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2화 〉되찾는 노력, 수련9 (42/200)



〈 42화 〉되찾는 노력, 수련9

다음날. 데보라는 아무일도 없던것처럼 버나드를 대해주었다. 그녀보다 신분 높은 귀족이 아닌 평민을 대하듯 평소하던대로 부담없이 다가왔다. 버나드도 그것이 편했다. 그런데…… 묘하게 달라진 것은 하나 있었다.
아침에 배가 아파 버나드가 잠깐 화장실에 들렸을때 그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볼일을 보는 자세에서 무심코 머리 위를 올려다봤는데, 아니 글쎄! 데보라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버나드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거긴 어떻게 올라간거야? 아니  거기 있어!?”

데보라는 미안해하거나 당황하지도 않고 오히려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버나드, 누나가 주변을 둘러봤는데 암살자들은 없는  같아. 편히 똥싸도 돼.”
“……”

데보라가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던 두 번째 사건은 아침 식사를 마쳤을때였다. 그녀가 갑자기 자신의 전재산을 갖고 무기점에 가려고 했다. 난데없이 두툼한 돈 주머니를 들고 나가는 여동생을 보며 마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야! 그  갖고 어디가?”

데보라가 야심차게 대답했다.

“무기를 사야겠어요.”
“왜? 버나드 주려고?”
“아뇨, 제가 쓰려고요. 버나드를 지키려면 저도 무기가 필요할 것 같아요. 평범한 것 말고 비싼거로요. 이젠 짱돌 안쓸거예요.”
“얘 또 미친짓 하네. 버나드! 얘  말려봐!”

만약 버나드와 마크가 그녀를 말리지 않았으면 그녀는 하루아침에 전재산을 다 날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침에 벌어진 일들중 세번째 사건은, 버나드가 텐트에 들어가서 훈련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려고 할때였다. 방금전까지 열려있던 입구가 돌연 닫히더니 밖에서 데보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버나드, 밖에 돌아다니면 위험하니까 텐트에만 숨어있어야 한다? 누나가 먹을거라든지 필요한거 있으면 즉각즉각 갖다줄테니까 걱정마렴. 전부 누나한테 맡겨.”

그러면서 천으로된 텐트 입구를 밧줄로 꽁꽁 묶어서 매듭을 지으려고 했다. 당황한 버나드가 재빨리 막지 않았더라면 아마 텐트를 찢고 나왔어야 했을 것이다.

“데보라가 왜 저러지…”

버나드는 짧게 고민해본 결과 아무래도 어제 이야기 때문에 데보라가 걱정이 많아진 것 같았다.
안되겠다 싶어서 그녀를 안심시킬 생각에 미소를 지으며 달랬다.

“데보라,  걱정하지마. 난 괜찮아. 미셸님 밑에 있는한 안전해. 그냥 평소처럼 대해줘.”
“저번에 블라쉬처럼 암살자들이 몰래 플랫폼 안으로 들어오면 어떡해? 미셸님의 기사들이 암살자들을 놓치면?”
“그때 뚫린걸 교훈 삼아 지금은 보안이 더욱 철저할거야. 미셸님이 데리고 있는 기사들은 전부 정예야. 왕실기사들보다  세다고. 진짜야.”
“그래도 왠지 불안해…”

버나드는 계속 그녀를 안심시켰지만 데보라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버나드와 함께 훈련장으로 향하는 와중에도, 버나드의 목숨을 노리는 암살자들이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길을 가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거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터에서 버나드가 훈련을 하는 순간에도 이상한 소리가 난다싶으면 근처에 놓아두었던 짱돌을 즉시 집어들며 주변을 둘러보기도 했다.

“버나드마저 잃을  없어……”


***


“만나서 반갑습니다, 미셸님.”

오전에 윙블 가문의 영주 부부가 선물을 들고 미셸을 찾아왔다. 현재 아킨테군은 윙블 마을 근처에서 머무는 중이었고, 그 소식을 들은 영주 부부가 인사차 찾아온 것이었다.
미셸은 막사 입구에서 중년부부를 반갑게 맞이했다.

“제가 먼저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워낙 일이 많아서 말이지요.”
“아닙니다. 저희가 먼저 대영주님을 찾아뵙는게 예의에 맞지요. 누추한 저희 윙블 영지를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며칠 쉬었다  수 있게 땅을 내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사람은 막사로 들어가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한때 우리 왕국의 왕비셨던 분께서 들려주시니 참으로 영광스럽습니다. 이 땅에 축복이 내릴려나 봅니다.”
“별말씀을요.”

어느새 정오가 되어 함께 점심식사를 마치고 영주 부부가 돌아갈 시간이 되자, 미셸의 따뜻한 호의에 감동했는지 도만 영주가 갑자기  세 필을 선물로 주고 싶다는 제안을 해왔다. 그러자 미셸이 정중히 거절했다.

“선물은 이미 받았으니 됐습니다. 아까 주신걸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도만 영주는,

“겨우 말 세 필일 뿐이니 부담갖지 말고 받아주십시오. 모쪼록 여정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라고 하면서 계속 받으라고 권하니, 미셸도 결국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마음으로 주고 싶다는데 끝까지 사양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같았다.
그리하여 영주 부부를 따라 마을로 가서 선물을 받아올 사람이 필요했고, 그녀는 가신중에 최근 가장 큰 관심을 주고 있는 버나드를 선택했다. 간단한 일이지만 실수 없이  해낼거란 믿음이 있었다.

좌우간 그러한 이유로 개인훈련에 매진하고 있던 버나드가 얼결에 끌려왔다.
그는 영주부부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던 미셸과 만났다.

“말 세 마리를 받아오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분들을 따라가서 받아 오너라. 혼자서는 힘들테니 종자 두 명을 붙여주마.”

버나드는 갑작스러운 지시에 조금 어리둥절했지만, 대충 납득하고 마차 앞에 서 있던 영주부부에게 가서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미셸님의 명령으로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음?”

하인들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 올라타려던 도만 영주가 동작을 멈추고 버나드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보통의 종자들 마냥 땀내나는 훈련복을 입고 있었으나 어째서인지 인사를 하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귀족들이 받는 예절교육을 정식으로 받은 느낌이었다. 아니, 또래 소년들과 비교하면 월등히 뛰어난 몸가짐이었다. 매우 자연스럽고 능숙했다.
약간의 호기심이 발동한 도만 영주가 농담하듯 물었다.

“댁은 누구신지?”
“저는 버나드라고 합니다.”
“버나드라… 혹시 궁중예절을 배웠느냐? 너처럼 인사하는걸 예전에 궁에 들어갔을때 본것 같다만.”

그때 미셸이 미소 띤 얼굴로 다가왔다.

“그 아이는 제가 아끼는 아이입니다. 오늘처럼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틈틈히 예절교육을 시켜놨지요.”
“귀족 출신입니까?”
“평범한 배경을 갖고 있답니다. 기사 수업을 받는중이고요.”
“껄껄, 그놈 참 예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배웠군요. 옷은 지저분한데 귀족인줄 알고 깜짝 놀랐지 뭡니까.”

도만 영주는 그대로 마차에 올라탔다. 뒤이어 영주의 부인인 마렐 부인이 마차에 올라타기전 버나드를 기특하게 쳐다봤다.

“네 아버지의 이름은 무엇이냐?”

귀족예절을 배웠다지만 버나드의 몸가짐이 뭔가 특별나게 보여서 였을까. 아버지가 유명한 사람이 아닐까 하고 호기심 삼아 물어본듯 했다. 하지만 그런 관심이 버나드는 속으로 귀찮다고 생각했다.

“신분이 높으신 분들 앞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입에 담는게 결례일 정도로 그저 가난한 농노일 따름입니다.”
“신경 안쓰니 어서 말해보거라.”
“……”

버나드는 약간 뜸을 들였다. 방금전 도만 영주에게 대신 대답해준 것처럼 이번에도 미셸이 끼어들며 도와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그녀도 대답이 궁금한듯 자신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사실 전 고아입니다. 부모님의 이름을 모릅니다.”
“저런, 그것 참 안됐구나.”

마렐 부인이 측은한 눈길로 버나드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고아로 태어났다하여 불행이라 생각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한다. 신께서  지켜봐주실거야.”
“네, 명심하겠습니다.”

처음 만난 아이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걸 보니 마렐 부인은 인정이 많은 사람 같았다.
곧이어 마렐 부인이 하녀의 부축을 받아가며 마차에 한발 내딛을 때였다. 그녀는 살짝 가슴을 움켜쥐며 호흡곤란을 호소했다.

“아, 숨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너나할것 없이 걱정스러운 안색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마님 괜찮으십니까?”
“마렐 부인?”

미셸이 서둘러 나서서 마렐 부인의 상태를 살폈고, 다행히도 마렐 부인의 호흡은 이내 정상을 되찾았다.

“모두 걱정하지 마세요. 빈혈때문이었나 봅니다.”

마렐 부인이 밝게 미소를 지어보이자 모두 한시름 놓았다. 미셸도 웃으면서 그녀에게 건강관리를 잘해야한다고 거듭 당부했다. 동시에 하인들을 시켜 빈혈에 좋은 음식들을 급히 챙겨주었다.

“끓여서 차로 마시면 빈혈에 좋다더군요.”
“고맙습니다, 미셸님.  마시겠습니다.”

그런식으로 모두 마렐 부인의 건강상태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듯 했지만 오직 버나드만은 달랐다. 그는 갑작스레 마렐 부인에게 찾아온 호흡곤란 상태를 보고 불쑥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며 의구심을 품었다.

‘빈혈이 아니라 심장이 안좋은게 아닐까……’

밤의 늑대들 시절, 임무를 수행하다 보면 부상은 필연적으로 찾아왔다. 제때 치료하면 좋겠지만 사제를 늘 달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고, 단원들은 비상시를 대비해 자가응급처치법을 필수로 숙지하고 다녀야만 했다.
그리고 새로운 자가응급처치법을 발굴해 단원들에게 전수해주는 사람이 수장인 버나드였다. 버나드는 마력이나 신성력이 필요없는 민간요법이나 토속의학을 찾아다니며 연구했고, 그렇게 해서 터득한 의학지식을 단원들에게 가르쳤다. 그의 집단이 정보 수집에 일가견이 있는 단체다 보니 세상에 존재하는 별의 별 잡다한 의학지식을 수집하는데 그리 큰 어려움은 겪지 않았다. 문제라면 막무가내로 수집한 대부분의 의학지식들은 낭설과 함께 잘못된 것들이 많았다. 치료효과가 검증된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지혈하는 법이라든지 감기약 제조법 같은.

그러던 어느날, 심장이 멈춘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뛰어난 의술을 가진 원시부족이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레아와 함께 산속 깊은 곳에 살고 있던 라그다오 라는 부족을 찾았다.
사흘간의 선물 공세로 그들의 환심을 사고 비법을 물었더니, 300년전 어떤 조상이 물에 빠진 동료를 구하다가 우연히 발견했다나 뭐라나, 어쨌든 그들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의술을 전수해줬다.

“레, 레아……! 이, 이거 정말 해도 되는 것이냐?”

버나드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물에 빠진 환자처럼 바닥에 반듯이 누워있는 레아의 젖가슴에 손을 대기 일보직전이었다.
레아는 그와 달리 무척 차분했다.

“어서 하세요. 저 사람들이 따라해보라잖아요.”
“하, 하지만 위험해! 이대로 손바닥을 내리면!”
“설마 이 와중에 응큼한 생각을 하는거예요? 옷도 입고 있는데 뭐가 걸려서 그래요?”
“좋다, 후회하지마!”

버나드는 팔을 곧게 펴고 손바닥을 겹친  레아의 가슴을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눈을 질끈 감은 그가 푸쉬를 할때마다 레아의 젖가슴이 힘차게 출렁거렸다.

“오해마! 이건 널 만지는게 아니야! 단지 의술을 익히고 있을뿐이다!”

레아는 당혹스러워하는 버나드의 반응이 재밌는지 쿡쿡거리는 웃음을 쉽게 그치지 못했다.

“가슴 만졌으니 책임지세요.”

영주부부 일행의 마차를 얻어 타고 윙블 마을로 향하던 버나드는 그 시절 레아의 당돌한 발언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엉뚱한 녀석…”
“무슨 생각하길래 웃어?”

옆자리에 앉은 데보라가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원래 그녀를 데리고  생각은 없었으나 데보라가 함께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기에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왔다.

“그냥 옛날 생각.”
“기분 좋았던 때인가 보네.”

버나드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어쩌면 나를 괴롭히는 추억일수도.”

이윽고 마을 어귀에 진입했다. 그리고 영주의 마차를 향해 밝게 인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질 즈음에 영주의 저택에 도착했다.
영주부부가  마차가 현관 앞에서고 버나드가 탄 마차가 그 뒤에 멈춰섰다.
현관에는 많은 사람들이 마중나와 있었다. 영주의 다 큰 자식들도 나와 있었다.

그런데 버나드가 마차에서 내리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이 허공에 울려퍼졌다. 앞쪽 영주부부의 마차에서 나는 소리였다. 버나드는 즉시 달려가보았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현장을 확인하니 놀랍게도 마렐 부인이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젊은 남자 하나가 그녀의 코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곧 당황한 표정으로 크게 외쳤다.

“영부인께서 수, 숨을 안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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