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되찾는 노력, 수련10
현관 앞이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도, 돌아가신거야?”
“그럴리가 없어! 그럴리가 없다고! 아이고오 마님!”
“어머니!”
아들과 딸이 마렐 부인을 끌어안고 통곡을 하는 가운데 도만 영주가 급하게 하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어서 신전에 가서 사제를 불러오거라!”
“예!”
이어 제 어미의 목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아들과 딸을 다그치면서 빨리 침실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그때 버나드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멈추십시오! 지금은 영부인을 옮길때가 아닙니다! 서둘러 응급처치를 해야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더냐!”
정신없는 상황에 웬 애가 껴들어 엉뚱한 소리를 지껄인다고 생각했는지 도만 영주가 화를 내듯이 소리쳤다.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저리 가있거라!”
버나드는 침착한 표정으로 목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심장이 멈췄다면 시간을 지체 해서는 안됩니다. 침실로 옮기는 동안 부인을 살릴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놓쳐 영영 돌아가실 수가 있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응급처치를 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리하면 다시 숨을 쉬실지도 모릅니다.”
“응급처치라는게 무엇인데?”
“지금처럼 갑자기 쓰러진 사람들을 구하는데 쓰이는 긴급 치료입니다.”
“너는 정체가 뭐냐? 네 직업이 신성력을 가진 사제더냐? 너처럼 어린 녀석이?”
“전……”
버나드는 대답을 망설이다 급하게 소리쳤다.
“말로 시간을 낭비할때가 아닙니다! 영부인을 살리고 싶으시면 제게 맡겨주십시오! 일각이 급한 상황이란 말입니다!”
“아버지!”
마렐 부인을 끌어안고 있던 영주의 딸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도만 영주를 바라봤다.
“일단 이 아이를 믿어봐요! 어머니가 숨을 안쉬잖아요! 돌아가시면 어떡해요! 그러니까 뭐라도 해보자고요!”
딸의 간곡한 요청에 도만 영주의 눈빛이 흔들리는듯 했다. 버나드를 신뢰하지 못하지만 고민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그런 와중에 버나드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제 경험상으로 비춰볼때 응급처치로 영부인을 살릴 수 있는 확률은 반반입니다. 저도 장담은 못합니다. 하지만 사제가 올때까지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실수라도 하는 게 낫습니다. 아시다시피 영부인의 심장은 이미 멈췄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나중에 사제가 도착한다한들 그가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
버나드를 찌를듯이 바라보던 도만 영주의 눈빛이 변했다. 버나드의 눈동자는 그 나이대 소년이 결코 담을 수 없는 특별한 것이 있었다. 마렐 부인을 꼭 살리고 싶어하는 진정성과 이유를 알 수 없는 관록이 느껴졌다. 따라서 지금 그의 행동은 어린애의 장난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알겠다, 네 뜻대로 해보거라.”
“감사합니다.”
버나드는 바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밖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 거슬릴 정도로 많았다.
“한명도 빠짐없이 모두 건물안으로 들어가라 이르십시오. 서둘러야합니다.”
“나도 말이냐?”
“영주님은 계셔주십시오.”
“나도! 나도 여기 있겠습니다!”
“저도요!”
아들과 딸도 남아있겠다고 하여 도만 영주는 자식들을 제외하고 모두 저택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하여 한적해진 현관 앞에는 버나드와 데보라, 영주 가족들만 남게 되었다.
“응급처치를 시작하겠습니다.”
버나드는 바닥에 반듯이 드러누운 마렐 부인을 내려다보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빼들었다. 그러자 도만 영주가 즉시 미간을 좁혔다.
“칼로 뭐하려고 하느냐?”
“옷을 찢을겁니다.”
“뭐?”
버나드는 냉큼 허리를 숙이더니, 다짜고짜 마렐 부인의 상의를 칼로 부욱부욱 찢기 시작했다. 옷이 찢기면서 밑에 입고 있던 그녀의 코르셋이 드러났고, 곧이어 코르셋까지 찢기며 유두가 여과없이 노출되자 보다 못한 아들이 펄쩍 날뛰었다.
“야 이 새끼야!”
아들이 난데없이 버나드의 멱살을 쥐고 벽으로 밀어부쳤다.
“너 진짜 고칠 수 있는거 맞아?”
의사에 대한 세상의 인식은, 병을 고치는것은 사제고 그들보다 능력이 낮고 미덥지 못한 의사들은 환자의 몸에 깃든 악마를 물리치는 퇴마사라는 느낌이 강했다. 정신병에 걸리면 악마에게 지배당했다며 불에 태워죽이고, 질병에 걸리면 그 역시 악마 때문이라며 악마를 쫓아내는 괴악한 약을 지어먹이거나, 아픈 부위에는 악마를 괴롭히는 것이라며 무차별 고문을 가했다. 그렇다보니 귀족들 역시 의사에 대한 인식이 좋지 못했다.
그에 반해 질병에 대한 지식은 약초를 잘 다루는 산파나 마녀들이 훨씬 뛰어났다. 그들은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온 민간의 지혜가 담긴 약초들에 관해 잘 알았다.
아무튼, 현재 영주의 아들이 분노한 이유는 어머니의 옷을 찢는 버나드의 행동이 마치 악마를 퇴치하겠답시고 터무니 없는 짓을 일삼는 의사들의 행위 같아서 순간 불신이 솟구쳤다.
“네 더러운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하는 짓 아니야? 내가 듣기로는 중년 귀부인들한테 성적 판타지를 느끼는 쓰레기 의사놈들이 세상에 많다고 들었어! 그게 바로 네놈 아니냐고!?”
멱살을 붙잡힌 버나드는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대꾸했다.
“당신이 이러는 동안 마렐 부인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머니를 살리고 싶다면 당장 비키십시오.”
“사람을 살리겠다며 옷을 찢은 이유가 뭐야! 뭔짓을 하려고!”
근처에서 인상을 찡그린 채 지켜보고 있던 데보라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저 사람이 버나드를 괴롭히고 있어!’
그녀는 즉각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은 온통 꽃과 잡초뿐, 들고 때릴만한게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한달음에 달려가 아들을 세게 밀쳤다.
“버나드를 내버려둬!”
“으악!”
아들은 옆으로 넘어지면서 그대로 화단 위에 쓰러졌다.
데보라는 다급히 버나드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니? 괜찮은거야?”
“응, 난 괜찮아.”
버나드는 옷매무새를 고치고 다시 마렐 부인이 쓰러진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 도만 영주와 눈을 마주쳤다. 도만 영주 역시 아내의 옷을 훼손시킨 것에 대해 분노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자신이 허락했기에 끝까지 믿고 참아보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그 옆에 서 있는 딸 또한 버나드를 못 미덥게 여기는듯 했으나 별다른 말은 없었다. 단지 일이 잘못되면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듯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을뿐.
그런 두 사람에게 차분히 설명했다.
“옷을 찢은 이유는 마렐 부인께서 흉부를 압박하는 코르셋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장이 다시 움직이고 숨을 쉬려면 가슴을 옥죄는 것들을 제거해서 일단 편안하게 만들어줘야합니다.”
“알겠네, 서둘러 주게.”
도만 영주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여러말들을 꾹 눌러 삼키며 그렇게만 말했다.
버나드는 쪼그리고 앉아서 다시 칼을 쥐었다. 그리고 마렐 부인의 속옷을 하나씩 제거해나갔다. 아들이 곁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댔지만, 가만히 있으라는 도만 영주의 호통에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윽고 마렐 부인의 젖가슴이 완전히 노출되자 버나드는 도만 영주를 돌아보았다.
“심장을 다시 뛰게하려면 가슴을 수차례 압박해야합니다. 지금부터 부인의 몸에 손을 댈테니 놀라지 마십시오.”
“……”
도만 영주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겠습니다.”
버나드는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허리를 곧게 세우고 두 손으로 흉부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겹친 손바닥을 내리누를때마다 눈을 감고 있는 마렐 부인의 몸이 들썩이며 살들이 출렁거렸다. 게다가 두둑 하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도 났다. 그 소리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몸안에서 연달아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자 영주의 딸은 큰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아선 울음을 터뜨렸다. 아들도 기겁을 했다.
“아, 아버지! 저 녀석이 어머니를 죽이고 있어요! 말려요! 빨리 말리라고요!”
그럼에도 버나드는 온힘을 다해 펌프질을 계속했다. 이내 숨이 차고 힘들었으나 오직 펌프질만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열심히 마렐 부인의 가슴을 짓눌렀다.
“헉! 헉! 헉!”
그러기를 5분쯤 계속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화답이 없었다. 마렐 부인은 여전히 죽은 사람처럼 누워선 버나드가 짓누를때마다 인형처럼 몸을 들썩거리기만 했다. 아무런 긍정적인 신호가 없자 도만 영주와 아들의 입에서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어찌된 일이냐. 왜 눈을 안떠?”
“아까의 그 당당함은 어디갔어! 뭐라고 말 좀 해봐!”
데보라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버나드를 지켜보고 있었다.
“버나드… 누나는 믿어…”
버나드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마렐 부인이 살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것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자신감이었다. 심장에 압박을 가하는 방법으로 오래전 자신의 부하들을 살린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압사를 당해 숨을 안쉬는 부하를 살려보기도 하고, 물에 빠진 부하를 살려보기도 했다. 간단한 응급처치지만 성공률은 매우 높았다.
“멈추게 하세요 아버지! 이건 치료가 아닙니다! 몸안의 뼈가 다 부러졌는데 뭐가 치료입니까!”
그때였다.
“콜록, 콜록!”
연신 기침을 해대며 마렐 부인이 마침내 깨어났다. 정말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듯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마른 입술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다들 여기서 뭐하는 거니……?”
“어머니!”
“오오, 마렐!”
“살아주셔서 감사해요!”
버나드를 비난하던 아들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도만 영주는 입을 쩍벌리며 그의 눈빛에 큰 기쁨이 서렸다. 딸은 두 말할 것도 없었다. 마렐 부인의 손을 두 손으로 꼭 감싸쥐며 반가운 눈물을 터뜨렸다.
“버나드! 누나는 네가 해낼줄 알았단다!”
데보라는 감격에 겨워하며 버나드의 뺨에 가볍게 뽀뽀를 해주었다.
“잘했어.”
“고마워.”
버나드는 지친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돌아가시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다.”
이후, 신전에서 보낸 여사제가 제때 도착하며 부러졌던 마렐 부인의 갈비뼈들을 신성력으로 말끔히 고쳐주었다. 여사제는 이어 버나드를 칭찬하며 모두에게 말했다.
“저희가 가진 신성한 힘으로는 사람의 심장이 멈춘걸 치료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만약 이 아이가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영부인의 생명이 매우 위태로웠을겁니다. 정말 대단한 아이입니다.”
그녀의 말로 인해 버나드는 더더욱 도만 영주와 그 가족들에게 고마운 은인이 되었다. 그리고 아까 버나드에게 화를 내던 영주의 아들도 머리를 긁적이며 진심 어린 사과를 전했다.
“미, 미안하다. 내가 너무 경솔했어. 생선 대가리라고 놀려도 좋아. 부디 내 사과를 받아줘.”
버나드가 밝게 웃으며 응답했다.
“저 같았어도 같은 행동을 했을겁니다. 워낙 긴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설명이 부족했던 탓이죠.”
아들에 이어 도만 영주도 가만 있지를 못했다. 그는 계속 버나드를 추켜세우며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버나드! 우리 윙블 가문은 네게 큰 빚을 졌다! 그러니 바로 빚을 갚는게 순서겠지? 오늘 여기서 묵고 가거라! 성대한 연회를 열어서 네게 답례를 하고 싶구나!”
갓 스무살이 넘어보이는 딸까지 감탄한 눈빛으로 내내 버나드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제발 하룻밤만이라도 묵고 가주세요 버나드님. 정성을 다해 대접해드리고 싶습니다.”
마렐 부인은 한술 더 떴다.
“여보, 우리 윙블 영지에 버나드가 살 집을 마련해주는건 어때요? 가끔씩 놀러와 편히 쉬다 갈 수 있게 해주는거예요.”
“오호, 그것도 좋겠구려!”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데보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버나드를 둘러싸고 있는 윙블 가문 사람들의 모습이 그녀가 보기에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흐음… 버나드 옆에는 내가 있어야 하는데 왜 저 사람들이 있는거지? 버나드도 분명 싫어할거야.”
한편, 윙블 가에서는 바로 아킨테의 야영지로 사람을 보내 버나드에 대한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전령으로부터 모든 이야기를 전해들은 총장 사만다는 곧장 미셸의 막사를 찾았다.
“도만 영주로부터 버나드를 하룻밤 데리고 있고 싶다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책상에 앉아 문서를 검토하고 있던 미셸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왜?”
“버나드가 기지를 발휘해 위급했던 마렐 부인의 생명을 구했다고 하네요. 그 답례로 오늘밤 각별히 대접해서 내일 아침까지 보내겠다고 알려왔습니다.”
“버나드가 마렐 부인의 생명을 구해?”
“그렇다는군요.”
미셸의 입가에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그려졌다.
“별처럼 빛나는 아이는 어딜 가나 빛이 나는가 보구나.”
사만다가 피식 웃었다.
“저의 군주이신 위대한 미셀님, 잠시 저의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버나드는 전쟁을 하자며 헛소리나 해대는 아이입니다. 너무 빠지신 것 같아요.”
“버나드의 의견은 나도 동의하지 않지만 버나드가 보통 사람들과 다른건 맞아. 사만다? 너도 그 아이와 가깝게 지내다보면 특출난 재능이 있다는걸 금세 발견하게될 것이란다.”
“글쎄요. 쇠막대기처럼 굵고 단단한 성기를 갖고 있다면 달리 보도록 하죠. 전 애한테 관심없어요.”
사만다는 무심하게 대답하고는 책상으로 가서 양피지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도만 영주의 요청을 허락하실거면 인장을 찍어주시길 바랍니다.”
잠시 후 사만다가 나가자 미셸은 의자에 편히 등을 기댄채 한동안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영특한 아이인 버나드가 손에 들어와서 기뻤다.
그리고 벌써부터 대성할 조짐이 보이는 그를 영원히 붙잡아 두기 위해, 작위를 내린뒤 샤를과 약혼시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왕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아킨테 가문의 명맥을 유지하려면 정략결혼보다는 가문 내부에서 키운 자와 결혼시키는게 낫겠지… 그런 관점에서 보면 고아로 자란 버나드가 괜찮기도 한데, 그의 주변엔 가족과 일가친척이 아무도 없으니 샤를이 가문을 지키기도 쉬울거야.”
하지만 그녀는 이내 생각을 바꿨다.
“아니야, 난 아직 버나드를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