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되찾는 노력, 수련5
클리프는 발가벗긴 미셸의 목에 개목걸이를 채우고 끌고다니는 상상을 하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흥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불끈쥐며 소리쳤다.
“날 얕보던 그 도도한 면상에 정액을 뿌려주마 미셸!”
그러더니 눈을 부릅뜨고 마가렛을 마주보면서 마구 괴성을 질러댔다.
“으아아아아! 이야아아아! 이야아아아아!”
마가렛은 그가 실성한 사람처럼 굴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멍하니 그의 얼굴만 응시할뿐이다.
주르륵.
갑자기 클리프의 코에서 축축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음?”
클리프가 인중을 손등으로 문지르자 코에서 흘러내린 붉은 피가 손등에 묻어나왔다. 코피를 흘렸다는걸 깨달은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후후, 미셸을 짓밟을 생각에 그만 나도 모르게 흥분을 했나보군요. 진정해야겠습니다.”
손수건을 꺼내 코피를 막은 후 다시 마가렛의 뺨을 쓰다듬었다.
“나의 사랑스러운 마가렛. 난 당신을 얻기 위해 잔인한 희생을 치뤄야만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난 유부남이었고, 당신과 결혼을 하려면 이혼을 해야했죠. 하지만 전처 키미라는 내 요청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 선택을 해야만 했죠.”
클리프는 마가렛의 턱을 돌려 창밖을 쳐다보게 만들었다.
“저기 보이시나요? 저 예쁘고 사랑스러운 괴물이 말입니다.”
“……!”
마가렛의 생기없는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그녀의 시선 끝에 철창 안에 갇힌 괴물이 보였다. 머리에 수십개의 눈알이 달린 괴물은 네 발 달린 짐승처럼 생겼으며 황소보다 큰 몸집을 자랑했다.
“내 전처 키미라입니다. 형과 대주교님께 당신과의 결혼을 인정받으려면 그녀를 실종처리하고 괴물로 만들어야만 했죠. 그래야 아무도 못찾을테니까요. 그리고… 이혼이 자연스레 성립되는겁니다. 후후.”
클리프는 다시 마가렛의 턱을 원위치 시키며 자신을 바라보게했다. 마가렛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잔뜩 깃들어 있었다.
“마가렛, 키미라도 우리와 함께 여행을 할겁니다. 아아, 오해하지말아요. 전 이제 키미라를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내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이는 오직 마가렛 당신뿐입니다. 키미라를 여행에 데려가는 이유는 두 개뿐이에요. 우리를 지키게 하고…”
그가 미세하게 떠는 마가렛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나지막이 덧붙였다.
“키미라로 미셸과 그 딸 샤를을 사냥할겁니다.”
***
정오의 햇살이 굽어진 강물 위로 반짝이고 있었다.
피에르는 강가로 가서 양동이에 물을 퍼담았다. 동이 틀때 잠든 미셸이 곧 깨어날 시간이다. 그녀의 세숫물을 양동이에 퍼담은 다음 배설물이 쌓인 요강을 비워내고 깨끗이 닦았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얼굴과 손을 말끔히 씻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찰나였다.
언제 다가온 것인지 등뒤에 버나드가 서 있었다. 피에르는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강물에 빠질뻔했다.
“뭐, 뭐! 저리 꺼져! 나 지나갈거야!”
피에르는 물이 가득 담긴 양동이와 빈 요강을 들고 냅다 그를 지나치려했지만 버나드가 실실 웃으며 그 앞길을 우뚝 막아섰다. 피에르가 급하게 발길을 멈추며 양동이의 물이 넘실거렸다.
“뭐, 뭐! 뭐!”
“너랑 할 얘기가 있어서 왔어.”
“난 없어! 비켜!”
“미셸님한테 가서 네가 날 풀어줬다고 꼰질러도 괜찮은거네? 얼마전 제가 묶여있을때 피에르가 도망치는걸 도와줬습니다 하고 털어놓으면 미셸님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 치사한놈! 말했다간 가만히 안있을거야! 아주 따끔한 맛을 보여줄테니 닥치고 있으라고!”
“걱정마. 내 요구만 착실히 들어주면 말 안해.”
“협박하는 거야?”
“서로 동지가 되자는거지.”
피에르가 미간을 찡그렸다.
“난 너 같은 놈이랑 동지 따위 안해. 다시는 날 찾아오지마.”
그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버나드가 소리쳤다.
“이대로 그냥 가버리면 네 일자리를 빼앗을거야. 나 꼬추 크다고 하면서 미셸님한테 보여주는 수가 있어. 길기만한 니 실좆하고는 비교가 안될걸?”
그 즉시 피에르가 멈춰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분한 표정으로 버나드를 노려봤다.
“치사하고 더러운 자식.”
“내 요구를 들어주면 아무 걱정할게 없다니까?”
버나드가 킥킥 웃으며 말하자 피에르가 무거운 양동이를 땅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요구가 뭐야? 무리한 부탁이면 들어줄 수 없어.”
“별거 아니야. 너한테 쉬운거야.”
이른 아침에 잠들었다가 깨어난지 얼마 안된 버나드는 자기도 모르게 피에르 앞에서 하품을 했다.
“하아암. 가서 미셸님의 정오식사로 나온 음식 몇개만 가져와. 나 배고프다.”
“뭐어어!?”
피에르가 기가 차다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내가 니 하인이야? 그리고 넌 목숨이 여러개인가 보지? 미쳤어? 감히 주군의 음식에 손을 대려고 해?”
“평민들이 먹는 음식은 입맛에 잘 안맞더라고. 거의 다 오래된것 밖에 없어. 마르고 딱딱하고 상하고.”
“너 평민이야. 가신이 됐다고 너 따위가 귀족인줄 착각하는거야?”
그 말을 듣고 버나드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피에르는 왜 웃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더욱 인상을 찡그렸다.
“실성했구나.”
“정 힘들면 네 몫으로 나오는거 있잖아. 반 나눠주면 되지. 미셸님의 메뉴랑 똑같을것 아니야.”
“웃기지마. 그건 내가 한 일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고. 게다가 난 잠자리 시종으로서 늘 건강한 몸과 정력을 유지해야 해. 안그럼 쫓겨난다고.”
버나드는 듣는둥 마는둥 재차 하품을 했다.
“하는 수 없네. 미셸님이나 찾아가야지. 삐쩍 말라서 계집애 같이 생긴 피에르 같은 놈 당장 쫓아내고 나를 시종으로 삼아달라고 부탁드려야겠어. 날 많이 좋아해주시니까 흔쾌히 수락해줄거야.”
버나드가 휘파람을 불며 그를 여유롭게 지나쳤다. 피에르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깊게 고민 하더니 이내 후다닥 뛰어가서 그를 붙잡았다.
“기, 기다려!”
“생각이 바꼈어?”
피에르는 분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소리쳤다.
“많이 못준다!”
잠시 후, 미셸의 막사에 다녀온 피에르가 고소한 냄새가 풀풀 나는 육즙 가득한 닭다리와 잘 구워 말랑말랑한 쿠키, 약간의 포도주를 가져왔다.
“이것 밖에 없으니 더 달라고 하지마.”
“이거면 충분해. 수고했다.”
버나드는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피에르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며 한숨을 토해냈다.
“하아, 저런 놈한테 약점을 잡힐줄이야. 내 인생이 어찌될런지.”
“맛있었어.”
음식들을 순식간에 다 먹어치운 버나드가 손가락을 쪽쪽 빨면서 해맑게 웃어보였다. 피에르는 바닥에 널브러진 빈 접시와 술잔을 주워들면서 그를 퉁명스럽게 바라보았다.
“다시는 찾아오지마.”
“이따 저녁에도 부탁해.”
“뭐!?”
“잘 있어라.”
버나드가 정답게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떠났다. 점점 멀어지는 그의 등을 보며 피에르가 악을 써서 소리질렀다.
“야! 이게 끝이라고! 절대 찾아오지마! 또 찾아오면 그때는 미셸님한테 진짜 이를거야!”
피에르와 헤어진 버나드는 샤를의 막사를 찾아갔다. 클레어를 찾아 함께 훈련을 하자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지난밤 클레어는 자신에게 검술의 기본기를 가르쳐주다가 갑자기 영문 모를 화를 내며 떠났지만 버나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자신보다 나이 어린 소녀의 귀여운 행동일뿐 무겁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시 부탁하면 들어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샤를의 점심 식사를 배달하던 클레어와 운좋게 마주쳤지만 그녀는 버나드의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싫어…”
버나드는 뜻밖이란 표정을 지었다.
“바빠?”
“응…”
사실 바쁘지 않지만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버나드가 또 놀리러 온 것이라며 그의 장난에 어울려주기가 싫었다.
“그럼 언제 시간나?”
“몰라…”
“종일 바빠?”
“응…”
“할 수 없지. 알았어.”
버나드는 순순히 포기하고 발길을 돌렸다. 혼자 개인 연습이나 하자며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무리하게 조르지 않고 얌전히 사라지는 버나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클레어의 머릿속에서 문득 버나드가 훈련용 허수아비를 목검으로 두동강 내던 모습이 떠올랐다. 언제 봐도 부러운 광경이었다. 자신은 목검으로 훈련용 허수아비를 두동강 낼만한 기술이 없다.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버나드가 떠나는게 아쉬워졌다.
‘머리는 그를 싫어하는데 몸이…’
몸이 그를 원하고 있었다. 버나드에게 기술을 가르쳐 달래볼까? 버나드에게 배우면 자신도 목검으로 훈련용 허수아비를 두동강 낼 수 있지 않을까?
밉지만 부러운 그를 부를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때, 버나드가 기가 막히게 뒤로 돌아섰다. 일부러 노린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좋은 타이밍이었다.
“정말 바쁜거지? 그런거지?”
클레어는 눈을 몇번 깜빡이다가 대답했다.
“잘 생각해보니 한가한 것 같기도 하고…”
단 몇초만에 말을 번복한 그녀는 부끄럽고 민망한 나머지 시선을 내렸다.
버나드가 기뻐하며 뛰어왔다.
“가자 그럼! 네 나무막대기까지 준비해놨어!”
“근데 나 밥을…”
“밥 아직 안먹었어?”
클레어는 계속 바닥에 시선을 둔채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밥 다 먹을때까지 기다려줄게. 어디서 먹어?”
“아무데나 괜찮아…”
이후 클레어는 이제 막 깨어난 샤를에게 점심 식사를 갖다준 다음 그녀에게 배급된 음식중에 빵 한 조각만 챙겨갖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주먹만한 빵 조각을 보고 버나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거 먹고 되겠어?”
“응…”
클레어는 훈련할 장소로 가서 먹겠다고 했다. 그래서 둘이 함께 공터가 있는 곳으로 가는데 뒤에서 버나드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버나드! 같이 가 버나드!”
뒤를 돌아보니 데보라였다. 그녀는 옆구리에 작은 바구니를 끼고 뛰어오더니 버나드 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가쁜 숨을 골랐다. 그러다 숨을 꾹 참으며 서운한 투로 말했다.
“누나도 데리고 가야지 왜 혼자만 다니는거야?”
“훈련하러 가는거라 그랬지. 데보라는 있어봤자 할게 없잖아.”
“어머, 왜 할게 없어?”
데보라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작은 바구니를 자랑스럽게 들어보였다.
“주변에서 나물 뜯고 있으면 되잖아. 누나랑 같이 있기 싫은거야?”
그녀가 서운한 표정을 짓길래 버나드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같이 가자. 데보라가 곁에 있으면 나도 마음이 편해.”
“정말이야?”
“응.”
“와, 기뻐라!”
데보라는 손뼉을 마주치고는 갑자기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웁!”
“좋아라~ 좋아, 좋아~”
버나드는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에 폭 안기며 숨쉬기가 곤란했지만 그녀에게서 좋은 향기가 났다. 버나드의 입가에 절로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졌다.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클레어가 물었다.
“둘이… 애인사이…?”
“어머나, 기사님! 그런식으로 오해해주면 기뻐요! 조금 부끄럽지만. 호호.”
“그건 아니야. 우웁!”
버나드가 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지만, 동시에 데보라가 그를 더욱 힘껏 끌어안으며 그녀의 즐거운 웃음소리만 클레어의 귓가에 들렸다.
얼마뒤 세 사람은 잡초 투성이의 공터를 찾아 자리를 잡았다.
“다녀올게~”
데보라는 즉시 주변으로 나물을 뜯으러 갔고, 클레어는 그루터기에 앉아 조용히 빵을 뜯어 먹기 시작했다. 버나드는 클레어의 시야가 미치는 곳에서 혼자 나무막대기를 쥐고 몇 차례 휘둘러보았다.
“클레어랑 연습한건 확실히 몸에 익었어. 다행이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을때 누군가 나타났다.
“클레어 경이 식사하는 동안 상대 좀 해줄까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목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버나드와 클레어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울창하게 자란 나무 옆에 니콜라스가 서 있었다.
“단장님…!”
클레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니콜라스가 앉으라는 손짓을 하며 버나드를 쳐다봤다.
“사흘전 밤에 자네의 검술을 보고 무인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군. 자네의 검을 직접 받아보고 싶어 좀이 좀 쑤셔야지. 어떤가 버나드?”
버나드가 빙긋이 웃어보였다.
“환영입니다.”
“또래 종자들과 달리 긴장하거나 당황하지도 않는군. 나이에 비해 성숙한 그 모습이 정말 신기하단 말이야.”
니콜라스는 앞으로 걸어나오며 팔을 걷어부쳤다. 그의 손에 반듯한 목검 두 개가 쥐어져 있었다. 그것으로 보아 우연히 마주친게 아니라 작정하고 찾아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받게.”
니콜라스는 목검을 휙 던졌다. 버나드가 가뿐히 받아들자 그가 말했다.
“이건 훈련이 아니니 각오하게. 자네의 진짜 실력이 어떤지 확인해보는 시험이야. 그러니 진심으로 가겠어.”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던 클레어는 다 먹지도 못한 빵 덩어리를 자기도 모르게 바닥에 떨어뜨렸다. 상관과 부하의 관계로 니콜라스와 만난 이후로 그가 늘 보여주던 부드럽고 너그러운 성품은 온데간데 없고 먹잇감을 노리는 사냥개처럼 매섭고 진지한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니콜라스의 눈빛에서 긴장감까지 엿볼 수 있었다.
“잠깐 상대해주러 오신게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