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되찾는 노력, 수련4
다음날에도 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했다.
개간을 하지 않은 들판과 낮고 완만한 언덕으로 이뤄진 초원이 계속 이어졌다. 아킨테의 기사들을 따라 이동하는 여행자와 상인들은 행군으로 몸이 힘든 가운데 그나마 걷는게 편해 다들 잡담을 주고 받는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버나드는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대지를 둘러보며 불안한 기분을 숨기지 못했다.
“사방이 너무 뻥뚫려있어. 적들에게 쉽게 노출될거야.”
2차 걷는 사자 전쟁이 진행중이다. 아직은 초반인지라 왕의 모든 자식들이 서로 눈치를 보는중인지 그에 관해 들려오는 정보가 없었으나 미셸과 샤를은 엄연히 표적이다. 항상 주의를 할 필요가 있다. 그녀들이 당하면 아킨테 가문의 가신인 자신도 고스란히 피해를 보니까.
아무튼 그날 내내 초록의 대지를 걸었다. 아킨테의 기사들은 곧 마을이 나올테니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외치며 말을 타고 여행자들의 기운을 북돋웠다. 아킨테군은 윙블이라는 마을에서 나흘간 야영을 할 계획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무리해서 이동했고, 그날밤이 지나고 다음날 새벽이 되어서야 마침내 영주의 관저가 존재하는 윙블 마을에 도착했다.
어떤 상급기사가 널따란 공터를 가리키며 외쳤다.
“자 여길 기준으로 막사를 세우고 야영지의 입구는 남쪽으로 낸뒤 목책을 쳐라!”
미셸은 기사와 종자들이 전부 달려들어 야영지를 건설하는 동안 가신 회의를 소집했다. 푸르스름한 새벽녘, 커다란 나무 아래 미셸을 비롯해 샤를과 클레어, 총장 사만다, 기사단장 니콜라스, 집사 니슨, 마관장 벤 등 아킨테의 관리들 및 이번 여정을 함께한 소영주들이 야외 탁자에 둥글게 모여 앉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미셸의 부름으로 버나드도 참석해 있었다.
“아킨테에 도착할때까지 우리는 늘 긴장해야합니다.”
회의의 주제는 걷는 사자 전쟁에 휘말리지 않고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아킨테로 귀환할 수 있는가’였다.
가신들은 저마다 침을 튀기며 열정적인 발언들을 쏟아냈다. 그리고 서슴지 않고 왕실을 욕했다.
“누가 당할줄 알고? 지금의 왕실은 악마들이 지배한게 틀림없습니다!”
“자식들한테 공격받을 것 같으니까 먼저 수작을 부린겁니다! 미셸님! 우리는 절대 휘말려선 안됩니다!”
“신께서 왕실에 천벌을 내려줬음 좋겠어.”
“맞아, 맞아! 천벌을 받아 마땅해! 모든 자식들을 죽이려고 개수작을 부렸잖아! 심지어 신분이 귀한 왕자와 공주까지 죽이려 한다고!”
미셸을 포함하여 가신들은 일제히 한뜻으로 프레드릭왕이 꾸민 전화에 휘말려선 안된다며 얼른 아킨테로 돌아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아킨테에만 도착하면 전화에 휘말릴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영지에 틀어박혀 빗장을 굳게 걸어 잠근뒤 걷는 사자 전쟁이 끝날때까지 나오지 않을 생각인 것 같았다.
“작은 불씨가 큰 화재를 일으키듯이, 작은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큰 불행을 가져오듯이, 작은 오해가 큰 갈등으로 번지지 않도록 왕의 핏줄을 물려받은 왕자와 공주, 서자와 서녀분들께 당장 서신을 보내 평화를 바란다는 우리의 입장을 명확히 밝힘과 동시에 아킨테에 도착하기 전까지 조심하고 또 조심합시다!”
어떤 목소리가 큰 가신이 일어서서 그렇게 말하자 다른 가신들 역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동의하기 시작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 영지에 전란이 닥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오직 평화만 추구할뿐입니다!”
“맞습니다! 저 역시 똑같은 생각입니다!”
“미셸님! 우리 아킨테는 걷는 사자 전쟁에서 빠지겠다는 입장을 빨리 왕의 자식들에게 알려주십시오!”
오늘 처음으로 군신회의에 참가한 버나드는 여태껏 몰랐던 아킨테군의 여론을 깨닫고 속으로 혀를 찼다.
버나드는 개인적으로 프레드릭왕에게 복수하고 싶어 자신의 군주인 미셸이 걷는 사자 전쟁에 적극적으로 임해주길 바랐지만, 그런 본심을 논외로 치고 이 상황을 제 3자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봤을때, 그의 경험에 의하면 전쟁을 피할 생각에 영지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무조건 진다.
‘어째서 여긴 겁쟁이들만 모였는가…’
버나드가 원했던 회의는 몸을 사리며 도망치자고 논의하는 이딴 회의가 아니었다. 왕실에서 그는 언제나 공격을 담당했다. 그가 이끄는 비밀 조직에 수비란 것은 없었다. 오직 공격과 방어만 있었을 뿐이다. 왕국이 평화로울때도 그는 언제나 은밀히 전쟁중이었고 줄곧 공격만 해왔다. 정보를 수집해 적을 공격하고, 정보로 적의 공격을 방어했다.
일례로 외교의 마스터는 항상 평화를 모색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왕국이 평화의 길로 가도록 왕에게 조언한다면, 비밀조직의 마스터는 그와 달리 언제나 새로운 적을 찾아내고, 없으면 만들어내거나 공작을 통해 나쁜놈으로 몰아가면서 줄곧 공격적으로 움직였다. 그것은 평화때나 전쟁때나 늘 똑같았다.
“후……”
버나드가 이 회의에서 특히 실망한 것은, 아킨테군의 첩보 및 정보를 다루는 마스터까지도 평화를 원한다는 것이다. 한쪽이 평화를 원하면 다른쪽이 반대의 조언을 올려야 하거늘, 그러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한 목소리로 영지에 들어가서 처박히자는 얘기따위나 하고 있다.
한심하고 씁쓸했다. 만약 미셸이 가신들의 말만 듣고 영지에 틀어박히겠다는 결정을 내린다면 그녀는 이 전쟁에서 제일 첫번째 패배자가 될 것이다. 다른 군주에게 무참히 짓밟히고 부서질것이다. 버나드는 확신했다.
모두에게 한마디 하고 싶었으나 어린애의 치기어린 생각이라며 무시당할게 뻔했다. 그리고 첫 회의부터 튈 생각은 없었다. 일정 기간이 지나 서로 낯이 익거든 그때나 입을 열자고 다짐했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귀를 열어주며 듣는 척이라도 할테니까.
그런데 미셸이 자신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나보다.
“버나드.”
갑자기 그녀가 먼 곳에 앉아있는 자신을 호명했다.
“회의 내내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는 것이냐. 너도 아킨테 가문의 가신이고 발언할 권리가 있으니 편히 말해보거라.”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샤를이 들릴듯말듯한 목소리로 작게 투덜거렸다.
“내 말을 씹는 저 녀석이 무슨 가신이라고.”
버나드가 헛기침을 하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미셸이 나서서 멍석을 깔아준 이상 모든 가신들이 자신의 말을 주의깊게 들을 것이다.
“저는 여기 계신분들과 생각이 달라서 말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괜찮다. 어서 말해보거라.”
미셸이 미소 띤 얼굴로 재차 권하자 버나드는 마지못한척 속에 품고 있던 말을 담담히 꺼냈다.
“우리는 결코 전쟁을 피할 수 없습니다. 수비적으로 생각해야할때가 아니라 먼저 나서서 공격을 해야할때라고 봅니다.”
“무엇이?”
“저 꼬마놈이 뭔소리를 하는게야.”
그의 생각을 듣고 가신들이 웅성거렸다. 어린애라 뭘 모른다는 식으로 무시하며 피식 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 중에 어떤 가신이 따지듯 물었다.
“그 말인 즉 전하의 더러운 음모에 놀아나자는 얘기더냐?”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버나드는 미셸의 눈을 마주보며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놀아나야 합니다.”
“니가 뭘 알아! 나이도 열몇살 밖에 안처먹은 놈이 정치가 뭔줄 알기나 해? 하다못해 말발굽 가는 법은 아냐? 지금 네가 할 일은 기사님들 심부름밖에 없다 꼬마야.”
어떤 영주가 낄낄거리며 조롱댔지만 버나드는 들은척도 안하고 더욱 더 큰 목소리로 모두에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고정관념에 빠져있습니다. 전하의 핏줄을 물려받은 자식들이 어째서 우리와 의견이 같다고 생각하시는거죠? 모두가 평화를 원하고 있다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자 패착으로 향하는 지름길입니다! 인간과 상황은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일반화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버나드는 계속해서 힘있는 어투로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다.
“100년전 정치가 로바르트는 그의 저서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전쟁을 피하려면 화근을 잘라라! 그런데 우리는 지금 화근을 키우며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선택을 하려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걷는 사자 전쟁을 등한시하고 영지에서만 지내다 보면 왕의 자식들 중 누군가는 주변 형제들을 하나씩 처부숴 나가며 언젠가 우리가 막지못할 강대한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현재로선 그게 누가 될지 모르겠으나 그 누군가가 우리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자라나게 놔두실겁니까? 최초의 징후가 있을때 왜, 그들을 막거나 전쟁을 최대한 지연시키려 노력하지 않으시는지요? 영지에 숨는 행위는 오히려 더 큰 전쟁을 불러오는 어리석은 행위란 말입니다!”
간만에 목소리를 크게 낸 버나드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통했을까?
자신의 의견에 공감을 표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기대를 갖고 잠시 가신들의 반응을 살펴보았지만 실망스러웠다.
“이야, 저 녀석 꼬마 주제에 로바르트의 책까지 읽었나보네.”
“그 책 어린 나이에 읽기엔 어렵지 않나?”
“어디서 주워들었나보지 뭐.”
그 와중에 가만히 앉아있던 니콜라스가 껄껄 웃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말 하는게 꼭 어른 같구만… 저 아이의 정체는 뭘까.”
그리고 다른쪽에 앉아있던 샤를은 버나드를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흥, 전쟁광도 아니고.”
그때 한 영주가 일어나서 버나드에게 점잖게 물었다.
“전하의 자식들 모두가 우리끼리 싸우게 하려는 전하의 불순한 의도를 간파하고 있을걸세. 그런 상황에 누가 미련한 짓을 벌이겠는가?”
그에 버나드는 간단히 대답했다.
“왕실에 존재하는 비밀 조직이 나서서 왕의 자식들간에 분열을 일으킨다거나, 아니면 자식들끼리 서로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등 싸움의 원인은 다양할 것입니다.”
“얼토당토 않는 소리. 모름지기 군주라 함은,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파악하는 통찰력을 겸비함은 물론이고 공과 사도 명확히 구분하는 품격 높은 인격을 갖춘 분들일세. 심지어 하늘이 내려준다는 왕의 핏줄을 물려받은 분들이야. 고귀하고 영예로우신데다 우리와 생각하는게 달라. 세상이 그리 녹록지않네. 경험이 적은 어린 소년의 눈으로 보는 좁은 세상과 다르다는걸 명심하길 바라네.”
결국, 가신들 입장에서는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누군지도 모르는 소년인 버나드의 의견따위는 듣지도 않겠다는듯 그들의 처음 생각대로 걷는 사자 전쟁을 회피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회의가 끝났다.
“행군으로 많이 지쳤을텐데 새벽에 회의를 하느라 모두 수고들 했습니다. 현재 우리 병사들이 열심히 막사를 세우고 있으니, 막사가 완성되면 정오까지 푹 쉬십시오. 식사때 뵙겠습니다.”
미셸의 말을 끝으로 모두 자리를 떠났다.
버나드도 자리를 뜨려는데 미셸이 다가왔다.
“네 의견은 잘들었다.”
그녀는 미소짓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 또한 가신들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어서 자신의 생각을 싫어할줄 알았는데 의외로 기특하게 쳐다봤다.
“네 말대로 우리가 걷는 사자 전쟁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치자, 지금 시점에서 내가 무엇을 먼저 했으면 좋겠느냐?”
“제 말을 들어주시는 겁니까?”
그녀가 빙긋 웃는다.
“글쎄? 일단 말해보아라, 뭐든지. 듣고 나서 고민해보겠다.”
“왕의 자식들에 관한 정보를 전문적으로 수집할 수 있는 새로운 비밀 조직을 기르고, 왕의 자식들중 몇 명과 믿을 만한 동맹을 결성하십시오. 그것이 가장 먼저 해야할 일입니다.”
“동맹을?”
“예, 동맹입니다.”
부드럽게 버나드를 응시하던 그녀의 눈빛이 변했다.
그녀가 진지하게 캐물었다.
“샤를의 이복 형제자매들이 우리를 공격한다고 어찌 그리 자신하느냐?”
“그것은 필연입니다.”
“왜?”
그녀의 물음에 버나드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가까운 미래, 왕좌에 앉을 수 있는 자는 한 명 뿐이니까요.”
버나드가 프레드릭왕에게 다가가는 방법중의 하나는 미셸이나 샤를을 여왕으로 만드는 퀸메이커가 있다. 이 시점에서 그것이 가장 안전하고 실현 가능성이 컸다. 그의 머릿속에는 아킨테 가문 사람 누구라도 좋으니 차기 여왕이나 왕으로 크게 키울 생각이 있었다.
“네 말대로 샤를의 이복 형제자매들중 일부와 동맹을 맺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나중에 우리와 동맹을 맺은 자들의 처리는? 그들도 왕좌에 앉고 싶어할텐데?”
“그러므로 가치가 없어지면 기회를 봐서 미리 죽여놔야합니다.”
미셸은 흠칫 놀랐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소년의 생각이라고 도무지 믿기가 어려웠다.
버나드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그저 영리하고 무예에도 소질이 있는 소년일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그녀의 머리속은 이내 혼란스러워졌다.
그럼에도 버나드를 향해 짐짓 미소를 지어보였다.
“우리는 일단 아킨테로 갈것이다. 그리고 네 말은 그때가서 다시 생각해보자구나.”
“그랬다간 남들보다 출발이 늦습니다. 우리가 먼저 움직여서 판을 짜야합니다. 늦으면 끌려다닐뿐입니다.”
“늦어도 상관없어.”
“네?”
“난 아킨테의 미셸이다. 조급해하지 않아.”
그녀는 남들보다 뛰어나 보이는 버나드를 아끼지만 아직 그의 주장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
왕도 아이다썬, 겁쟁이 클리프의 대저택.
하인들과 기사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짐을 싸고 있었다.
여기저기 쌓인 짐들로 정원이 어지러운 가운데 클리프는 여행 준비를 끝마치고 마차에 앉아있는 마가렛을 사랑스럽게 쳐다보았다.
“오 나의 귀여운 부인 마가렛이여, 우린 지금부터 아킨테의 미셸을 죽이러 갈거랍니다.”
클리프의 손길이 마가렛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으나 마가렛은 멍한 표정을 지은 채 넋이 나간 사람처럼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었다. 혼이 없는 인형 같았다.
“왜냐구요? 후후, 오래전 미셸이 궁에서 지낼때 날 겁쟁이 클리프라고 비웃으며 한참 아랫사람 보듯 멸시하는 표정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답니다. 겉으로 내색은 안했지만 내 눈에는 분명 그렇게 보였어요. 형과 함께 뒤에서 제 흉을 봤을테죠. 그때의 복수를 할 생각이랍니다. 아, 내 말이 너무 길어 잘 이해가 안된다고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이죠? 옛날에 날 무시하고 모욕하던 미셸이 살아 숨쉬고 있는게 무척 짜증이 납니다. 그래서 죽일겁니다. 그보다 더 짜증났던 아말리아도 이미 죽었는데 미셸만 살아있으면 불공평하잖습니까, 부인."