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되찾는 노력, 수련6
클레어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연륜이 풍부한 노기사가 어째서 어린 소년을 상대로 경쟁심을 느낀 것일까? 버나드가 대체 뭐길래?
“버나드, 난 자네가 검술의 기본기만 익혔다는 가정하에 똑같이 기본기만 사용하도록 하겠네. 이견 없겠지?”
“가르침을 주시는게 아니라 제 역량을 시험해보겠다 하시니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자네는 기본기 말고도 할 수 있는게 있다면 전부 사용해도 좋아. 이 늙은이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정도로 마음껏 날뛰어 주게.”
“원하신다면.”
버나드는 정중히 묵례를 하고 자세를 바로 잡았다. 니콜라스도 목검을 앞으로 내세우며 그와 대치했다. 버나드는 진지한 표정으로 니콜라스를 주시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개처맞아도 상관없어. 봉인된 검술을 다시 손에 넣으려면 많은 경험을 쌓는게 중요해.’
봉인된 기억은 한꺼번에 돌아와 주지 않았다. 누군가와 겨룰때마다 마치 간을 보듯 하나씩 하나씩 던져주기만 할뿐이다. 이번 니콜라스와의 대련에서도 무언가 얻는게 있기를 바랐다.
“자, 시작하지.”
“예.”
“나 먼저 가겠네.”
말이 끝나자마자 니콜라스가 재빠르게 붙으며 목검을 내려쳤다. 버나드는 세차게 내려쳐지는 목검을 춤추듯 여유있게 피했다. 그러고는 빠르게 니콜라스의 옆구리를 가격했으나 니콜라스가 민첩하게 목검으로 방어했다.
탁!
니콜라스의 눈빛에 약간의 감탄이 서렸다.
“호오, 움직임이 좋군. 클레어가 질투할만 했겠어.”
“칭찬 감사합니다.”
“칭찬은 아직 이르네!”
니콜라스가 맞붙어있던 버나드의 목검을 튕겨내면서 한발 나섰고, 즉시 버나드의 가슴을 향해 가로로 휘둘렀다. 버나드는 신속히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러자 니콜라스는 다시 한 발 나서며 버나드를 연이어 몰아세웠다.
휘익!
딱!
따딱!
처음에 공언했던대로 니콜라스는 일절 봐주는 것 없이, 시작부터 버나드를 철저히 압박해 들어갔다. 목검이 허공을 가르고 맞부딪히기를 수십여차례, 버나드는 점점 땀이 나기 시작했으나 오히려 시원하다고 생각하며 니콜라스의 공격을 받아내는게 즐거웠다. 뒷걸음치며 힘겹게 방어를 하는게 고작이었지만, 목검을 맞댈때마다 뇌리에 각인된 선명한 기억의 파편이 어김없이 꿈틀대며 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렇군. 니콜라스의 검술은 마치 그 녀석을 닮았어. 예전에 나한테 죽었던 그 녀석. 이름은 까먹었지만 니콜라스는 혹시 남부 지방 출신인가? 그쪽에서 유래한 검술을 쓰는듯해.’
버나드는 슬그머니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그는 니콜라스보다 덩치가 작고 근력도 약하고 현재로선 검술 실력까지 뒤떨어졌으나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이 오래전 니콜라스와 비슷한 검술을 쓰던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며 작게나마 길을 열어주었다.
‘남부 지방 검사들은 낮게 베고 난뒤 원자세로 되돌아오는 시간이 길어. 너나할 것 없이 한 사람의 버릇처럼 똑같아. 검술탓이라기 보단 그쪽 지방사람들이 타고난 골격 때문이지. 어깨가 좁아 탄력적이지 못해.’
버나드는 계속 궁세에 몰리면서도 당황하지 않고 정신을 집중시켰다. 때마침 니콜라스의 목검이 어깨를 노리고 날아오자 급하게 허리를 숙이고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목검이 신묘하게 방향을 바꾸며 귀신같이 쫓아왔다. 오른쪽 허벅지를 때리려는 찰나였다. 버나드가 쪼그려 앉은 자세에서 목검으로 다리를 방어하려 했다면 니콜라스의 목검은 금세 방향을 바꿔 버나드의 옆머리를 가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버나드는 신속히 앞구르기를 하며 니콜라스의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갔다.
“허허, 참.”
니콜라스는 입맛을 다시며 혀를 찼다. 그의 공격이 실패해서가 아니라 위기를 모면하는 버나드의 재주가 참으로 기특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뜻밖이었다.
니콜라스의 다리 사이로 빠져나온 버나드는 단숨에 뒤를 잡으며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니콜라스는 검을 휘두르는 동작으로 인해 급격히 방향을 틀 수가 없었고, 손바닥 뒤집듯 순식간에 몸을 뒤로 돌린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였다.
‘이때다!’
버나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니콜라스의 발목을 노렸다. 즉시 구르기를 멈추고 바닥에 엎드린 자세 그대로 땅바닥을 긁듯 목검을 휘둘렀다. 원심력이 실린 목검의 궤적을 따라 바닥의 흙먼지가 촤르륵 피어올랐다. 니콜라스는 뒤를 볼 수 없었으나 버나드의 목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발목에 적중하기 일보직전이었다.
“크, 제법이구나!”
버나드의 재주에 놀란 니콜라스는 승부욕이 발동함과 동시에 검술의 기본기만 쓰겠다고 약속한 것을 무심코 어기고 말았다. 그는 궁지에 내몰리자 본능적으로 고급 검술을 발휘했다.
화르륵!
마나를 발산해 목검에 검기를 싣는 순간 그의 몸 또한 전보다 훨씬 날렵해졌다. 버나드의 공격따위 피하는 것쯤 식은 죽 먹기였고, 번개같이 뒤로 돌며 자신의 발목을 노리던 목검을 괘씸하다는듯이 되받아쳐버렸다.
따악!
뽀각!
빙그르르르!
버나드의 목검이 두동강이 나버렸다. 반으로 쪼개진 나무가 빙글빙글 돌며 저멀리 허공으로 날아가버렸다.
“어?”
바닥에 엎드려 있던 버나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기, 기본 검술만 쓰신다고…”
뽀각!
당황한 니콜라스가 급히 자신의 목검을 무릎으로 두 동강 내버리더니 모른척 헛기침을 했다.
“크흠! 대결은 무승부다.”
“예?”
“둘 다 목검이 부러졌으니 무승부로 치자는 걸세.”
“제가 본게 맞다면 방금 검기를 본 것 같은데……?”
“어허, 기분탓일세.”
“기분탓은 아닌것 같은데요?”
니콜라스는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좋아, 솔직히 말하지. 자네의 실력을 과소평가 했네. 기본기만 쓴다는 규칙을 위반했으니 자네가 이긴 것으로 하지. 다만, 내 요청을 하나 받아줬으면 허이. 이걸로 끝내기엔 무언가 아쉽군. 그래서 말인데 이건 어떠한가. 근접격투로 마무리를 짓는 것일세.”
니콜라스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가슴 앞으로 들어보였다.
“기사가 되는 것이 목표라면 근접격투도 필수로 익혀야 한다네. 생사를 가르는 전쟁터에서 지금처럼 무기를 잃어버렸을때 큰 도움이 되거든.”
버나드는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웃었다.
“좋습니다. 한번 해보죠.”
“둘 중 한 명이 코피나면 지는것으로 하지.”
“괜찮으시겠습니까? 명색이 기사단장님이신데 코피가 나면 체면이 서지 않으실텐데.”
“설마 애송이한테 당할라고.”
조금전 목검 대결로 인해 니콜라스는 꽤나 흥분했는지 씨익 웃으며 도발적으로 나왔다.
사실 버나드는 체술 또한 검술처럼 기억나는게 하나도 없었으나 일단 도전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하다보면 뭐라도 떠오르는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잘 부탁하고 자시고 간만에 피가 끓어오르는군. 거기 달려있는 고환을 주먹으로 깨줄테니 조심하게. 이래봬도 내가 한창땐 불알깨기 도사였어. 나 때문에 대가 끊긴 놈들이 수두룩하지.”
버나드가 웃으며 두 주먹을 쥐었다.
“농담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근처에서 그 모습을 구경하던 클레어는 혼자서 많은 생각을 하는중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버나드에 대한 놀라움과 의아함이 가득했다. 방금 짧은 목검 대결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기사단장 니콜라스 마저 버나드에게 고전했다는 것. 심지어 대결 규칙을 깨면서까지 니콜라스가 검기를 사용했다는 것. 얼마나 급했으면 그랬을까. 버나드가 얼마나 버거웠으면…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해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버나드… 정체가 뭐야…”
그때 나물을 캐러갔던 데보라가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가까이 다가왔다.
“어머,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멀리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클레어에게 물었다.
“저 분이 우리 버나드를 괴롭히는 거예요?”
“대련중…”
“아, 대련이구나. 난 또 버나드를 괴롭히는가 싶어서 화 낼뻔했네. 호호.”
데보라가 가볍게 웃자 클레어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당신은 버나드와 어떤 관계…?”
그 물음에 데보라가 빙그레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전 버나드를 좋아하고, 버나드도 제가 없으면 안되는 관계랍니다?”
클레어가 지그시 쳐다보며 눈을 깜빡깜빡 거렸다.
“연인 사이?”
“그런걸까요…?”
데보라는 갸우뚱 거리더니 말했다.
“전…… 분명히 여자예요. 버나드는 남자고. 음… 버나드가 사귀자고 하면 음… 제가 마음이 약해서 거절하지 못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우리 관계를 어떤 식으로 정의해야하는거지…? 흐음… 손으로 해준게 있는데. 흠…”
그녀가 속에 담긴 얘기를 거침없이 고백하자 클레어는 입을 꾹 다물며 다시금 버나드와 니콜라스쪽을 쳐다보았다. 남녀사이의 문제는 그녀가 뭐라해줄 말도 없고, 애초에 아무것도 몰랐다. 그녀는 사랑에 문외한이다.
“그냥… 저거나 보죠…”
“그럴까요?”
데보라는 금세 고민을 멈추고 버나드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팔을 뻗어 힘차게 응원했다.
“버나드! 이기면 누나가 오늘 맛있는거 해줄게!”
그 순간 니콜라스가 선공을 날리며 버나드의 복부를 치고 연이어 업어치기로 그를 땅바닥에 메다 꽂았다.
“큭!”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닥에 나자빠진 버나드가 기침을 토했다. 니콜라스는 공격을 이어가지 않고 웃으면서 그를 내려다봤다.
“일부러 힘을 빼고 쳤네. 그 나이대면 막싸움만 알지 체술은 배우지 못했을게 뻔하니까. 항복을 권하고 싶은데, 더 할텐가?”
“예.”
버나드가 침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을 뺐다고는 하지만 충격이 가시질 않아 몸이 비틀거렸다. 니콜라스를 향해 힘없이 웃어보였다.
“후, 아프네요.”
“마사지라도 해줄까?”
버나드는 손등으로 코를 훔치며 다시 집중했다.
“이번엔 뜻대로 안될겁니다.”
“기대하지.”
퍽!
니콜라스가 빠르게 발을 차올리는 순간 버나드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나왔다. 옆구리를 맞고 다리가 휘청거렸고 넘어지지 않으려 최대한 버티다가 연달아 날아든 니콜라스의 주먹에 가슴을 얻어맞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크윽!”
“누구나 어릴때 주먹질 한 번쯤은 해봤을텐데 자네는 아닌가 보군. 맨손싸움을 아예 모르는 것 같으니 이건 그만두는게 좋겠어.”
“후……”
버나드는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운채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주먹으로 맞은 가슴이 얼얼하다 못해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한쪽에서는 발끈한 데보라가 니콜라스를 향해 거의 욕설 비슷하다시피 뭐라뭐라 외쳐대고 있었다.
“고추는 서냐 이 영감탱이야!”
심지어 클레어가 황급히 그녀의 허리를 부둥켜 안지 않았더라면, 데보라가 근처에 널려있는 짱돌을 주우러 가는걸 클레어가 막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아무도 몰랐다.
“으……”
버나드는 신음을 흘리며 잠시나마 하늘을 올려다봤다.
맑고 푸른 하늘이다.
“레아……”
파란 하늘속에 레아의 얼굴을 그리며 눈을 감았다. 동시에 울컥하며 극심한 그리움이 용솟음쳤다. 자신이 똑바로 처신했으면 그녀가 그렇게 이름 없이 죽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탄식했다. 뒤이어 프레드릭왕을 향한 분노가 휘몰아쳤다. 이를 꽉 깨물었다. 그 순간 눈이 번쩍 떠지며 돌아온 기억의 파편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버나드는 아련한 기억속으로 빠르게 젖어들었다. 오래전 훌륭한 용병왕이라고 불렸던 레퍼드와 함께 지낼때다.
“버나드, 체술을 익히면 좋은점이 검을 쓰면서 중간중간 팔을 뻗거나 발을 내지르면 상대에게 그것만큼 위협적인 공격도 없다.”
용병생활을 하기전 레퍼드는 방황하던 어린 시절 길거리 싸움꾼으로 유명했고, 무기없이 맨주먹으로 싸움이 붙으면 설령 그 어떤 영걸이 와도 절대 그를 이길 수 없을 것이라며 누구나 그에게 엄지를 추켜세웠다.
버나드는 그런 레퍼드에게서 체술을 배웠다. 그리고 그때의 기억들이 지금 이 순간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상대를 때리다 뼈에 금이가서 고생하던 순간, 하도 맞아서 지워질 날이 없었던 멍 자국, 땀으로 끈적거리던 몸, 잘했다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레퍼드의 손길. 그러한 기억들이 머릿속에 빠르게 자리 잡았고, 덕분에 버나드는 십수년간 꾸준히 배워야할 체술 기술을 찰나의 사이에 괴물처럼 터득해버렸다. 아니 돌려받았다는게 정확할 것이다.
“난 이만 돌아가겠네. 목검 대결은 자네의 승, 체술 대결은 내가 이긴 것으로 하지. 좋은 대결이었어.”
“아뇨,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응?”
등을 돌렸던 니콜라스가 다시 뒤를 돌아봤다.
버나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입가에 한가닥 미소가 걸려있었다.
“지금부터 시작인데 어디 가십니까.”
“호오, 용기와 끈기는 인정해주지. 하지만 자네 몸이 못 버틸…… 으음!?”
그가 말을 하는 와중에 돌연 버나드가 민첩하게 달려들며 주먹을 쭉 뻗었다.
파앗!
얼굴 바로 앞에서 멈춘 주먹이 강한 바람을 일으키며 니콜라스의 머릿결을 흐트러뜨렸다.
니콜라스는 당황하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뭔가 이 힘은!?”
“뭐긴요.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게 해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