에 클레어는 2살때부터 검을 잡았다. 그때부터 가혹하게 매질까지 당하면서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는 전도유망한 어린 천재 검사 소리를 듣는데 성공했고, 그간의 노력을 보상받듯 운좋게 공국에 비견되는 힘을 가진 아킨테 가문의 기사가 되기까지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성장하는 과정에 있었다. 제대로 여물지 않은 십대 후반이라는 그녀의 나이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본인 또한 그것을 알고 밝은 미래를 위해 열심히 준비하며 착실히 잘 걸어가고 있다 생각했는데… 또래 중에 가장 앞서고 있다고 생각하며 안심하고 있던 차에 어느날 불현듯 자신을 능가하는 녀석이 나타났다.
자신은 아직 해내지 못한 검기를 사용하는 버나드의 모습을 보고 그녀는 뒤쳐지고 있다는 조바심이 들었다.
“나도 빨리 검기를…”
클레어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체내의 마나를 끌어모아 목검을 쥐고 있는 두 손으로 밀어넣었다. 미약하나마 그녀도 검기를 발현시킬 수는 있었다. 하지만 검기가 칼자루에서만 머물뿐 칼날을 완전히 뒤덮지는 못했다. 평소 거기까지가 그녀의 한계였다. 하지만 오늘은 반드시 칼날을 마나로 뒤덮겠다고, 그런 욕심 때문에 무리를 했다.
그 결과…
그녀는 목검을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큭!”
목검을 떨어뜨리며 왼손으로 다급히 오른손목을 감쌌다.
오른손목에서 격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유인 즉슨, 목검에 강제로 마나를 주입하다 손목을 지나가는 마나의 길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마나가 이동하는 길은 좁은데 무리해서 쑤셔넣다가 혈관이 터지듯 터져버린 것이다.
“바보 같이…!”
오른손을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저리고 찌릿한 통증이 계속됐지만 클레어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체내의 마나로 인한 부상은 사제의 신성력으로 치유가 불가능 한 것이었다. 찢어진 마나의 길이 자가치유 될때까지 당분간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런 가운데, 그녀는 손목이 아픈 것보다 목검에 검기를 주입하다 실패한 것이 더욱 고통스러웠다.
“왜! 어째서!”
***
동이 틀 무렵, 빈 술병과 먹다 남은 음식들이 어지러이 널브러진 연회장 한복판에 앉아 있던 마크가 마침내 붓을 내려놓았다.
그는 지친 한숨을 내쉬며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했다.
“하얗게 불태웠… 아니, 내가 가진 열정을 전부 쏟아부었어……”
피곤한 그의 시선이 완성된 그림으로 향했다.
그림에는 영주의 가족들과 버나드, 데보라가 음식이 풍성하게 차려진 식탁에 둘러앉아 연회를 즐기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건 내가 봐도 역작이다.”
마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
“환대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버나드는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데보라와 함께 영주의 관저를 나섰다.
미셸의 선물인 말 세 마리를 얻어 함께 온 종자 두 명과 함께 말 위에 올라탔다. 밤을 새는 바람에 곯아 떨어진 마크는 종자 한 명의 뒤에, 데보라는 버나드의 뒤에 탔다. 도만 영주와 마렐 부인, 아들과 딸, 가신들이 모두 나와 배웅해줬다. 도만 영주는 버나드가 언제든지 찾아와 편히 쉴 수 있도록 관저 근처에 집을 한 채 지어놓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버나드는 언제 다시 윙블 영지를 방문할지도 모르고 큰 선물이라 생각하며 정중히 거절하려 했으나 도만 영주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버나드, 너는 우리 윙블 가문의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늘 네 자리를 마련해놓고 있으마. 언제든지 찾아오렴.”
작별 인사를 나눈뒤 영주의 가족들을 뒤로하고, 관저를 빠져나와 마을을 통과할즈음 데보라가 물었다.
“어제 왜 구해준거야? 가만히 있었으면 괜히 욕먹지 않아도 됐잖아. 만약 마렐 부인이 죽었으면 전부 네 탓으로 몰아갔을거야. 살았으니 잘 해줬지.”
“데보라 답지 않은 질문이네.”
버나드가 고삐를 쥔 채 미소지었다.
“알지도 못하는 소년과 할머니를 구해주던 데보라의 착한 마음씨는 어디로간거야.”
“누나가 좋아하는 버나드를 건드니까 그 사람들한테 화난 것 뿐이란다?”
그 말에 버나드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요즘 데보라를 보면 조금 변한것 같아.”
“누나가?”
“응, 뭔가 변한 느낌.”
“어떤 점이?”
“애매해서 잘라 말하기는 어려워. 좀 더 지켜보고 말해줄게.”
“흐음… 어디가 변했다는 걸까…?”
데보라가 잠깐 고민해보더니 앞자리에 앉아있는 버나드의 어깨에 턱을 기대며 말했다.
“만약 누나가 정말로 변했다면 그건 순전히 버나드 때문이란다?”
“왜?”
“널 지키기 위해서니까.”
데보라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뒤에서 끌어 안고 있던 버나드의 허리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자신의 등을 푹신하게 눌러오자 버나드는 안락함과 포근함을 느끼며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곧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을 레아를 떠올렸다.
‘레아, 난 어제 너와 같이 배운 기술로 사람을 살렸어. 궁에 있었을때라면 하지 않았겠지만, 했다는건 내가 달라지고 있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겠지?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들었어. 프레드릭왕의 밑에 있을때는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지. 임무를 마치면 난 늘 어둠속으로 사라져야 했으니까. 내가 이뤄낸 행위의 결실을 누리는건 항상 프레드릭왕이었어. 하지만 어제는 달랐지. 내가 이뤄낸 결실을 온전히 내가 누릴 수 있어서 많이 뿌듯했어. 레아, 네가 내게 보여주고 싶었던 삶은 바로 이런 삶이었던 것일까……?’
말을 몰며 혼자 사색에 잠겨있는데 데보라가 갑자기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저것봐, 버나드. 창녀들인가봐. 옷이 야해.”
버나드는 데보라가 신기하다는듯이 가리킨 곳을 쳐다봤다.
‘죽이는 동굴’이라고 써진 술집 간판과 함께 그 아래 서 있는 창녀 둘이 보였다. 헐벗은 옷차림으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오른 버나드는 즉시 고삐를 당기며 말을 세웠다. 뒤에서 말을 타고 따라오던 종자 두 명도 얼결에 말을 세우며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왜 그래?”
“너희 둘은 여기서 기다려.”
“어디가려고?”
“잠깐 술집에 좀 다녀올게.”
버나드는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데보라의 손을 풀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데보라에게도 말했다.
“여기 있어, 금방 갔다올게.”
“술집에는 왜?”
“알아볼게 있어.”
“어떤걸? 자, 잠깐만 버나드!”
버나드가 그대로 등을 돌려서 떠나자 데보라도 다급히 말에서 뛰어내렸다.
“누나도 갈거란다!”
술집 안으로 들어서자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가게의 반 정도 손님이 들어차 있었다. 무대 위에서는 발가 벗은 여자들이 가랑이를 벌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그 주변에 모여 앉은 남자들은 눈을 크게 뜨고 그녀들의 속살을 눈여겨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버나드는 데보라를 데리고 다니면서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그가 술집에 들린 것은 다름이 아니라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현재 왕실의 움직임 및 걷는 사자 전쟁이 어느 정도 진행됐는지 소문을 듣고 싶었다. 그래야 미리 대처할 수 있으니까. 새로운 정보를 갈구하는 그의 욕심은 밤의 늑대들에서 비롯된 습관이었다.
“음… 아는 인물이 있으려나…”
혹시나 낯익은 자가 없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왕국 각지에서 활동하는 웬만한 정보원들의 얼굴은 다 꿰고 있었다. 윙블 마을은 소영지에 불과하지만 왕도와 가까워 정보원들의 은신처로도 많이 이용되었다. 그리고 정보료는 걱정 없었다. 도만 영주가 적당히 챙겨준 돈이 있으니까.
그때, 술집에 있던 사람들 중에 한 무리가 버나드와 데보라를 주시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데보라를 무척 탐스럽게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키는 중이었다.
“저년 처음보는 얼굴인데 몸매 죽이네.”
“꼬마와 쭉쭉빵빵한 미녀가 같이 술집에 오다니 별일이군. 희한한 조합이야.”
“저것들 떡 쳤을까? 설마 사귀는 사이는 아니겠지?”
“남매 아닐까?”
“내가 확인해보지.”
남자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데보라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면서 혁대를 풀고 바지를 살짝 내리며 자신의 물건을 꺼내 빠르게 손으로 문질렀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데보라의 엉덩이를 감상하며 문지른 그의 페니스는 금세 부풀어올랐다. 그리고 데보라의 뒤로 막 다가섰을때였다.
“어이, 예쁜이 아가씨.”
“네?”
데보라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는 돌연 그녀의 머리채를 잡더니 그대로 짓누르며 자신의 페니스쪽으로 확 잡아당겼다.
“꺄악!”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숙이며 힘없이 딸려온 데보라의 입술이 자칫하면 그의 귀두에 맞닿을뻔한 상황이었다.
버나드가 재빨리 눈치채고 순발력있게 대응했다.
즉각 왼팔을 뻗어 데보라의 가슴팍을 밀었다. 그로 인해 데보라의 얼굴이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남자는 계속 힘을 주며 데보라의 머리를 자신의 페니스쪽으로 잡아당겼고, 반대로 버나드는 데보라의 얼굴이 남자의 페니스에 닿지 않도록 가슴팍을 계속 밀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남자가 히죽 웃었다.
“어른들 노는데서 뭐하는 거냐 꼬맹아.”
“좋은말할때 머리를 놔.”
“싫다면 니가 어쩔건데? 네 누나도 나랑 즐기고 싶어한다고?”
술집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세 사람에게 꽂혔다.
“오호,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겼군! 하하하!”
사람들은 말릴 생각은 안하고 재밌다며 배꼽을 잡고 웃어대기만 했다.
남자가 같잖다는듯이 버나드를 내려다봤다.
“너, 칼 맞아보고 싶어?”
버나드가 빙긋이 웃어보이며 대꾸했다.
“해봐, 할 수 있으면.”
“농담 아니란다?”
“나도 농담 아니다. 만약 데보라의 얼굴에 조금이라도 상처가 생긴다면 그 즉시 널 죽일거야.”
‘버나드!’
데보라는 그 말에 감동하며 속으로 기뻐했다.
“이봐, 꼬마한테 쫀거냐? 죽이겠다는데 가만 있을거야?”
“한심한 새끼! 하하하!”
술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싸움을 부추겼다. 그에 자극 받은 남자는 버나드를 향해 콧방귀를 뀌며 어이없이 쳐다보더니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데보라의 머리채를 순순히 풀어주었다.
“자, 풀었다. 좋아?”
그러고는 잠시 다른곳을 쳐다보며 딴청을 부리는듯 하더니 기습적으로 손을 쭉 뻗어 버나드의 멱살을 붙잡으려는 순간이었다. 버나드가 기다렸다는듯이 주먹으로 그의 팔을 가격한다음 발을 들어 발기해있던 남자의 페니스를 짓밟듯이 밀어차버렸다.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그러자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그의 패거리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데보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술집이 그들의 아지트였던건지 무려 여덟명이었다.
“버나드! 도망가자!”
“괜찮아. 데보라는 내 뒤에 있어.”
버나드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마전에 손에 넣은 체술을 다듬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깍지를 끼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몸을 풀더니, 사내들이 한꺼번에 덤벼오자 그때부터 무차별적으로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오는 비명소리와 함께 술집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잡어!”
아홉명의 사내들은 한대라도 치기 위해 버나드를 향해 열심히 달려들었으나 버나드는 전략적으로 대응하며 영리하게 싸웠다. 음식이 올려져 있던 테이블을 뒤집어 엎고 방패로 쓰거나, 의자를 들어 사내들을 찍기도 하고, 쫓길땐 다급히 계단을 올라가는척하다가 이내 뒤돌아 뛰어내리며 양발로 사내 두 명의 머리를 동시에 가격하기도 했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문득 데보라의 눈에 띈 것이 하나 있었다.
사내들중 한 명이 떨어뜨린 무기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는데 둥근 철퇴머리가 사슬로 연결된 플레일이었다.
그녀는 플레일을 집어들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 취향에 맞는 예쁜 무기네. 이거면 버나드를 지킬 수 있겠어.”
이로써 그녀의 주무기가 생겼다.
그녀는 바로 시험해볼겸 주위를 두리번 거리더니, 버나드에게 맞아 근처에서 뒹굴고 있던 한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 자신의 머리채를 붙잡았던 놈이다.
데보라는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리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사내의 사타구니를 향해 플레일을 휘둘렀다.
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